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79
179화.
윤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커피를 마시며 멍하니 문에 비친 얼굴을 보았다. 거의 한숨도 제대로 자지 못했기에 습관적으로 커피를 사긴 했지만, 사실 각성제를 들이부은 것처럼 정신은 멀쩡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잠을 자는 게 무서웠다. 어제 그게 진짜 꿈이었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윤에게 정언과의 일이 현실이라는 걸 알려 준 유일한 물건은 포켓에 꽂아 두었던 보이스리코더였다. 이사회실에서의 일이 그대로 녹음된 파일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나서야 그게 꿈이 아니었구나 싶었던 것이다.
사실 정언과 키스한 뒤로 징계고 뭐고는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2개월 감봉이 아니라 20개월 감봉이라고 해도 기꺼이 그러려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옥상 정원에 앉아 몇 시간이나 넋을 놓고 있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었다.
때마침 옥상으로 올라왔던 재희가 거기서 정신이 나간 얼굴로 앉아 있던 윤을 본 게 다행이었다. 재희가 문자 못 받았냐, 왜 여기 있냐 하고 묻지 않았다면 밤새도록 옥상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을지도 몰랐다.
사실 정언이 뺨을 때리든 경찰에 신고하든 받아들일 각오까지 하고 있었다. 그런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일이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이런 짓을 저질러 본 적 없었고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그게 정말 내가 한 짓이 맞나 천 번쯤 자문한 건 당연했다.
머리를 마구 흩으며 사무실 문을 열자, 오늘따라 일찍 출근한 예준이 어어, 하며 손을 흔들었다. 재희가 왔어? 하고 묻는 것과 거의 동시에 먼저 와서 앉아 있던 정언이 이쪽을 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귀 끝에 누가 불을 붙인 것처럼 뜨거워졌다.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인사를 건네자 정언이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고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정언은 평소와 전혀 달라 보이지 않았다. 물론 사귀자고 한 것도 아니었고, 정언이 무슨 대답을 한 것도 아니었기에 그런 반응은 충분히 예상한 것이었다.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을 수가 있나 싶어 심경이 복잡해진 것도 사실이었다.
자리에 앉은 윤은 파티션 너머의 정언을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모니터를 응시했다. 내일모레면 서른인데, 뭐 직장 선배랑 어떻게 해서 키스 한 번 할 수도 있지 이게 뭐 별일이라고…… 애써 생각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한 윤은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쌌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별일이었다.
미친놈, 하고 속으로 백 번쯤 중얼거리며 괴로워하고 있던 윤을 구해 준 건 핸드폰의 진동 소리였다. 황급히 핸드폰을 꺼내 보자 액정에 뜬 유원신이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이종규 팀장으로부터 본사에서 이미 취재 내용을 알고 있다는 제보를 받은 뒤에, 재희가 서온건설 본사 분위기를 좀 알아봐 달라고 부탁해 원신에게 메시지를 보내 놨던 것이 뒤늦게 떠올랐다.
윤은 핸드폰을 들고 사무실 밖으로 나와 비상구 계단에 걸터앉으며 전화를 받았다.
“어, 형. 출근해요?”
『오늘 연차 썼어. 다른 회사 면접 있어서. 준비하다가 연락한 거야.』
“회사 진짜 옮기려고요?”
윤이 놀란 말투로 묻자 핸드폰 너머에서 원신이 어휴, 하고 한숨을 쉬었다.
『요새 회사 분위기 장난 아냐. 전체메일로 절대 언론 인터뷰 이런 거 응하지 말고, 내부 정보 유출하다 걸리면 고소하겠다고 날아오더라.』
윤은 손끝으로 입술 위를 만지작거렸다. 사내 전체메일로 그런 내용을 돌린다는 건 그쪽에서도 어지간히 몸이 달아 있다는 증거나 다름없었다. 정보가 계속해서 새고 있는데, 어디서 새는지를 알지 못하니 일단 무조건 입을 틀어막겠다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더 안 좋은 거 아니에요?”
윤의 물음에 원신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도 지금 회사에 무슨 일 있냐고 그런다니까. 이 회사 사원이 몇 명인데 입을 막냐. 당장 나만 해도 지금 너랑 이러고 있는데. 내가 그 전체메일 캡처한 거 보내 줄게 한 번 봐. 아주 기가 막힌다니까.』
“형 이거 걸리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걱정스럽게 묻는 윤의 목소리에 원신이 킬킬 웃고는 대답했다.
『걸리긴 뭘 걸려. 구직자들 카페 같은 데서도 서온건설 뭐 안 좋냐고, 자기가 여기 다니는 사람들한테 들은 게 있다고 그러면서 글 올라온다는데. 진송신도시 분양권도 가격 낮춰서 매도중이고.』
윤은 그 말에 조창식의 핸드폰에 들어 있던 동영상을 떠올렸다. 동영상 속에서 엄대진이 단가를 낮춰서라도 미분양 세대 빨리 처리하라 전하라고 손경일에게 말하던 것이 생각난 까닭이었다. 윤은 원신에게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미분양 세대 말하는 거죠?”
『맞아. 이번 주부터 한정 수량으로 비인기 세대부터 파격 분양가로 매도한다고 광고 나갔다는데 벌써 꽤 팔렸다고는 들었어. 어, 야. 나 끊어야겠다. 지금 전화 들어와서. 나중에 다시 통화해.』
원신의 전화가 끊어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윤은 머릿속으로 통화 내용을 정리하며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사이 출근했는지, 재희와 예준이 앉아 있다가 윤에게 손을 흔들었다. 윤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곤 자리로 돌아왔다.
정언은 수화기를 한쪽 어깨에 끼고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부지런히 메모를 하고 있었다. 윤이 자리에 앉기 무섭게 수화기를 내려놓은 정언이 구겨진 미간을 누르며 의자를 뒤로 젖혔다.
“노이섭 팀장님한테 연락 왔어. 장영관하고 김성학 부검 결과 나왔는데 폐에 물이 하나도 안 찼다고 그러는데.”
“폐에 물이 안 찼다는 게 무슨 얘기예요?”
윤이 묻자 정언이 피곤한 듯 조금 충혈된 눈가를 누르며 말했다.
“익사가 아니라고. 물에 빠지기 전에 죽었다는 소리야. 둘 다 체내에서 알코올하고 졸피뎀 성분 검출됐고, 목 앞쪽으로 삭흔(索痕: 끈 자국)이 있대. 과학수사팀 분석 결과로는 차에 앉은 상태로 뒷좌석에서 습격당한 것 같다고 했다네.”
“졸피뎀이면 수면제 말하는 거 맞죠?”
“응. 둘 다 체격이 탄탄한 편인데 반항한 흔적 자체가 거의 없대. 술에 수면제 타서 먹인 뒤에 죽인 거지.”
잠시 생각에 잠겼던 윤은 눈썹 위를 긁적였다.
“그러면 차 안에 최소한 한 사람이 더 있었다고 봐야겠네요. 장영관하고 김성학이 차 안에서 수면제 탄 술 마시고 정신 잃었을 때 뒷자리에서 누가 목을 졸랐다는 거잖아요.”
“그럴 가능성이 높지. 거기 사건 현장이 도로에서 저수지 방향으로 비탈이 있더라고. 비탈 아래 수심이 깊어서 원래 출입이 안 된다는데, 차가 사이드브레이크 풀린 상태였대. 범인이 죽인 다음에 내려서 차를 뒤에서 민 거야. 사이드 풀렸으니까 비탈로 미끄러지면서 물속으로 처박힌 거고.”
정언이 손으로 허공을 미는 시늉을 했다.
“용의자는요?”
“근처 수색하면서 로프 한 롤 발견했는데, 아마 죽일 때 쓰고 그대로 버리고 간 것 같대. 새 물건이라 양양 철물점 전부 탐문했는데 한 군데서 이거 사 간 사람 차종하고 색깔을 정확히 기억했나 봐. CCTV 돌려서 용의자로 추정되는 차량 찾았는데 경일용역에서 쓰던 차량이래. 노이섭 팀장님이 조창식 녹취 파일하고 CCTV 화면 가지고 있으니까, 손경일 주범이나 최소 사주범으로 보고 추적하기로 했어. 전국 경찰서에 협조 요청했고, 출국 금지 걸었다고 하더라고.”
손경일이 경찰의 표적이 됐다는 건 이쪽으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위에서 무슨 압력을 넣을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일단 추적당하는 이상 손경일이 지금까지처럼 함부로 위협을 가하기는 어려울 게 틀림없었다.
메모지에 정언의 말을 메모하던 윤이 아, 하며 입을 열었다.
“지금 서온건설 있는 선배하고 통화했어요.”
“그래? 분위기 어떻대?”
정언이 팔짱을 끼며 물었다. 윤은 머릿속으로 정리했던 통화 내용을 되새기며 대답했다.
“언론 인터뷰 응하지 말라고, 내부 정보 유출하면 법적 대응하겠다고 전체메일 돌렸다는데요. 이번 주부터 진송신도시 미분양 세대 파격가 분양이라면서 매도 시작했다는데, 아무래도 경선 시작되니까 엄대진이 빨리하라고 오더 내린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어차피 경선 당선될 건 확실하니까 대선 운동 자금 마련해야 되겠지. 확인 좀 해 봐야겠네. 아, 주 선배, 사모님한테 안영균 와이프 얘기 물어봤어요?”
정언이 예준에게 묻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예준이 대답했다.
“어제 집에 들어가서 얘기는 했어. 주말에 봉사 모임 있다고, 자기가 뭐 알아볼 수 있는 거 있으면 한 번 알아보겠대.”
“오케이, 혹시 사모님 뭐 좋아하시는 거 없어요? 맨입으로 소스 따는 거 아닌데.”
그 말에 예준이 재희보고 들으라는 듯 한숨을 쉬었다.
“우리 와이프는 나 야근 안 하는 거 좋아하고, 월급 오르는 거 좋아하고, 회사 오래 다닌다고 하면 좋아하고…….”
정언이 푹 웃자 재희가 들고 있던 펜 끝을 예준에게 향하며 두어 번 흔들어 보였다.
“어어, 우리 어제 한 말 잊지 말자고. 주 피디 곧 회사 그만 다닐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아침에 이제 회사 잘리면 어디 도서관으로 출근할까 검색하면서 왔잖아요. 집에서 너무 가까우면 걸릴 거 같고, 너무 멀면 돈도 못 버는데 차비는 아껴야지 싶고. 아, 그 딱 좋은 거리가 의외로 어렵다니까.”
예준이 심각하게 대꾸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도무지 분간이 가지 않는 선배들의 대화에 윤은 웃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해야만 했다.
윤이 갈등하는 사이 핸드폰이 진동하며 원신에게서 온 메일 알림이 떴다. 즉시 열어 보자 서온건설 사내 메일의 캡처본이 눈에 들어왔다.
최근 일부 관계자들이 본사에 대한 악의적 소문 및 추측을 유포하고 있습니다. 이에 본사는 즉시 법적 대응 예정이며, 이와 관련되어 사내 정보를 함부로 언론에 유포하거나 언론의 취재 요청에 응하는 등의 행위는 전 사원이 입사 시 작성한 계약서의 비밀유지조항 위반으로 간주하고 법적인 책임을 묻겠습니다. 전 사원은 본사에 대한 부적절한 정보 또는 이러한 정보를 발설하는 행위자를 발견하는 즉시 사원행복문화팀으로 제보 바랍니다.
악의적 소문 및 추측, 윤은 눈으로 그 단어들을 다시 한 번 읽었다. 서온건설 입장에서도 굳이 이렇게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야 할 정도로 쫓기는 입장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일이 터진다 해도 어떻게든 막을 수는 있겠지만, 최대한 공론화가 되기 전에 저지하고 싶을 것은 당연했다. 윤은 서둘러 방금 받은 메일을 재희와 정언, 민혜의 주소로 포워딩했다.
“서온건설 사내 메일 캡처본이래요.”
파티션 너머로 정언에게 말하자, 핸드폰으로 들어온 메시지를 보며 뭔가 메모하고 있던 정언이 눈을 들지 않은 채 대답했다.
“오케이. 민 의원님 사무실에서 점심시간쯤 들러 줄 수 있냐고 그러네. 다른 스케줄 없지?”
“아, 네.”
대답한 윤은 정언과 자신 사이의 파티션으로 눈을 주었다가 턱을 괴며 남몰래 한숨을 뱉었다. 정언이 진짜 아무렇지도 않은 건지 궁금해진 탓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