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8
18화.
자살, 이라고 발음하며 희경은 잠시 말을 멈췄다. 커피 잔 손잡이를 꽉 쥔 희경의 손끝이 하얗게 질렸다. 숨을 들이쉰 희경이 아까보다 조금 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건축 중인 현장에 올라가서 뛰어내렸다는 거예요. 유서가 있냐, 하니까 없대요. 저보고 뭐 남긴 거 없냐는 거예요. 너무 어이가 없으니까 눈물도 안 나더라고요. 남기긴 뭘 남기냐고, 애기 아빠 어제저녁에 애기들하고 전화했다고, 아무 일도 없었다고 제가 막 소리를 지르니까 조 계장님이 진정하라고…… 근데 어떻게 진정을 해요. 누가 거기서 진정을 하겠어요. 규형 씨 내가 봐야겠다고, 내게 보여 달라고 막 발작을 하니까 간호사들도 뛰어오고 아무튼 난리가 났죠. 그러고 있으니까 계장님이 이따가 보래요. 지금 보면 졸도한다고. 그래서 그걸 계장님이 어떻게 아냐고, 졸도가 아니라 심장마비를 해도 내가 지금 봐야겠다 해서 들어갔는데…….”
말이 점점 빨라지던 희경이 기어이 울음을 터트렸다.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고 끅끅거리며 눈물을 삼키는 희경을 본 윤이 얼른 장식장 위에 놓여 있던 티슈를 가져와 희경 앞으로 밀어 놓았다.
희경이 티슈를 몇 장 뽑아 얼굴을 가리고는 한참 어깨를 들썩였다. 정언은 아무 말도 없이 그런 그녀를 보았다. 몇 년을 일하며 이런 사람들을 수없이 많이 봤지만 그래도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 풍경이었다.
말없이 그녀를 응시하던 정언은 윤을 슬쩍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빨개진 눈을 감추려 한쪽으로 고개를 돌린 윤이 공연히 코끝을 문지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몇 분을 그렇게 울던 희경이 앞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죄송해요. 아휴, 제가 참…….”
“괜찮습니다. 좀 쉬었다 할까요?”
정언이 묻자 희경이 손을 저었다. 누군가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필요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정언은 희경이 다시 말을 시작할 때까지 기다렸다. 숨을 크게 들이쉰 희경이 더듬거렸다.
“그래서 애기 아빠를 봤는데, 그게 진짜…… 말로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어요. 막 꿈을 꾸는 것 같고…… 정말 눈물 한 방울 안 나와요. 이게 왜 규형 씨냐고…… 우리 애기 아빠 아니라고, 절대 아니라고 내가 막 그러니까 계장님이 절 끌고 나왔어요. 경찰이 와서 진짜 유서가 없었냐, 최근에 무슨 말 한 거 없었냐고 물어보는데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더라고요.”
“평소에 회사 일에 대해 다 얘기하고 하셨어요?”
“네. 그런 거 숨긴 적은 없었어요. 가정적인 사람이에요. 저한테도 애들한테도 잘 해요. 바빠서 그렇지 일 없을 때는 애기들 씻기고 머리 빗겨 주고 옷 갈아입혀 주고 이런 것도 다 하고, 주말에 저 쉬라고 자기가 애들 둘 데리고 놀러 다니고…… 저도 학교에서 무슨 일 있으면 애기 아빠한테 얘기하고, 남편도 회사에서 있는 일 얘기 많이 했어요. 회사 회식할 때 뭐 먹었는지 그런 것까지 다 얘기하고 그랬거든요.”
규형에 대해 하나하나 되짚는 희경의 말투가 점차 담담해졌다. 그러나 그 단어들은 마치 허공에 흩어지는 연기처럼 힘이 없었다. 정언은 애써 그 무력함을 외면했다.
“이상한 기미가 전혀 없었다는 거죠?”
“그런 게 있었으면 제가 알았을 거예요. 회사에서도 평판이 좋았고…… 사람들하고도 항상 원만하고 그랬거든요. 절대 누구한테 원한 같은 거 살 사람도 아니었고요.”
“금전 관계나 이런 건요?”
“그런 것도 전혀 없어요. 수입도 저한테 다 맡기고 용돈 타서 썼고요. 아 참, 큰애가 발레 하고 싶대서 우리 형편에 학원비 대기가 좀 빠듯하다 하니까 자기 용돈 줄여서 주라고 그러던 사람이에요. 돈 한 푼도 허투루 안 쓰는 사람이라 저 몰래 돈 빌리거나 빌려 주거나 이런 건 정말 없어요.”
희경은 그 말을 하며 겨우 조금 웃었다. 정언은 보이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것은 역시 편하지 않았다. 죽은 규형이 가족들에게 얼마나 다정한 남편이고 좋은 아빠였는지 알수록 마음이 더 무거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정언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는 재차 물었다.
“그러면 원한 살 일도 없고, 금전 문제도 없고, 회사에서 아무 일도 없는 분이 갑자기 그러셨다는 거죠? 아무 기미도 못 느끼셨던 거고요?”
“네. 제가 정말로 너무 이상한 게, 회사에서는 남편이 문제가 있었대요. 일이 너무 많아서 힘들다고 자주 얘기했고 우울해하고 그랬다고요. 백 번 양보해서 제가 그걸 몰랐을 수 있어요. 그럴 수 있는데, 보통 자살할 사람이 며칠 뒤 약속 잡고 이런 건 안 하잖아요.”
정언은 펜을 멈추며 고개를 들었다.
“약속을 잡았다고요?”
“그 주 주말에 애기들 데리고 아쿠아리움 가기로 했었어요. 애들하고 한 약속은 꼭 지키는 사람이에요. 작은애가 네 살 됐는데 고래를 너무 좋아하거든요. 고래 꼭 보고 싶다고 그래서, 애기 아빠가 다 같이 가자고…… 잠깐만요.”
자리에서 일어난 희경이 안방으로 들어갔다. 무언가를 찾는지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펜을 내려놓은 정언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윤 쪽을 보았다. 계속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던 윤이 코가 꽉 막힌 목소리로 겨우 입술을 달싹였다.
“선배, 죄송해요. 저 화장실 좀 갔다 와도 될까요?”
정언은 대답 대신 고개를 까딱했다. 윤이 자리에서 일어나 후다닥 화장실로 들어갔다. 곧 세면대에서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온 윤은 다시 한 번 죄송해요, 하고 조그맣게 말하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앞머리가 젖은 채였다.
세수를 한 모양이었으나 빨개진 눈까지는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정언은 못 본 척 시선을 돌렸다. 곧 돌아온 희경이 들고 있던 핸드폰을 내밀었다.
“애기 아빠 핸드폰이에요. 경찰에서 조사하고 받았는데…… 여기, 이거 보세요. 토요일에 아쿠아리움 표 예매한 내역하고 카드 결제 문자도 다 남아 있거든요.”
“이쪽으로 좀 보여 주시겠어요? 저희가 촬영해도 될까요?”
“그럼요.”
“김 피디, 여기 찍어 줘.”
정언은 핸드폰에 시선을 둔 채 손짓으로 윤을 불렀다. 윤이 규형의 핸드폰을 촬영하는 동안 정언은 희경이 보여 준 화면을 확인했다.
포털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예매 서비스 내역이었다. 분명 희경이 말한 일자에 네 명의 티켓이 예매되어 있었다. 희경이 메시지 함을 열어 카드사에서 온 결제 내역을 가리켰다.
“어른 둘에 애 둘 해서 7만 9천 원, 여기요. 아쿠아리움 예매 입장권이라고 돼 있죠?”
핸드폰의 화면을 아래위로 내려 본 정언은 다시 예매 내역을 확인하기 위해 무심코 홈 버튼을 눌렀다. 핸드폰의 배경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두 딸의 사진이었다. 액정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아이들의 얼굴이 작은 가시처럼 걸렸다.
정언은 서둘러 아까의 인터넷 창을 켜고 페이지를 앞뒤로 돌려 보았다. 예매가 취소된 내역은 전혀 확인할 수 없었다.
다이어리에 아쿠아리움 예매 내역 확인, 이라고 적은 정언은 핸드폰의 화면을 뚫어지게 보았다. 단란한 가정의 가장이고 두 딸의 자상한 아빠인 남자가, 가족들과 가려고 며칠 뒤의 아쿠아리움 티켓을 사 놓고 갑자기 자살할 이유가 무엇일까.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언은 이미 자살자에 대해 여러 번 취재한 적이 있었다. 경험상 이런 식으로 아주 가까운 미래의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놓고 갑자기 자살해 버리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회사에서는 뭐라고 했죠? 보상 얘기도 했다면서요?”
“애기 아빠가 평소에도 많이 힘들어했대요. 일이 많아서 그만두고 싶다는 얘기를 자주 했다면서요. 현장에서도 문제가 좀 있었다는데, 모르겠어요. 정말 그럴 사람이 아니거든요. 진송신도시 말고 다른 현장에도 많이 있었는데,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어요.”
“확인해 줄 동료분이 있을까요? 아까 그 조 계장님이라는 분은 원래 친하셨나요?”
“조 계장님은, 사실 저는 잘 몰라요. 가끔 애기 아빠가 회식하고 많이 취하거나 그랬을 때 한두 번 통화한 게 전부라서요. 다른 분들도 장례식 후에 연락이 잘 안 되고…….”
희경이 말끝을 흐렸다. 정언은 흠,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정언이 무언가 석연찮아한다고 느꼈는지, 희경이 급히 말을 보탰다.
“아, 회사에서 산재에 준하는 보상을 하겠다고 하더라고요. 장례비용 일체를 회사에서 내고 별도로 1억 5천 주겠다면서요. 저는 일단 애기 아빠가 자살했는지도 확실하지 않은데 어떻게 받냐, 이 돈은 못 받는다고 했거든요. 그러니까 회사에서는 법정 가면 산재 인정받기 힘드니까 줄 때 받아라, 이런 식으로 말했어요.”
“회사에서 먼저 연락이 온 건가요? 혹시 부검 요청도 하셨어요?”
“네. 병원으로 회사 사람들이 찾아왔어요. 부검은 시댁에서는 하지 말라 했는데 제가 하겠다고 했고요. 유서도 없고 자살할 이유가 없는데 왜 자살했다고 생각하시냐고, 어머님 아버님께 아들이 그럴 사람이라 생각하시냐고 설득하니까 시댁에서도 알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결과는 아직 못 받아 보셨죠?”
“네.”
“관할서가 어디죠?”
“의정부경찰서예요.”
다이어리에 희경의 말을 빠르게 메모한 정언은 눈을 들어 희경을 마주 보았다. 확실히 아까보다는 훨씬 침착해진 모습이었다. 강한 사람이구나. 속으로 생각한 정언은 손에 쥐고 있던 펜 끝을 멈췄다. 희경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죽음과 비등한 고통 속에서도 일상을 무너뜨리지 않으려는 의지를 볼 때면 늘 경외감이 느껴졌다.
“저희가 참고할 만한 자료가 더 있다면 좀 볼 수 있을까요? 뭐든 좋은데요.”
“애기 아빠가 블로그를 했어요. 일기도 쓰고, 애들 사진도 올리고 그랬거든요. 나중에 애들한테 보여 주고 싶다고요.”
정언이 펜을 내밀자 희경이 정언의 다이어리에 블로그 주소를 적었다. 정언은 그 주소에 밑줄을 그은 뒤 희경을 보았다.
“혹시 모르니까 저희가 박규형 씨 방이나 물건, 사진 같은 것들 좀 촬영해도 될까요? 물론 어려우시면…….”
희경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희경이 방 두 개를 모두 보여 주고는 책장에서 앨범을 몇 권 가지고 왔다. 정언은 그 앨범을 넘겨보았다. 결혼사진이며 여행 사진, 아이들 사진이 빼곡하게 차 있는 앨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