On Air RAW novel - Chapter 178
178화.
“서 피디님까지 왜 그래요, 정말! 우리는 여태 말 안 한 게 더 안 괜찮아요! 송 작가님도 어떻게 맨날 애 보고 해서 힘들다고 그러면서 도와 달라고 한마디를 안 해요?”
민혜가 맞은편에서 두 손을 모아 비는 시늉을 했다. 재희가 턱을 괴며 말했다.
“임 선배 말대로 TF 체제 전환해 준다고 하면 고맙지. 이거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무조건 방송해야 된다고. 엄대진이 청와대 입성하는 거 우리 힘으로 못 막을 수도 있는 거긴 한데, 최소한 끝까지 발목이라도 잡아 봐야 할 거 아냐. 손 놓고 그냥 당하는 거 열 받잖아.”
“하여튼 엄대진 그 새끼 웃겨. 누구 맘대로 지가 청와대 들어가는 거 다 정해 놨대요? 이왕 갈 거 화끈하게 다 태우고 가죠, 뭐. 그나저나 이제 우리 밥 좀 먹으면 안 됩니까? 점심부터 부실하게 먹어서 죽겠어. 사람이 일단 밥을 먹어야 뭐라도 하지.”
예준이 앞에 놓인 음식을 가리키자 재희가 얼른 먹으라고 손짓을 했다.
“먹어, 먹어. 내가 못 먹게 한 거 아니잖아.”
“소주도 좀 시켜 줘요, 그럼. 이왕 쓰는 거 좀 더 쓸 수 있잖아. 우리가 맨 정신에 어떻게 이런 일 하나, 사람이 살짝 가 있어야 하지.”
철진의 말에 지혁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벌떡 일어나 문을 열고는 바깥에 대고 여기 술 좀 주세요, 하고 소리쳤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정언은 벽에 기대며 바람 빠지는 소리로 웃었다.
팀원들이 먼저 팔을 걷어붙이고 도와준다고 하는 건 정언 입장에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말이 어디서 새어 나갈지도 모르고 표적이 될 수도 있었기에 할 수 있다면 되도록 끝까지 자신이 해결하고 싶었다. 그러나 일이 이렇게까지 된 이상 그건 욕심이었다.
입장을 바꿔 생각한다면 팀 내의 누가 자신과 같은 상황이었더라도 정언 역시 똑같이 행동했을 게 당연했다.
“정언, 먹고 기운 좀 내. 아까부터 넋 빠진 사람처럼 그러지 말고.”
민혜가 팔꿈치로 정언을 쿡 찌르며 속삭였다. 움찔한 정언은 먹어요, 먹어, 하고 대답하며 젓가락을 들었으나 썩 입맛이 생기는 건 아니었다.
젓가락 끝으로 밑반찬만 몇 개 깨작이던 정언은 윤 쪽을 흘끔 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윤은 이 시끄러운 곳에서도 내내 말이 없었다. 앞에 놓인 음식도 거의 줄어들지 않은 채였다.
곁에 앉아 있던 호형이 윤 앞의 잔을 채워 주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어지간하면 잘 못 마신다고 거절할 텐데, 어쩐 일인지 윤은 잔을 받아 그대로 마셨다. 지혁이 어어, 하며 뭐라고 묻자 윤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마 괜찮은 거냐고 물은 듯했다.
잔을 내려놓던 윤이 이쪽을 보았다. 시선이 마주쳐 놀란 정언은 황급히 눈을 피했다. 목덜미가 화끈거렸다. 미쳤지 서정언, 하고 속으로 중얼거린 정언은 결국 나갈 때까지 윤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팀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난 건 밤 열 시가 다 되어서였다. 계산을 마치고 나온 재희는 작가들을 먼저 보내더니 정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바닥을 보고 있던 정언은 어깨를 툭 치는 재희의 손길에 고개를 들었다.
“일단 가 보자. 나도 다른 생각 안 할게.”
“새삼스럽게 뭐.”
짧게 대답한 말에 재희가 웃었다.
“들어가서 좀 쉬어. 나도 오늘은 집에서 자야겠다.”
고개를 돌린 재희는 몇 걸음 떨어져 서 있던 윤을 불렀다.
“김 피디!”
재희가 손짓하자 멈칫하던 윤이 이쪽을 보았다. 재희가 고개를 까딱여 정언을 가리키며 윤에게 말했다.
“서 피디 좀 데려다주고 가.”
“아니, 괜찮…….”
기겁을 한 정언이 사양하려 했으나 윤이 중간에 말을 끊었다. 본의 아니게 곤란한 상황을 만들어 놓은 재희는 아무것도 모른 채 쿨하게 나 간다, 하고 손을 흔들어 보였다.
뭐라고 하기도 전 길가에서 택시를 잡아타더니 휑하니 사라지는 재희의 뒷모습에 정언은 저 인간이, 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공연히 머리 꼭대기까지 화끈거리는 기분이었다.
죄 없는 머리칼을 흩으며 보도블록의 선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정언은 눈을 들었다. 곁에 선 윤이 먼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머뭇거리던 정언은 윤의 곁에서 조금 떨어져 걸었다. 겨우 십오 분도 채 되지 않을 거리가 몇 배로 느껴지는 건 왜인지 모를 노릇이었다.
한동안 말없이 걷던 정언은 윤의 옆얼굴에 시선을 주었다. 도로의 헤드라이트와 간판의 빛 따위에 드러나는 흰 얼굴은 조금 상기된 듯했다.
“취했어?”
정언이 묻자 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뭐라고 더 대화를 잇기 힘들 만큼 똑 떨어지는 대답이었다. 괜히 말을 붙였나 싶을 정도였다. 어색해서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그러니까 아까 왜 그런 거냐고 묻고 싶었으나, 그건 자신에게도 똑같이 해야 하는 질문이었다.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할 걸 알았으면서, 왜 하게 내버려 뒀느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누가 보지만 않는다면 당장 아무 벽이나 붙들고 머리를 박고 싶은 기분이 된 정언은 입을 다문 채 바닥을 보았다. 입사한 뒤 가장 긴 귀갓길을 꼽으라면 단연 지금이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길을 걸어 간신히 오피스텔 현관 앞에 선 정언은 가방을 뒤져 카드키를 찾았다. 초조한 탓인지 가방 속의 물건들이 더 뒤섞인 것 같았다.
설상가상으로 가방 바닥의 카드키를 간신히 찾아 쥔 순간 가방이 열린 채 뒤집히며 안의 물건들이 바닥으로 죄다 떨어졌다. 미치겠네, 하고 속으로 중얼거린 정언은 몸을 숙여 황급히 다이어리며 펜 따위를 주웠다.
가방에 아무렇게나 물건들을 쑤셔 넣던 찰나, 윤이 바닥에 뒹굴던 지갑을 집어 들어 내밀었다. 무심코 시선을 들자 눈이 마주쳤다. 현관 안쪽의 창백한 조명에 비친 윤의 눈동자는 밝은 갈색으로 보였다.
원래 이런 느낌이었나, 불현듯 정언은 그런 것을 생각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본 그 눈이 어땠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순간을 떠올리자 안개가 내려앉았던 회색 옥상, 공기의 냄새, 그 사이로 스치던 익숙한 섬유유연제 향 같은 것, 그리고…… 녹아들던 숨과 체온이 뒤따라 되살아났다.
그 생생한 감각에 퍼뜩 놀란 정언은 숨을 들이쉬었다. 윤의 손에 들린 지갑을 받아 든 정언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아까 일은…….”
“실수였다고 하고 싶으세요?”
그렇게 말하려던 건 아니었지만, 윤이 말을 끊는 바람에 머릿속에서 그다음의 단어들이 완전히 지워졌다.
정언은 답지 않게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윤을 마주 보았다. 가만히 자신을 응시하는 눈은 가라앉아 있었다. 짧은 침묵 사이로 도로를 지나치는 자동차의 경적 소리가 멀게 들렸다.
먼저 입을 연 건 윤이었다.
“선배가 그런 실수 할 사람 아닌 거 알아요. 저도 그런 행동하면 안 됐던 거 알고요.”
뜨거운 것을 잘못 만진 순간처럼 심장 어딘가가 뜨끔해졌다.
그런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정언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실수라는 단어는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귀 끝이 화끈거렸다. 정언은 윤의 시선을 비껴 피했다. 윤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대답 안 하셔도 된다고, 강요 안 할 거라고 했는데 마음 달라졌어요.”
그 말에 정언은 멈칫하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윤은 애써 웃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표정은 그리 오래 유지되지 못했다.
“선배가 대답해 주실 때까지 기다리려고요. 싫다고 얘기 안 하신 이유 있다고 생각하니까.”
담담한 말투였으나, 정언은 윤이 몹시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곧 알아차렸다. 윤은 마르는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말을 이었다.
“선배가 전혀 원하지 않았는데 제가 강제로 그런 거면 지금 저 경찰에 신고하셔도 돼요. 제 얼굴 보는 거 힘들다고 하시면 사표 쓰고 나갈게요. 그런데 그런 거 아니면…… 제가 조금 더 기다려도 될 것 같아서요.”
머릿속에서 그 말을 계속 생각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정언은 대답하지 못했다. 윤이 자신에게 무엇도 강요하지 않았다는 건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윤은 선택의 기회를 주었고, 그런 선택을 한 건 정언 자신이었다.
정언은 잠시 눈을 내리감았다. 감은 눈 안으로도 윤의 웃는 얼굴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심장이 조금씩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늘 그렇듯 정의할 수 없는 병명. 긴 정적이 지났다. 자신과 윤을 제외한 주변의 모든 것이 마치 아웃 포커싱된 사진처럼 흐릿해졌다.
“혹시 선배한테 상처 줬을까 봐…… 무서웠어요.”
윤이 입을 열었다. 더 낮아진 목소리가 떨렸다. 정언은 눈을 들었다. 그러나 정작 윤은 정언을 마주 보지 못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얼굴. 불안한 동시에 열에 들뜬 듯한 그 얼굴은 앳된 소년처럼 느껴졌다.
“……그런 거 아냐.”
짧은 정적 끝의 대답에 윤이 잠시 숨을 멈췄다. 초조한 표정으로 손을 몇 번이나 쥐었다 펴던 윤이 겨우 정언과 눈을 맞춰 왔다. 그리고 한참을 망설이더니 입술을 달싹였다.
“한 번만 안아 보면 안 돼요?”
상상하지도 못한 말이라 정언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게 허락은 아니었으나, 용기가 난 듯 한 걸음 다가선 윤이 정언의 어깨를 감싸 끌어당겼다. 무방비하게 파묻힌 품에서 한낮의 햇살 냄새가 떠올랐다가 흩어졌다.
키스할 때보다도 윤은 더 많이 떨고 있었다. 긴장한 듯 잔뜩 억눌린 숨소리가 귓가에서 가늘게 흩어졌다. 잠시 고개를 숙여 정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던 윤의 팔이 곧 풀려 나갔다. 그러나 윤은 아쉬운 듯 더 떨어지지는 못했다.
입술 끝을 잘근거리던 윤이 겨우 고개를 들었다. 하얀 목덜미까지 온통 새빨개진 것이 어둠 속에서도 선명했다.
“내일 봐.”
정언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윤이 그 말에 잠깐 웃었다. 눈도 맞추지 못한 채 시선을 내린 윤이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돌아선 정언의 등 뒤에서, 윤이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잠 안 올 것 같아요.”
입 안으로 스미던 감각처럼 부드러운 단어들이 심장 위로 얇게 쌓였다. 갓 내린 눈의 결정 같은 단어들은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녹아들었다.
낯선 느낌에 당황한 정언은 그 자리에 멈췄다. 카드키를 쥔 손이 떨렸다. 그리고 그때, 자신이 그런 선택을 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는 걸 정언은 불현듯 깨달았다.
윤이었으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정언은 서둘러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유리문 너머로 자신을 보는 윤의 시선이 느껴졌다. 입구를 돌아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자, 윤의 시야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자각한 순간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온몸의 긴장이 갑자기 풀렸다.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정언은 그 자리에 다리를 접어 주저앉았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때 주머니 속의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습관적으로 들여다본 액정에는 짧은 메시지가 떠 있었다.
― 잘 자요, 선배.
무릎에 얼굴을 파묻은 정언은 오랫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