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87
187화.
맞은편에 앉아 있던 호형이 재빨리 인터넷을 검색하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도 서울평화병원이라는데? 상태 나아지면 강남 본서울병원 옮긴다더니 이송도 안 될 정도로 안 좋은가?”
“그러다 갑자기 어떻게 되면 진짜 난리 나는 거 아냐?”
예준이 몸을 내밀어 호형의 모니터를 보며 말했다. 찬수가 손을 깍지 끼어 뒷머리에 대며 몸을 뒤로 젖히고는 심각한 표정을 했다.
“이거 뭐 남보고 죽으라고 할 순 없는데 콩가루 되는 건 보고 싶으면 내가 나쁜 놈이냐?”
그 말에 예준이 킬킬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가 뭐 언제부터 그렇게 좋은 놈이었다고 그래요. 그런 생각 좀 할 수 있지. 어디 가서 그런 소리 입 밖에만 안 내면 되잖아.”
“벌써 입 밖에 냈는데?”
“선배 원래 나쁜 놈인 거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요, 여기서.”
“죽을래?”
찬수가 예준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예준이 아 뭐요, 하며 찬수와 아옹다옹하는 꼴을 내려다보던 정언이 혀를 차며 도로 자리에 앉았다.
의자를 당겨 앉으려던 정언은 잠깐 움직임을 멈추더니 윤의 의자 바퀴를 발끝으로 툭 찼다. 깜짝 놀란 윤이 정언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정언이 윤에게만 들릴 정도로 나지막하게 물었다.
“아침에 왜 늦었어?”
“네?”
“선배랑 무슨 얘기한 건데. 뭐길래 둘이 비밀이야?”
신경 안 쓰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당황한 윤은 잠시 머뭇거렸다.
“저…….”
답지 않게 주저하는 윤의 얼굴에 정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정언이 손가락을 까딱여 따라 나오라는 손짓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은 어쩔 수 없이 정언의 뒤를 따라갔다. 비상구 계단으로 들어서 문을 닫은 정언이 팔짱을 끼며 윤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알아서 말할 때까지는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정언이 이 일을 알면 걱정할 걸 뻔히 아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얘기해야 될지 막막했다. 한참 망설이던 윤을 구해 준 건 손안에서 진동하기 시작한 핸드폰이었다. 윤은 서둘러 액정을 확인했다. ‘서울대 김정환 교수님’이라는 이름이 선명했다.
“아, 저기, 김정환 교수님한테 전화 왔는데요. 전화 좀 받을게요.”
정언의 대답을 듣기도 전, 윤은 서둘러 통화를 연결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김윤입니다.”
건너편에서 마른기침을 두어 번 뱉은 정환은 인사도 없이 바로 용건부터 말해 왔다.
『김 피디님, 조석문 원장 말이에요. 내가 경문대 응급실 있던 사람들 통해서 이훈주 과장 건 알아봤는데 상황이 좀 이상하네요. 이게 산에서 추락해서 전신 골절로 이송될 정도면 아주 긴급 환자인데, 조석문이 당시에 환자를 20분 이상 방치했었다고 그래요.』
“20분이요?”
윤이 되묻자 정환이 다시 한 번 기침을 하고는 대답했다.
『출혈이 많아서 바로 수술 준비했어야 하는데 계속 딜레이를 걸었답니다. 그리고 저기, 혹시 지금 강재희 피디 있으면 예전에 한선당 국회의원 자식들 병역 비리 건 다시 한 번 봐 달라고 해요. 그거 꽤 오래된 방송인데, 그때 의원 아들들한테 위조 진단서 끊어 준 의사 중에 하나가 조석문일 겁니다. 강 피디가 보면 기억할 거예요. 내가 어제 경문대에서 일하던 사람들 만났는데 이 얘기가 나와서, 잊어버리기 전에 말하려고 전화했습니다. 조석문이 그 병역 비리 방송 나가고 바로 캐나다로 이민 간 거라고 그러네요.』
눈에서 멀어지면 사람들은 관심을 끊기 마련이었다. 이런 게 엄대진의 방식 중 하나일까. 이훈주 과장의 추락사, 한선당 의원 아들들 병역비리에 관련된 조석문. 윤대석에게 고의로 잘못된 처방을 내린 김회영.
이 두 사람이 모두 서둘러 이민을 간 데 어떤 힘이 작용했으리라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아, 네! 감사합니다. 혹시 그 증언해 주신 분들 연락처 알 수 있을까요?”
『메일로 보내겠습니다. 수고하세요.』
간결한 성격답게 마지막 말도 깔끔했다. 끊어진 전화를 확인한 윤은 시선을 들어 정언을 보았다.
“선배, 캐나다 제이스 클리닉 조석문 원장이…….”
“내가 먼저 질문했어. 대답 안 해?”
정언이 즉시 말을 끊었다. 그렇지 않아도 서늘한 얼굴에 한겨울 찬바람이 불듯 냉랭하게 날이 섰다. 적당히 빠져나가기는 이미 틀린 일이었다. 윤은 입술을 물었다 놓고는 겨우 대답했다.
“일이 좀 있었어요.”
“나도 김 피디 지각한 거 알아. 아무 일 없는데 그랬냐고 물어본 것 같아?”
이렇게 말을 빙빙 돌리는 게 도움이 될 리 만무했다. 생각해 보면 별의별 인간을 다 상대해 본 정언이었다. 자신에게 듣고 싶은 대답을 뜯어내는 일은 껌 씹는 것보다 쉬울 터였다. 정언이 선뜻 입을 못 여는 윤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재미있다는 표정을 했다.
“누가 이기나 해보자 그거야? 말할 때까지 하루 종일 있어 봐, 그럼. 나 뻗치기 전문이니까.”
농담이 아니라 정말 여기서 말할 때까지 절대 못 풀려날 것 같았다. 결국 한숨을 내쉰 윤은 어렵게 운을 뗐다.
“아침에…….”
“아침에 뭐?”
“주차장 내려갔는데 차에 시동이 안 걸렸어요. 배터리가 방전된 것 같아서 보험사 불렀는데, 직원분이 보더니 브레이크 호스가 절단됐다고 하더라고요. 경찰에 신고하고 차는 그쪽에서 정비소 맡겨 준다고 해서 그거 처리하느라 늦은 거예요.”
최대한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말하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다시 한 번 그 일을 복기하자 뒷머리에서부터 서늘하게 소름이 돋았다. 입 안이 바짝 말랐다. 그 말이 온전히 이해되지 않은 듯 잠시 눈썹을 찌푸리고 있던 정언이 몇 초 정도의 사이를 두고 되물었다.
“뭐?”
“그게 다예요. 무슨 사고 있었거나 한 건 아니었고, 직원분 덕분에 운전하기 전에 알아서…….”
“미쳤어?”
정언의 목소리가 바로 올라갔다. 윤이 멈칫하자 정언이 정색하며 다그쳤다.
“미쳤냐고 묻잖아! 내가 안 물어봤으면 그거 말 안 하려고 그랬어?”
“얘기하려고 했어요.”
윤은 변명하듯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정언은 호락호락하게 넘어갈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언제?”
그 물음에 말문이 막혔다. 정언이 따라 나오라고 하지 않았으면 계속 망설이다가 시간만 보내고 있었을 거라는 사실을 스스로도 잘 아는 탓이었다. 윤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정언이 감정을 누르려는 것처럼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윤을 빤히 보았다.
“왜 나한테 바로 연락 안 하고 선배한테 연락했어?”
그건 물론 정언에게 쓸데없는 일로 걱정거리를 만들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그런 배려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런 걸 보고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 막는다고 하는 걸까, 하고 윤은 속으로 생각했다. 재희가 난 서 피디 감당 못 한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것이 괜한 소리가 아니었음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생각이 거기까지밖에 안 가?”
“선배.”
정언의 말투에 날이 섰다. 움찔한 윤은 일단 정언을 진정시키려 했으나 크게 소용 있는 시도는 아니었다.
“나한테 말한다고 당장 범인 잡아 줄 수 있는 거 아니라서 말 안 했어?”
“그런 게 아니라…….”
“김 피디 지금 나 완전 바보 만든 거야. 알아?”
정언이 자신에게 이 정도까지 화를 내는 건 처음인 것 같았다. 의도가 나쁜 건 아니었으나,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한다면 자신 역시 정언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을 걸 알기에 할 말이 없었다.
주춤하던 윤은 짧은 한숨을 섞어 말했다.
“선배가 걱정할까 봐 그런 거예요.”
“지금 내가 그거 몰라서 이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언의 목소리가 다시 높아졌다. 정언에게서 보기 드문 격렬한 감정의 결이 고스란히 느껴져, 윤은 순간 멈칫했다.
정언 역시 마찬가지로 자신이 지나쳤다는 걸 자각한 듯 갑자기 굳어졌다. 물론 화가 날 만한 일이기는 했으나, 정언의 기준에서 지금의 행동은 필요 이상의 수준인 게 분명했다. 정언이 손을 올려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 때문에 정언의 눈이 보이지 않았다. 창백한 손가락이 만드는 그늘 사이로 긴 속눈썹이 내려앉았다. 윤은 정언의 손이 떨리고 있다는 걸 곧 알아차렸다. 정언이 바닥에 시선을 둔 채 나지막하게 내뱉었다.
“김 피디한테 무슨 일 있는 거 남한테 듣게 만들지 마. 그거 부사수의 의무야.”
부사수의 의무. 윤은 입 안으로 그 말을 되풀이해 보았다. 사무적인 단어들이었으나 그 조합의 외피 아래에는 어떤 감정들이 숨겨진 채였다.
단순한 걱정일까, 분노일까, 혹은…… 그 이상을 넘겨짚으려는 희망을 누르며, 윤은 정언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한동안 말없이 서 있던 정언은 조금 진정이 됐는지 손을 내리며 여느 때와 같은 말투로 물었다.
“정비소 들어갔으면 며칠 걸릴 텐데, 출퇴근 어떻게 할 거야?”
“보험사에서 대차 받으려고요.”
윤의 대답에 정언은 가벼운 한숨을 뱉었다.
“일단 알았어.”
뭐라고 더 말할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던 정언이 몸을 돌렸다.
“이따 다시 얘기해.”
뭘 다시 얘기하자는 건지 알 수 없었으나, 그걸 묻기도 전에 정언이 윤을 지나쳐 비상구를 나갔다. 윤은 정언의 등 뒤로 닫히는 문을 바라보고 서 있다가 머리를 흩었다. 벽에 기대서자 얇은 셔츠 너머로 서늘한 냉기가 순식간에 번졌다.
만약 배터리가 나가지 않았다면, 보험사 직원이 브레이크를 밟아 보지 않았다면, 이상하다는 걸 아무도 몰랐다면 자신은 지금 여기 없을 수도 있었다. 그 사소한 몇 개의 행운이 겹친 덕에 운 좋게도 목숨을 구했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았다.
윤은 두 손을 펼쳐 손바닥 위를 내려다보았다. 비상구의 주광색 조명이 그 위로 쏟아졌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본다면, 하고 가정했으나 정언에게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누가 심장을 움켜쥐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윤은 가슴 위를 세게 누르며 긴 숨을 내쉬었다. 종교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정말 신이 존재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싶었다.
모두가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바라는 건 그것 하나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