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84
184화.
정언은 어쩔 수 없이 서둘러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벌써 도착한 걸 보니 아마 통화 직후에 날아온 게 분명했다. 효명에게 전화를 걸며 두리번거리자, 입구 근처에 차를 세워 둔 효명이 멀리서 손을 흔들었다.
뛰어가던 정언은 몇 걸음을 남겨 두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효명이 차 트렁크를 열고 뭔가를 잔뜩 꺼내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자 가게에서 파는 선물세트 상자였다. 대체 얼마나 가져온 건지, 소형차의 트렁크를 가득 채운 상자들이 바닥에 차곡차곡 쌓였다.
“얘, 너 얼굴이 왜 그렇게 상했어? 점심은 먹었어? 뭐 먹고 하는 거야?”
효명이 정언을 보자마자 묻자 정언은 대답 대신 대번에 미간을 구겼다.
“미쳤어, 진짜. 가게에서 팔 것도 없는데!”
“팔 게 왜 없어? 너희 팀 사람들이 몇인데 그럼 이만큼도 안 가져와? 안 모자랄지 모르겠다. 가서 나눠 먹어.”
“나눠 먹는 게 문제가 아니고…….”
정언이 돌겠다는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으나 역시 효명은 그다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정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효명이 정언의 뺨을 만져 보며 혀를 찼다.
“얼굴은 또 왜 이래, 젊은 게. 햇빛을 못 봐서 그런가? 너 요새도 새벽에 막 뛰어?”
“요샌 너무 바빠서 못 해. 아니, 엄마. 그게 문제가 아니고…….”
“낮에 뛰어야 햇빛을 받지. 애가 무슨 드라큘라도 아니고 관짝 누웠다 일어난 애처럼 허예가지고, 이게 뭐야. 어디 아픈 데는 없고?”
무슨 말을 못 하게 하는 통에 결국 효명을 나무라기를 포기한 정언은 고개를 저었다.
“낮에 숨 쉴 시간도 없어. 엄마 걱정이나 해. 나 최효명 여사 닮아 통뼈인 거 몰라요? 이거 다 들고 가지도 못하겠어. 어떻게 들고 온 거야, 도대체?”
“내가 들고 왔니? 차가 싣고 왔지. 얼굴 봤으니까 됐고, 잔말 말고 빨리 가지고 가. 나도 얼굴만 보러 온 거야.”
효명이 정언의 등을 떠밀었다. 정언은 아이 씨, 하며 효명의 팔을 잡았다.
“저녁이라도 먹고 가. 여기까지 와 놓고…….”
“가게 비워 놨는데 어떻게 저녁을 먹고 가. 원래 바로 가려고 그랬어.”
“삼촌 있는데 뭐. 맨날 가게 일 한다고 때 놓치잖아.”
“내가 너보다 바쁜 거 몰라? 됐어, 이것아. 너나 끼니 거르지 말고 먹어. 젊은 애가 툭 치면 부러지게 생겨 가지고, 이게 뭐니?”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지만 부모 이기는 자식도 쉽지 않았다. 한 번 말을 하면 죽어도 해야 되는 성격이 누구로부터 온 건지 정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머리를 흩은 정언은 다시 한 번 바닥에 쌓인 상자들을 보며 한숨을 뱉었다. 어림잡아도 서른 개는 되어 보였다.
“뭘 이렇게 많이 가져왔어.”
“그냥 과자 쪼가리야, 얘. 아무나 좀 내려오라고 해서 같이 들고 가.”
효명의 재촉에 마지못해 핸드폰을 꺼내든 정언은 잠시 망설였다. 윤을 부르면 간단한 일이겠지만 그건 왠지 민망한 탓이었다. 고민하던 정언은 결국 지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몇 번 가자 건너편에서 지혁이 네 선배, 하고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우 피디, 잠깐 주차장으로 좀 내려올래? 뭐 들고 가야 될 게 있는데 혼자 들긴 너무 많아서.”
『아, 네. 저기, 어…… 아, 아니에요.』
갑자기 말을 멈춘 지혁이 잠시 수화구를 막은 듯 뭐라고 웅얼거리더니 곧 알겠습니다, 하고 전화를 끊었다. 정언은 팔짱을 끼며 주차장 바닥을 스니커즈 끝으로 툭툭 찼다.
채 오 분도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이쪽으로 오는 소리가 들렸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정언은 움찔하며 미간을 좁혔다. 정언과 효명 앞으로 뛰어온 건 다름 아닌 윤이었다.
“어, 저기, 나 우 피디보고 내려오라고 했는데 왜 김 피디가 왔어?”
정언이 저도 모르게 당황한 기색으로 더듬거리자 멈춰 선 윤이 정언을 내려다보았다.
“지혁이가 민 선배하고 뭐 할 거 있다고 저보고 대신 가 주면 안 되냐고 하던데요.”
우지혁 이 망할 자식, 정언은 그 즉시 속으로 생각했으나 차마 겉으로 그런 티를 낼 수는 없었다. 남의 속을 알 리 없는 윤이 곁에 서 있는 효명과 눈을 맞추더니 고개를 꾸벅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선배하고 같은 팀에서 일하는 김윤입니다.”
“어머, 네.”
윤의 깍듯한 인사에, 효명이 얼결에 대답하며 은근슬쩍 윤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것을 알아차린 정언은 당장 이 자리에서 뛰쳐나가고 싶은 것을 참아야 했다. 보나마나 대번에 윤이 마음에 든 게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윤이 신기한 얼굴로 몸을 숙여 바닥에 쌓인 포장 박스를 들여다보는 사이 효명이 정언을 쿡 찌르며 속삭였다.
“너희 팀에 저런 인물이 있었어?”
“엄마, 제발 좀.”
정언은 최대한 윤에게 들리지 않게 복화술로 말을 막았다. 아무래도 당장 효명을 보내지 않으면 호구조사를 시작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윤이 효명에게 시선을 돌렸다.
“혹시 봉투나 끈 가지고 계신 거 있으세요?”
“잠깐만요.”
금방 신이 난 효명이 트렁크를 뒤져 포장용 리본 한 롤과 커터 칼을 꺼냈다. 그것을 받아 든 윤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 자리에서 상자들을 차곡차곡 포개 리본으로 묶었다. 그러는 사이 기어이 효명이 참지 못하고 윤에게 물었다.
“저, 김 피디님. 혹시 결혼하셨나? 아니, 그냥 궁금해서요.”
눈을 크게 뜬 정언은 효명의 등을 찌르며 입모양으로 미쳤어? 하고 효명을 윽박질렀다. 그러나 효명은 그러거나 말거나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윤의 눈치로 그 질문이 무슨 의도인지 모를 리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나 씩 웃는 얼굴인 게 눈에 빤히 들어왔다. 목덜미부터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윤은 리본을 매듭지으며 대답했다.
“결혼은 아직인데요. 애인도 없습니다.”
그 말을 듣기 무섭게 효명이 정언에게 눈을 돌렸다. 뭐라고 효명의 입에서 한마디라도 더 튀어나오는 게 무서워, 정언은 황급히 운전석 문을 열고 효명을 밀어 넣었다.
“엄마, 전화할게. 얼른 가.”
“아니, 정언아…….”
“차 막힌다고!”
새빨개진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지른 정언은 운전석 문을 쾅 닫았다. 효명이 창 너머에서 얘가 별일이라며 뭐라고 말하는 듯했으나 들리지 않았다. 그새 곱게 묶어 둔 박스를 양손에 든 윤이 창 너머로 효명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효명이 활짝 웃으며 윤에게 손을 흔들었다. 못 산다 진짜, 하고 중얼거린 정언은 이마를 짚으며 빨리 가라는 손짓을 했다. 효명이 입모양으로 갈게, 하며 정언에게 말하고는 재빨리 주차장에서 차를 빼 휑하니 사라졌다.
십 분도 채 되지 않는 사이 기력이 모두 소진된 기분이었다. 탈진하기 직전의 상태로 긴 한숨을 내쉰 정언은 차마 윤을 보지 못한 채 한쪽 손을 내밀었다.
“하나 이리 줘.”
“제가 들고 갈게요.”
윤이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먼저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고 서 있던 정언은 이 자리에서 바로 사라지거나 시간을 돌리거나 윤의 기억을 지울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심각하게 고민해야만 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윤이 정언 쪽을 돌아보았다. 마지못해 곁에 선 정언은 층수 표시창에 시선을 고정했다. 잠시 말이 없던 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머님이 미인이시네요.”
정언은 머리칼을 만지는 척 새빨개진 얼굴을 가리려 노력하며 대답했다.
“젊을 적에 예쁜 아르바이트 직원 있다고 유명해서 빵 많이 팔았다는 소리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어.”
“그러셨을 거 같은데요.”
윤은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에 정언보고 먼저 타라는 손짓을 했다. 정언과 나란히 선 윤이 닫힘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선배는 누구 닮았을까 궁금했는데 어머님 쪽인가 봐요.”
“매너가 과하면 플러팅이라고 말하지 않았나?”
정언이 내뱉은 말에 윤이 고개를 숙이며 쿡쿡거렸다. 오늘따라 아무도 안 타는 데다 구형이라 느릿느릿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이 미치도록 어색했다. 자신이 매번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냉랭한 척을 한다는 걸 이제 윤이 너무 잘 안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숫자가 하나씩 바뀌는 층수 표시창을 초조하게 쳐다보는 정언에게 윤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무슨 꿈이길래 그러셨대요?”
잠시 잊고 있었던 효명의 말이 되살아난 건 순간이었다. 정언아, 하고 부르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문득 환각처럼 스쳤다. 정언은 애써 그 생각을 떨어 버리며 시선을 내렸다.
“별거 아냐.”
불현듯 등 뒤로 드리워지는 그림자처럼 서늘한 감각이 스몄다. 낯선 불길함이었다. 아무것도 아닐 거라고, 아마 예민해진 탓일 거라고 생각하며 정언은 발끝에 눈을 두었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머리 위로 윤의 목소리가 떨어진 건 그다음이었다.
“선배한테 거짓말한 거 죄송해요.”
“뭐가.”
“지혁이가 대신 가 달라고 한 적 없어요. 선배한테 전화 온 거 보고 제가 간다고 한 거예요. 다음부터는 그냥 저 부르세요.”
그 말에 정언은 저도 모르게 윤을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윤이 웃었다.
“저 제가 이렇게 인내심 없는 줄 살면서 처음 알았어요.”
뭐라고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눈을 깜빡이자, 윤이 때마침 열린 엘리베이터에서 먼저 내리며 사무실로 향했다. 곧 사무실 안에서 어 이게 뭐야, 하며 좋아하는 팀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 앞에 선 정언은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잠시 벽에 기댄 채 손으로 눈가를 덮었다. 손바닥 아래 덮인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무래도 쉽게 가라앉을 것 같지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