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83
183화.
“확실한 얘기는 아냐. 일단 대선 대비하면서 엄대진이 반 엄대진계까지 안고 가야 되니까, 엄대진이 에 논조 조절해 달라고 했다가 변 회장한테 거절당했다는 얘기가 있대.”
가 같은 한선당이라도 반 엄대진계 의원들에 대해서는 논조가 상당히 박한 건 유명했다. 변순철 회장이 정적이 될 만한 인사들을 미리 밟아 놓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러나 경선을 앞둔 엄대진에게는 당내 화합도 중요한 문제였다. 아무리 엄대진계가 당내 주류라고 해도 여소야대 형국이라 한 사람이 아쉬운 건 사실이었다. 그러니 논조 조절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했다면 서로 마음이 상했을 수도 있었다.
“옆집 애랑은 놀지 마라, 뭐 이런 거예요?”
“비슷하지. 어쨌든 지금 키맨은 김인택이야. 엄대진이 청와대 입성하면 자기 목숨 진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머리 굴리느라 정신없을 거거든. 일단 미디어그룹 지분 많이 가진 건 언니 쪽이고, 동생 쪽은 외식사업부나 이런 가외 투자하는 쪽 지분 많이 가지고 있고. 엄대진이 김인택만 제거하면 아픈 사람 뒤통수 치고 지분 빼돌리는 건 일도 아닌데, 김인택 쪽도 그거 잘 알 거라고.”
“흥미진진하게 돌아가네.”
정언이 재미있다는 표정을 하자 민혜가 으으, 하며 탁자 위에 엎드렸다.
“거긴 엄청 재밌는데 우린 왜 하나도 안 재밌지?”
정언은 그 말에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왜, 지금 되게 재밌지 않아요? 누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 뭐 그런 느낌이잖아. 지금 딱 변순철이 쓰러져서 병원 실려 간 것도 그렇고. 가 엄대진 백업하는 게 엄청 크잖아요.”
“ 후광 없이 엄대진이 자력으로 얼마나 생존할 수 있을까요?”
그때까지 청취자 모드를 유지하고 있던 윤의 질문에 재희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아무도 모르지. 정계 데뷔 때부터 백업 받아 올라왔으니까. 만약에 김인택이 엄대진 날리려고 마음먹고 논조 돌린다면 엄대진도 쉽지 않다고 봐. 한선당 지지자들한테 논조 절대적이야. 자사 종편 채널 뉴스도 그렇고. 본인도 없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생각해 본 적 없을걸.”
“김인택하고 엄대진이 협상할 수 있는 여지도 있지 않습니까?”
“가능성은 다 열려 있지. 경우의 수는 많아.”
그때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정언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무심코 액정을 내려다본 정언은 멈칫하며 다시 한 번 이름을 확인했다. 최효명 여사.
엄마였다. 민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모양으로 엄마? 하고 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 정언은 핸드폰을 들고 서둘러 사무실 밖으로 나오며 전화를 받았다.
“응, 엄마. 나야.”
문자 한 통 없이 전화부터 하는 건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정언은 손목에 찬 시계를 보았다. 오후 다섯 시를 조금 넘긴 채였다. 마지막 빵이 나갈 시간이라 한창 바쁠 때인데, 이럴 때 효명에게 전화가 오는 일은 더 드물었다. 효명의 목소리가 핸드폰 너머에서 건너왔다.
『정언아, 너 오늘 집에 오면 안 돼? 잠깐이라도.』
비상구 문을 닫으며 벽에 기대선 정언은 그 말에 멈칫했다. 이런 시간에 전화를 해서 갑자기 집에 오라는 말을 하는 건 처음이었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서늘하게 스며들었다. 혹시 효명에게도 무슨 일이 생겼나 하는 생각이 갑자기 뇌리를 스쳤다.
정언은 핸드폰을 고쳐 쥐며 다급하게 물었다.
“왜, 혹시 무슨 일 있어? 뭐 이상한 일 있었어?”
그 말에 효명이 어이없다는 투로 되물었다.
『얜 진짜, 엄마가 무슨 일 있어야 딸보고 집에 한 번 오라 소리 할 수 있어?』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다행히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 모양이었다. 정언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며 애써 태연한 척 말을 돌렸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엄마 바쁜데 갑자기 그러니까 이상해서 그러지. 왜, 어디 안 좋아? 저번에 검진 받는다고 했잖아. 혹시 결과 안 좋게 나왔어?”
『그건 괜찮아. 의사가 한 삼십 년은 더 하셔도 되겠다고 그러더라. 어우, 지겨워 정말. 빵만 삼십 년 만들었는데 또 삼십 년을 어떻게 하니. 그나저나 정언아, 오늘 정말 시간 안 돼?』
“나 요새 진짜 너무 바빠. 다음 달쯤이면 좀 한가할 거 같은데 그때…….”
코앞인 집에 오가는 시간조차 아까운 판이었다. 다시 한 번 시계를 확인한 정언이 대답하자 효명이 채 끝까지 듣기도 전에 정언의 말을 잘랐다.
『자다가 꿈을 꿨는데 꿈자리가 너무 안 좋아서 그래.』
정언은 미간을 좁혔다. 정언이 아는 효명은 일생에 남들 다 보는 사주 한 번 본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현국과 결혼할 때도 내가 이 남자랑 결혼해서 망하면 내가 사람 잘못 본 죄라며 궁합도 보지 않고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외가 식구들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터였다. 더군다나 꿈자리라니, 그런 얘기는 정말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엄마도 늙긴 늙었나 보네. 안 하던 꿈자리 얘기를 다 하고.”
농담처럼 던진 말에 돌아온 대답은 뜻밖에도 진지했다.
『내가 생전 그런 적이 없는데 아까 너무 피곤한 거야. 삼촌한테 잠깐 가게 맡기고 올라가서 한숨 자는데 너희 아빠가 꿈에 나오잖아. 아빠가 나를 막 흔들어 깨우면서 여보, 정언이, 정언이, 이러는데 내가 너무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니까.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너무 생생한 거 있지? 너 무슨 일 생겼나 싶어서 가슴이 막 뛰더라니까.』
심장이 불안하게 움직였다. 현국이 세상을 떠난 후에 효명은 단 한 번도 너희 아빠가 꿈에 나왔다거나, 생각이 난다거나 하는 말 따위를 하지 않았다. 그런 엄마가 잠에서 깨자마자 불안해서 자신에게 전화를 걸었을 정도라면 정말 느낌이 좋지 않아서였을 게 분명했다.
아버지를 떠올리자 정언의 머릿속으로 영직의 얼굴이 지나갔다. 재희에게 를 유지시켜 줄 테니 타협하라고 했다는 최영직 CP와, 아버지의 곁에서 환하게 웃으며 나란히 서서 올해의 언론인상을 받던 최영직 기자는 얼마나 다른 사람일까 문득 궁금해졌다.
정언은 애써 머릿속에서 그 생각을 지워 버리며 말을 돌렸다.
“요새 우리 여사님 기가 허해서 그런 거 아냐? 한약이라도 좀 지어 먹어. 돈 부칠게.”
그 말에 효명이 펄쩍 뛰었다.
『얘 말하는 거 봐. 내가 돈 없어서 약 못 지어 먹을까 봐 그래?』
“누가 그렇대? 불효녀한테 효도할 기회 좀 달라고요.”
정언은 서둘러 화를 내는 효명을 달랬으나, 효명은 그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엄마가 지금 방송국 앞으로 갈 테니까 얼굴이라도 좀 보자. 뭐 제대로 먹지도 않는 게, 안 그래도 비쩍 말라서…… 너도 정기검진 제때 받아야 돼. 맨날 밤새고 그러다 큰일 나. 금방 갈게. 도착하면 전화할 테니까 내려와.』
“이제 퇴근 시간이라 길 얼마나 막히는데 여길 와, 됐어! 내가 주말에…….”
정언이 황급히 효명을 말리려 했으나 이미 전화가 끊어진 뒤였다. 정언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투덜거렸다.
“사람 말을 끝까지 안 들어, 왜.”
효명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정언이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오지 말라고 아무리 애원해도 들은 척도 안 할 게 뻔했다. 미치겠네, 하고 머리를 흩은 정언은 다시 한 번 꺼진 액정을 보았다. 속이 복잡해졌다.
숨 쉴 시간도 아껴야 할 판이라 짜증이 나는 한편으로, 오죽하면 다른 사람도 아닌 엄마가 이럴까 하는 생각이 지난 탓이었다. 몸이 아무리 아파도 가게 문 열고 닫는 시간은 칼같이 지키는 효명이었다.
아무리 외삼촌이 있다지만 그런다고 해도 가게를 비우고 당장 달려오겠다는 건 정말 놀라서임이 분명했다. 생전 그런 적이 없더니, 그렇게 강해 보이던 엄마도 나이가 들어 마음이 약해진 건가 싶어 가슴 한구석이 싸하게 가라앉았다.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핸드폰만 내려다보고 있던 정언은 가벼운 한숨을 뱉으며 회의실로 돌아갔다. 탁자에 걸터앉자 재희가 턱 끝으로 손에 쥔 핸드폰을 가리키며 물었다.
“누구야, 어머니?”
“생전 안 그러더니 갑자기 꿈자리가 사납다고 전화를 다 하고 그러잖아요.”
정언이 민망한 얼굴로 툭 뱉자, 민혜가 그 말에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다.
“왜 갑자기? 어른들 꿈 잘 맞는데…… 무슨 꿈이길래 그러신대?”
“아니에요. 진짜 그런 분 아니었는데 나이 드니까 마음 약해져서 그런가 봐.”
곧이곧대로 말하는 게 어쩐지 민망해 대충 둘러댄 정언은 멋쩍게 눈썹 위를 긁적였다. 윤이 물끄러미 이쪽을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사소한 일에도 신경을 쓰는 윤의 성격을 알기에, 뒤늦게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윤이 없는 데서 말할 걸 그랬다는 후회가 지났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재희가 혀를 차며 말했다.
“걱정 안 하시게 연락 자주 드리고 그래.”
“선배는 잘 하고요?”
“내가 안 하니까 남들보고 좀 하라고 그러는 거지.”
정언이 되묻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대꾸하는 재희를 본 민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중에 우리 애 커서 강재희처럼 될까 봐 무섭다니까.”
“내가 어디가 어때서?”
짐짓 정색하는 재희의 얼굴에 민혜가 손가락질을 하며 기가 막힌다는 투로 펄쩍 뛰었다.
“어머, 어디가 어떤지 몰라서 묻는 거 봐.”
“인물 괜찮지, 일 잘하지, 돈 잘 벌지, 내가 왜?”
“그럼 뭐해. 텔레비전 보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는 게 남의 자식인지 내 자식인지 알 게 뭐야?”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 몰라? 품 안의 자식이란 말도 있잖아.”
“웃기고 있네. 강 피디 보면 무자식이 상팔자란 말이 딱이다. 본인을 그렇게 모르나?”
민혜가 콧방귀를 뀌며 내뱉었다. 차마 대꾸할 말이 없는지 재희가 입을 다물었다. 그 만담을 지켜보던 정언은 피식 웃으며 그만들 해요, 하고 건성으로 두 사람을 말렸다.
이번엔 내가 이겼다는 표정으로 의기양양해하던 민혜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손가락을 딱 소리가 나게 튕겼다.
“맞아. 아까 정언이 그러던데, 민 의원님 예전에 서온건설 소송 진행할 때 강 피디랑 똑같이 사찰당한 적 있다고. 감시하고 문자 보내고 그러는 거 있잖아. 황형두 의원님이 알아봐 주기로 했다며. 아직 별말 없었어?”
“안 그래도 내일 저녁에 전 부장님이랑 잠깐 만나자고 하던데, 뭐 있으면 그때 얘기하겠지. 그거야 원래 옛날 안기부 시절부터 잘 쓰는 수법이라니까. 송 작가한테 하는 것처럼 집에 전화하고 그러는 것도…….”
재희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받아넘기려 했으나, 민혜가 중간에 그 말을 끊었다.
“그런데 민 의원님이 그때 감시하던 사람 잡아서 넘겼는데 한국보수연합 회원이었대.”
“그래?”
그 말에 재희의 얼굴이 달라지며 정언에게 시선을 돌렸다.
“회원인 건 어떻게 알았대?”
“경찰에서 조사하면서 그랬다는데요. 자기는 그냥 아르바이트인 줄 알았다고. 실제로 서온건설 측에서 일당 지급한 거 확인했대요. 그래서 그게 공판 결과에도 영향이 좀 있었다고 하더라고.”
“황 의원님한테 한 번 물어봐야겠네. 알겠어.”
고개를 끄덕인 정언은 잠시 핸드폰으로 뉴스를 확인했다.
‘ 변순철 회장 자택에서 쓰러져 긴급 이송(속보)’.
포털 사이트에 접속하자마자 메인 화면에 뜬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클릭해 보았으나 속보라 그런지 아직 아무 내용도 입력되지 않은 채였다. 다른 기사를 몇 개 찾아봤으나 아직 자세한 내용이 담긴 뉴스는 없었다.
정언이 재희에게 물었다.
“변 회장 병원 어디래요?”
“기자들 얘기로는 집에서 제일 가까운 서울평화병원으로 일단 이송했다던데. 거기서 상태 보고 원래 다니던 강남 본서울병원으로 옮길 거 같대.”
재희가 대답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정언의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정언은 서둘러 핸드폰을 확인했다. ‘최효명 여사’라는 이름이 선명했다.
아까 전화를 끊은 지 삼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무슨 일인가 싶어 전화를 받기 무섭게 건너편에서 효명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정언아, 엄마 거의 다 왔어. 빨리 내려와.』
역시나 간결하게 용건만 말하기 무섭게 전화가 끊어졌다. 정언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핸드폰을 내려다보다 미치겠네, 하며 중얼거렸다. 민혜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왜?”
“아니, 엄마가 지금 회사로 왔대요. 아까도 오지 말랬는데 듣지도 않고 끊더니 지금도 다 왔다고 빨리 내려오라고, 사람이 한마디도 안 했는데 그냥 끊잖아.”
“어른들 다 그래. 자기 할 말만 하면 다라니까.”
쿡쿡 웃은 민혜가 얼른 가 보라며 손을 내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