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82
182화.
늦은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온 정언은 회의실로 민혜를 불러 주영과의 대화 내용을 이야기했다. 심각한 표정으로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민혜가 펜 끝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전체 입주민 대상으로 전수조사 실시해서 들이밀면 서온건설도 별수 없다?”
“그렇죠. 애들 아픈 이유가 우리 때문이라는 거 증명할 수 있냐, 이러면서 빠져나가기가 힘들다는 거지.”
“ TF에서 임대주택 세 군데도 같은 조사 진행한다고 했나?”
“네. 오면서 전 부장님한테 전화해서 전수조사 설문지 돌리면 어떻겠냐 얘기하니까 알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쪽 주민 대표들하고 얘기해 보겠대요.”
민혜가 오케이, 하고 중얼거리며 노트에 무언가를 끄적였다. 슬슬 구성안 아우트라인을 잡고 있는 건지, 노트에는 플로우차트처럼 보이는 도표 같은 것이 가득 그려져 있었다. 민혜가 구겨진 미간을 손끝으로 눌러 펴며 턱을 괴었다.
“아까 김 피디가 제보 게시판에서 메모해 놓은 게 있길래 내가 제보자들한테 쭉 연락 돌려서 확인해 봤는데, 제일 유력한 게 이거.”
민혜가 종이 한 장을 밀어 놓으며 그 위에 동그라미를 쳤다. 윤이 ‘양양, 식당 주인, 두 사람 대화 들었음’이라고 적어 두고 아래 전화번호를 메모해 둔 부분이었다.
“장영관이랑 김성학이 도피하면서 양양에 머물렀던 게 한 이틀 정도 된 것 같아. 죽기 전날하고 당일. 전날에 여관 앞 식당에서 술을 마시면서 얘기하는 걸 식당 주인이 들었다는 거야. 손님이 없었고 외지 사람이 거의 안 오는 지역이라 주인이 정확하게 기억을 하더라고.”
곁에 앉아 있던 윤이 몸을 조금 앞으로 내밀며 물었다.
“대화 내용이 뭐였대요?”
“술을 많이 마셔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계속 사장님이라는 사람 얘기를 한 건 확실하대요. 둘이 싸우는 것 같았는데 한 명이 사장님이 오시기로 했다, 사장님만 오시면 해결된다, 이런 얘기를 몇 번 해서 기억이 난다고 그러네. 주변에 CCTV는 거의 없고, 있는 사설 CCTV는 고장 난 상태라 손경일이 실제 왔었는지는 아직 파악이 안 됐나 봐요.”
민혜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고 있던 정언은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어차피 철물점에 경일용역 소유 차량이 들렀다 간 건 이미 경찰이 알고 있으니까. 사장님이면 손경일 얘기하는 거겠네요. 손경일하고 양양에서 직접 만나기로 약속을 한 건가? 왜 본인이 직접 움직였지?”
윤이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테이블 위에 손끝을 두드리더니 정언에게 시선을 주었다.
“조창식 제거한 것 때문에 그러지 않았을까요? 전에 우리 한 번 얘기한 적 있잖아요. 조직 오른팔을 그렇게 제거할 정도면 내부에서 불신 생길 거라고.”
민혜가 그 말에 딱 소리가 나게 손뼉을 쳤다.
“그러네, 김 피디 말이 맞는 거 같다. 김성학이랑 장영관 이용해서 조창식 죽였는데, 그러고 나니까 정작 걔들 입장에선 조창식도 죽였는데 누구는 못 죽이겠냐 이런 의심 생겼을 수 있지. 손경일은 조직원 이탈 치명적이니 말 안 새게 직접 자기 손으로 해결하려고 했을 가능성이 높겠네. 손경일만 오면 해결된다고 얘기한 거 보면 믿고 있었던 거 같은데.”
“조창식도 손경일이 돈 줄 거라고 믿었으니까 김성학이랑 장영관 집 안으로 들였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했잖아요. 상황이 그렇게 갔어도 일단 신뢰가 있었던 거라고 봐야죠. 장영관하고 김성학은 조창식 죽인 뒤에 도피 생활 길어지니까 불안해진 거 아니었을까요?”
윤이 조심스럽게 묻자 민혜가 수긍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죠. 두 사람이 싸웠고 한 명은 계속 손경일이 오면 해결된다고 했다니까 자기들도 조창식하고 같은 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거지.”
“손경일도 그거 아니까 거기까지 직접 와서 안심시키고 죽였다, 이렇게 생각하면 딱 맞네.”
정언이 말을 덧붙이자 민혜가 그렇지, 하고 추임새를 넣었다. 잠시 민혜의 동그란 얼굴을 보고 있던 정언은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까 그 뒤에 남편분한테 다른 연락 온 건 없었어요?”
남편 이야기가 나오자 민혜가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었다. 마른 얼굴을 벅벅 문지른 민혜가 생각만 해도 귀찮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직까지는. 근데 이 인간이 간이 아주 콩알만 해져서 자다가 무슨 소리만 나도 벌떡 일어난다니까. 아우, 나 피곤해 죽겠어. 나가서 자라니까 혼자서는 무서워서 못 잔대요. 미쳐, 진짜.”
장난처럼 말하고는 있었으나 민혜나 가족들이 느낄 두려움을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차피 다 같은 처지였다. 정언 자신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는 있었지만 집에 들어갈 때마다 저도 모르게 긴장하게 되는 스스로를 느끼곤 했다.
늘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각오하고 살면서도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세계가 있다는 걸 상상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겪을 공포가 어느 정도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뻔한 것이었다.
“그래도 남편분 입장에서는 얼마나 겁나겠어요. 작가님도 솔직히 안 무섭다면 거짓말일 거 아냐.”
정언의 말에 민혜가 쯧, 하고 혀를 차며 잠시 말이 없다가 투덜거렸다.
“뭐 톡 까놓고 얘기해서 나라고 겁 안 나는 건 아닌데, 하는 짓이 너무 치사하니까 더 열 받아. 차라리 나한테 말을 하든가.”
“그런데 얘들 이게 아주 수법이더라고. 민 의원님하고 얘기하는데, 그때 소송 진행하면서 오상근 교수님이랑 주민 대표분한테도 똑같이 했었대요. 사찰하고 문자 보내고 이러는 거.”
“어머, 미쳤어. 진짜로?”
“근데 더 이상한 게 뭔지 알아요? 사람 붙여서 행적 감시하던 거 잡았는데 한국보수연합 사람이었다네.”
정언의 말에 민혜가 어머머, 어머머, 하며 두 손을 모아 입가에 댔다.
“걔네 맨날 한선당 행사 나가는 애들이잖아. 엄대진이 사람 사서 시킨 거 아냐, 그러면?”
“민 의원님이 정치적으로 해석하지 말아 달라고는 하는데, 뻔하죠 뭐.”
“아우, 정치하는 사람이 결벽증도 병이야, 병. 그걸 정치적으로 해석 안 하면 어떻게 해.”
민혜가 자기 일처럼 발을 동동 구르더니 움직임을 멈추며 정언에게 물었다.
“아니, 그러면 혹시 강 피디 감시하고 그러는 것도 그쪽 사람들 쓰는 건가? 경일용역 애들은 좀 더 범죄 같은 일에 동원하고, 그 정도까지는 아니면 그쪽에 돈 주고 시키고?”
“그건 조사해 봐야 알지.”
정언이 어깨를 으쓱하자 민혜가 윤을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김 피디는 아직 아무 일 없었죠?”
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행이네. 이거, 이거 항상 조심하라고. 우리의 기쁨이니까.”
민혜가 자기 뺨을 톡톡 두드리며 신신당부를 하자 윤이 멋쩍은 얼굴로 왜 그러세요, 하며 손을 휘적였다. 턱을 괴고 있던 정언은 곁에 앉은 윤에게 흘끔 시선을 주었다.
잘생기긴 했네, 하고 속으로 생각하던 정언은 다음 순간 자기 쪽으로 눈을 돌리는 윤과 시선이 마주쳐 움찔했다. 그러자 윤이 씩 웃었다. 무슨 생각 하는지 다 안다는 표정이었다.
그 얼굴에도 이제는 제법 익숙해져 있었으나, 그렇게 웃을 때마다 혜주가 윤을 보면 아침부터 사이다 원샷하는 기분이라고 극찬하던 심정이 이해되는 건 사실이었다.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이렇게 빤히 들여다보이는 느낌에는 쉽게 적응할 수 없었다. 냉방을 시작할 날씨는 아니었으나, 목덜미가 화끈거려 갑자기 에어컨 바람이 간절해졌다.
그때 회의실 문이 열리며 재희가 머리를 들이밀었다. 민혜가 눈을 들어 재희를 쳐다보며 왜, 하고 묻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자 안으로 들어온 재희가 문을 닫았다.
“뉴스 봤어?”
재희의 심각한 표정에 민혜가 가슴 부근을 부여잡으며 빽 소리를 쳤다.
“아우, 난 요새 누가 뉴스 봤어? 이러면 심장마비 올 거 같아! 그렇게 말하지 말고 헤드라인부터 뽑으라고, 좀!”
민혜의 반응에 쿡쿡 웃은 재희가 벽에 기대서며 팔짱을 끼었다.
“ 변순철 회장이 쓰러져서 병원으로 옮겼다고 지금 속보 떴어.”
가슴을 부둥켜안고 숨을 몰아쉬는 척하던 민혜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뭐? 누가 쓰러져? 멀쩡하던 사람이 왜 갑자기?”
놀라기로는 정언과 윤 역시 마찬가지였다. 변순철 회장은 아직도 와 자사 미디어그룹 소유의 종편 채널 뉴스 논조를 직접 좌지우지할 만큼 독재적인 경영 스타일로 유명했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쓰러졌다면 를 등에 업은 엄대진에게 영향이 미칠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재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 쪽 관계자 말로는 지병이 악화됐다고 하더라고. 기자들 얘기 들어 보니까 올해 들어 몸이 계속 안 좋았고, 공식석상 안 나오기 시작한 지는 한두 달 됐대. 저번 달에 해외 출장 있었는데 건강 문제로 그것도 취소했고.”
공식 석상에 나오지 않은 지가 두 달이라면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건 틀림없는 듯했다. 정언은 재희에게 물었다.
“상태가 많이 나쁜가? 무슨 병인데요?”
“심혈관 쪽에 문제가 있는데, 그게 가족력이야. 첫째 딸도 수술 받은 적 있거든.”
“첫째 딸이면 엄대진 처형인가? 이름이 뭐더라?”
“그렇지. 첫째가 변은화, 엄대진 부인인 둘째가 변정화.”
변은화, 변정화, 하고 정언은 입 안으로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기사에 가끔 오르내리는 사람들이라 정언에게도 아주 낯선 이름은 아니었다. 정언은 미간을 찌푸리며 관자놀이 부근을 긁적였다.
“변순철 나이가 적지는 않은데…… 그런데 실질적으로 거기 미디어그룹 전체가 변순철 컨펌 안 받으면 돌아갈 수가 없는 구조라면서요. 경영이 올 스톱 되지 않나?”
“뭐 회사니까 오너 한 사람 없다고 그 지경까지는 안 가겠지. 그런데 기자들한테 좀 재미있는 소리를 들었다고, 내가.”
재희가 의미심장한 얼굴을 했다. 민혜가 왜 또 저럴까, 하는 눈으로 재희를 쳐다보았다. 재희는 고개를 까딱이며 말을 이었다.
“사후 상속분 제외한 회사 지분 상당수가 지금 딸 둘한테 가 있는데, 변은화 남편, 그러니까 엄대진한테는 손위 동서지. 손위 동서 되는 김인택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엄대진이 이 김인택하고 사이가 아주 안 좋다는 거야.”
“사이가 왜 안 좋아?”
흥미가 생겼는지, 민혜가 탁자 위에 팔을 얹으며 재희 쪽으로 몸을 내밀었다. 재희가 손가락을 하나 들어 보이며 대답했다.
“지분 문제. 김인택이 남자 신데렐라야. 원래 집안도 볼 거 없고 그런데 인물이 괜찮단 말이야. 변은화가 그거 하나 보고 결혼하겠다고 해서 변순철이 엄청 반대하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니까 허락해 줬다고.”
“어어, 그 얘기 유명하지. 예전에 여성지에도 한참 나오고 그랬던 거 같은데?”
“응. 그래서 둘째 사위는 절대 그런 실수 안 하려고 핫 데뷔한 정계 아이돌 엄대진으로 데려온 거거든. 사윗감 대통령으로 키우려고 변순철이 찍은 거지, 처음부터.”
재희의 말을 듣고 있던 정언은 잠시 곰곰이 생각하다 물었다.
“자매 사이는 좋아요? 변정화 입장에서는 언니는 자기 마음대로 했는데, 자기는 언니 대신 정략결혼에 희생됐다, 그렇게 느낄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런 것도 없잖아 있는 거 같긴 해. 변은화가 가족력 있다고 했잖아. 건강이 나빠서 실질적인 재산 관리는 김인택이 한다는데, 변정화랑 엄대진 입장에서는 언니가 골골하니까 김인택만 없으면 저게 다 내 건데, 그런다는 소문이 있다고 하더라고.”
“있는 놈들끼리가 더 장난 아니네.”
정언이 혀를 내두르자 재희가 웃는 소리를 냈다.
“그런데 김인택 입장에서도 가진 게 그거 하나고 부인 죽으면 자기는 끈 떨어진 연 신세인 거 아는데 순순히 내놓겠어? 부인을 아주 지극정성으로 모신다는데. 아무튼 그래서 사위들끼리 사이가 좋을 수가 없는 거야. 엄대진이 보기에 김인택은 그냥 재산 노리고 들어온 근본 없는 놈이고, 김인택이 보기에 엄대진은 장인을 등에 업고 나대는 놈이라 그거지.”
“변순철 마음은 어쨌든 엄대진한테 가 있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이게 재밌어. 변순철이 더 예뻐하는 건 첫째 딸이다, 이게 공공연하다고. 변순철이 결혼시키기 전에 김인택 죽이려고 했을 정도로 싫어했대. 아버지 입장에서 이해는 가잖아. 금지옥엽 키운 딸인데 얼굴 반반한 거 하나 빼고는 아무것도 볼 거 없는 놈한테 시집을 보내 달라니까. 당연히 사위는 둘째가 좋은 거지. 그런데 사위가 아무리 예뻐 봐야 딸만 하겠어?”
“엄대진도 그걸 아나?”
“당연히 알지.”
정언은 펜을 돌리며 재희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있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대선 코앞에 두고 변 회장이 드러누운 게 엄대진한테 호재려나?”
“예전부터 변 회장하고 엄대진 사이에 좀 트러블 있었다는 소문 돌더라고. 애가 사춘기 오면 방문 닫고 들어가잖아. 먹이고 입혀서 키워 놨더니 지 맘대로 하려고 하면 부모가 열이 받아, 안 받아?”
재희가 빙글거렸다. 정언은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재희를 마주 보았다.
“그래서 사이가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