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88
188화.
“야, 너 데스킹 이따위로 할 거야? 홍 기자가 기사 언제 이렇게 올렸어?”
사무실 앞에 선 재희는 잠시 멈칫했다. 문 너머로도 선명하게 날아드는 고함소리가 익숙했다. 한동의 목소리였다. 사무실 안에서 누군가가 바쁘게 나오는 바람에 옆으로 몸을 비키자, 나오던 사람이 재희를 흘끔 보고는 문을 반쯤 열어 둔 채 곁을 지나쳤다.
사무실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선 재희의 눈에 들어온 건 잔뜩 흥분한 한동이 김양운 앵커의 자리 곁에서 원고를 말아 쥔 채 삿대질을 하는 모습이었다. 책상에 앉아 있던 양운이 피곤하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문지르더니 인상을 구겼다.
“저희 뉴스예요, 뉴스. 그럼 특정 후보한테 편파적으로 보도하라는 소립니까?”
“너 눈깔 있으면 똑바로 봐, 인마! 엄대진이 경선 후보 단일화하자고 압력 넣는 건 당 통합 행보고, 민주영이 경선 준비하면서 자기 쪽 의원들하고 회동하는 건 당내 계파 갈등 유발이고? 이게 편파적인 게 아니야? 오전 회의에서 홍 기자가 기사 이렇게 올렸냐고!”
두 사람의 주변에는 기자들이 몰려선 채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그들 중 누구도 재희가 사무실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한동이 따지는 말에 양운이 귀찮다는 듯 되물었다.
“중립적인 스탠스 유지하게 단어 몇 개 바꾼 거예요. 그게 뭐 큰일입니까?”
“중립? 이 새끼 진짜 이거 여태 가만히 있었더니 아주 웃기는 새끼네. 너 편파가 뭔지 모르고 중립이 뭔지 몰라? 중립 타령하고 싶으면 최소한 같은 기준으로 다뤄야 할 거 아냐! 저울 영점도 못 맞추는 새끼가 딱 봐도 기울어진 저울 가지고 근수 타령하는 걸 누구보고 믿으라고? 사기를 치고 싶으면 티 안 나게 쳐, 이딴 식으로 저급하게 굴지 말고!”
굳이 누구에게 묻지 않아도 무슨 상황인지는 뻔했다. 최근 뉴스 논조가 민주영 의원과 민권당에 상당히 부정적인 방향으로 잡혀 있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차라리 거기서 그친다면 모르겠지만, 그러면서 동시에 엄대진과 한선당에 유리한 스탠스를 취하고 있다는 게 진짜 문제였다.
중립. 간편한 단어였다. 재희는 이런 상황을 중립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걸 스스로도 잘 아는 이들이 그 말을 변명으로 사용하는 것을 납득하지 못했다.
설령 그들의 말대로 지금의 상황이 저울을 맞추려는 기계적인 중립이라 하더라도, 언론은 인간의 언어였다. 인간이 인간을 판단하는 데 완벽히 중립적이라는 건 전제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중립이라는 단어는 재희에게 결코 답이 되지 못했다. 더구나 그 표면적인 중립조차 지켜지지 않는 상황이라면 그건 더 용납할 수 없었다.
재희가 가장 싫어하는 건 이런 식으로 룰을 어기는 플레이였다. 페어플레이를 할 수 없는 놈들은 링에 올라와서는 안 된다는 게 재희의 생각이었다.
물론 남의 팀이니 이쪽에서 이래라저래라 할 사안은 아니었다. 다만 한동이 일전에 내부에도 믿을 수 없는 놈들이 너무 많다고 한탄하던 일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 사무실 안의 수많은 후배들 중, 과연 한동이 정말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짐작할 수 없었다. 문득 한동이 서온건설 TF팀을 만들 때가 떠올랐다. 이 많은 기자들 중 한동에게 선택된 사람이 원진솔과 이도하 기자 단둘뿐이었다는 사실을 되새기자, 순식간에 입 안으로 쓴맛이 번졌다.
재희는 문가에 선 채 그쪽을 지켜보았다. 화를 내는 한동에게 양운 역시 열이 받은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서 부장만 진짜 기자입니까? 저도 기자 출신입니다. 데스킹 권한 저한테 있어요! 지금 이거 월권인 거 모르세요?”
양운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한동이 모를 리 없었다. 아무리 경력으로 비교도 되지 않는 선배라 한들, 그 말대로 현재 메인 뉴스 앵커는 양운이었고 최종 데스킹 권한도 양운에게 있었다.
다만 한동이 그걸 알면서도 이렇게 따지고 들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다는 건 확실했다. 한동이 그 말에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렸다.
“진짜 기자? 말 잘했다. 야 인마, 지금 너 어디서 기자 출신을 운운해? 진짜 기자 해 봤다는 놈이 자존심도 없어? 너 지금 하는 짓 부역자야, 이 새끼야!”
“이 새끼 저 새끼 하지 마세요! 부장이 민주영 밀면서 콩고물 떨어지기만 기다리니까 워딩 하나 가지고 트집 잡는 거 아닙니까!”
“뭐?”
한동이 눈을 크게 뜨며 양운에게 한 걸음 다가서자 뒤에서 진솔과 도하가 황급히 한동을 뜯어말렸다.
“부장, 참으세요! 김 선배도 흥분해서 말이 잘못 나온…….”
그러나 한동은 양운의 말에 완전히 이성을 잃은 모양이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신을 붙잡은 도하의 손을 있는 힘껏 뿌리친 한동이 양운에게 삿대질을 하며 고함을 질렀다.
“이 개 같은 자식아, 뭐 하나라도 받아먹을 생각하고 이 지랄하는 거면 내가 손모가지를 잘라! 됐냐? 내 손모가지 걸고 말하는데, 민주영한테 과자 부스러기 하나 받아 처먹은 거 없어도 눈깔 있는 사람이면 이게 이상한 거 다 알아! 그럼 넌 엄대진한테 뭘 받아 처먹고 데스킹 이따위로 해? 국장님한테 가져가면 썰릴 거 아니까 윗선에 다이렉트로 갖다 바치면서 교묘하게 논조 장난질하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았냐? 며칠 전에도 국장님이 너 불러서 이러지 말라고 경고했다며? 너 위아래도 없는 놈이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양운이 한동에게 대들었다.
“부장 마음에 안 들면 논조 이상한 겁니까? 논조가 뭐 어쨌다고요?”
“넌 요새 뉴스가 정상이라고 생각하냐? 내가 아무 말 않고 있으니까 진짜 괜찮은 줄 알았어? 너 같은 새끼들 때문에 가 지금 무슨 소리 듣는지 알기나 해? 왜, 사장님, 국장님 다 잘릴 것 같으니까 썩은 줄 잡기 싫다 그거야?”
양운이 그 말에 하, 하고 코끝으로 웃는 소리를 내더니 넥타이를 풀어 내팽개쳤다. 다른 기자들이 선배, 하며 양운을 진정시키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까놓고 말해요? 사내에 안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까, 지금? 이사회에서 보도본부장이 뉴스 컨펌하라고 지시 내려온 지가 언젠데 아직도 국장님 타령을 하세요?”
“뭐?”
한동이 귀를 의심하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재희는 순간 공기가 얼어붙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 사내에 안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까, 지금?
방금 양운이 내뱉은 말이 메아리처럼 생생하게 귓가를 맴돌았다. 혈관을 도는 피가 모두 멈춰 버린 기분이었다. 이 공간 안의 모든 사람들이 갑자기 낯설어졌다.
재희에게는 이곳의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같은 지향점과 같은 상식을 가지고 행동한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 절대적인 믿음을 차갑고 날카롭게 부정하는 단어들이 그토록 쉽게 내뱉어진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누군가가 아주 얇은 칼날로 머릿속을 저미는 듯한 그 감각은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양운이 허리에 손을 짚으며 한동을 마주 보았다. 진송과 도하가 목덜미까지 시뻘게질 정도로 화가 난 한동 곁에서 쩔쩔매며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양운이 숨을 들이쉬더니 한동에게 답답하다는 투로 고함을 쳤다.
“정년까지 다니고 싶으면 부장도 정신 차리시라고요! 세상이 달라지는데 혼자 고고한 척하면 누가 엄청나게 알아줍니까? 그러니까 아직도 부장 신세 못 면하시는 거 아니에요!”
“야 이 개자식아, 너 지금 뭐라고 했어?”
한동이 양운의 멱살을 움켜잡자 곁에 서 있던 기자들이 대경실색하며 두 사람을 떼어 놓았다. 진솔이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한동을 잡아당기며 애원했다.
“부장, 부장! 그만하고 진정하세요!”
한동은 기자들에게 붙들린 채로도 양운을 향해 악을 썼다.
“이거 안 놔? 야, 김양운! 너 방금 한 말 다시 해 봐, 이 새끼야! 고고한 척? 정신을 차려?”
“왜요, 하라면 못 할 것 같습니까?”
“김 선배, 그만 좀 하세요!”
양운이 지지 않고 대꾸하는 말에 다른 기자들이 양운을 말렸다.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 서둘러 그쪽으로 달려간 재희는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는 한동의 어깨를 감싸며 한동을 달랬다.
“부장님, 나가서 얘기하시죠.”
씩씩대던 한동이 재희를 보자 멈칫했다. 아무래도 남의 팀 앞에서 이런 꼴을 보이는 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한동이 입을 다물자 양운이 삿대질을 하며 재희를 밀쳤다.
“강재희 넌 뭔데 남의 팀에서 기웃거려? 안 나가?”
성질 같아서는 당장 이 자리에서 뒤집어엎고 양운과 한판 할 수도 있었으나, 재희는 최대한 웃는 표정을 유지하며 정중하게 말했다.
“부장님하고 선약이 있어서 온 겁니다. 죄송합니다. 부장님, 저하고 같이 나가시죠.”
재희는 그 자리에서 얼른 한동을 끌고 밖으로 나왔다. 등 뒤로 따라붙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분명히 다 아는 동료들일 텐데도, 어쩐지 낯선 곳에 던져진 채 구경거리가 된 사람 같은 기분이었다.
주차장으로 내려와 자기 차에 먼저 한동을 태운 재희는 자판기에서 음료수 두 캔을 뽑아 돌아왔다.
“아직 젊으신데요.”
시동을 걸며 농담처럼 말을 붙이자 한동이 눈을 부라렸다.
“사람 놀리냐?”
그 말에 피식 웃은 재희는 음료수 캔 하나를 따서 한동에게 건넸다.
“일단 드시고 좀 진정하세요. 혈압 올라갑니다. 안 그래도 고혈압 있는 분이…….”
재희의 손에서 캔을 받아 든 한동은 벌컥벌컥 음료수를 들이켰다. 원샷으로 음료수를 비운 한동이 손안에서 캔을 찌그러뜨려 차의 컵홀더에 처박았다.
“씨발, 진짜 더러워서 못 해 먹겠다. 그냥 다 까고 회사 나가든가 해야지.”
“그럴수록 더 붙어 있을 생각을 하셔야지 나가긴 왜 나갑니까?”
주차장을 빠져나가며 대꾸하자 한동이 생각할수록 열불이 난다는 얼굴로 씩씩거렸다.
“너 아까 그 새끼 말 못 들었어? 사내에 안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어디 있냐잖아.”
“여기 있잖아요, 여기. 나가더라도 방송은 하고 나가세요.”
“너는 내 존재 가치가 니들 백업하는 거 말고는 없지?”
한동이 부루퉁하게 되물었다. 물론 진담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재희는 하하, 하고 소리를 내어 웃고는 짐짓 진지하게 대답했다.
“진짜 나이 드셨네. 사소한 일에 그렇게 서운해 하시는 거 갱년기 증상이에요.”
“야, 이 불난 집에 강풍기 틀 새끼야.”
한동이 반 농담으로 면박을 주었으나 평소와는 달리 그 말투에는 힘이 빠져 있었다. 핸들을 잡은 재희는 애써 그리로 시선을 주지 않으려 노력했다.
선경이나 한동 같은 선배들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는 건 재희에게도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팀 내에서 절대 약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까닭은 자신이 무너지면 다른 팀원들 역시 버티기 어려울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한동의 마음도 다르지 않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후배들이 보는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던 건 한동의 인내심도 슬슬 바닥을 보인다는 증거일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