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9
19화.
대부분의 사진 아래에는 손으로 직접 쓴 한두 줄의 멘트가 꼭 붙어 있었다. 가정적인 사람이라는 희경의 말은 단순한 수식이 아닌 듯했다. 정성스럽게 적힌 글씨 위를 손끝으로 만져 본 정언이 물었다.
“남편분이 쓰신 건가요?”
“네. 사진 찍는 걸 워낙 좋아해서요.”
정언은 앨범을 더 살펴보았다. 회사 동료들과 찍은 사진도 여러 장이었다. 아마 야유회나 창립 기념일 같은 행사에서 찍은 것 같았다. 앨범을 모두 본 정언은 윤에게 카메라를 끄라는 손짓을 했다. 윤이 촬영 정지 버튼을 누르고는 캠코더를 정리했다.
정언은 희경에게 말했다.
“저희가 몇 가지 더 알아본 뒤에 방송하는 게 확정되면 바로 연락을 드릴 거예요. 그리고 방송 확정돼도 일정은 바로 나오지 않거든요. 일정 정해지는 대로 그것도 알려 드릴 테니까 기다려 주세요.”
“네. 얘기 들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피디님.”
희경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조그맣게 대답했다. 정언은 집 안을 다시 한 번 훑어보다 장식장 위의 액자에 시선을 멈췄다.
두 딸과 부부의 가족사진이었다. 아직 아빠의 죽음조차 이해하지 못한다는 어린 딸들의 해맑은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정언은 남은 커피를 마시는 척 눈을 돌렸다. 곧 잔을 내려놓은 정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 있으시면 언제든지 저희 사무실이나 작가님, 아니면 저한테 바로 연락 주세요. 건강 잘 챙기시고요.”
희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이 가방을 들고 정언을 따라 현관을 나섰다. 굳이 배웅하려는 희경을 몇 번이고 만류해 들여보낸 정언은 빌라 앞에 세워 둔 차에 올라탔다. 조수석에 앉은 윤이 가방을 품에 당겨 안았다.
“의정부경찰서 잠깐 들러서 확인 좀 해보자.”
무심히 말하며 시동을 걸려던 정언은 문득 손을 멈추며 윤을 보았다. 윤은 멍하니 앞창에 시선을 둔 채 침묵하고 있었다. 희경과 두 아이, 죽은 규형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윤을 빤히 보던 정언이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이거 진짜 아무것도 아냐. 더한 거 많아. 벌써 그러면 어떻게 할 건데.”
위로라기에는 딱딱한 말이었다. 정언은 그 말을 내뱉은 직후 조금 후회했다. 윤이 아무리 마음의 준비를 했다 해도 막상 현실에 부딪치면 생각과 다른 건 당연했다. 자신 역시 오래전에 그런 과정을 겪은 적이 있었다. 말이 없던 윤이 문득 물었다.
“항상 이렇죠?”
“뭐가.”
“선배는 어떻게 견디는 거예요?”
짧은 대답에 돌아온 질문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견디는, 그 세 글자가 낯설었다. 견디는. 정언은 그 말을 입 안으로 한 번 더 뇌었다. 윤이 손끝으로 열없이 눈썹 부근을 문질렀다. 차 안의 정적이 어색해졌다. 윤이 가방을 더 끌어당겨 안고는 고개를 조금 숙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게 궁금했어요.”
정언은 대답 대신 시동을 걸었다. 어떻게 견디냐고? 그런 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언젠가의 술자리에서 재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세상이 정말 정의롭고 공정해지면, 모든 사람들이 행복할 권리가 있고, 누구도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사회가 되면 같은 건 없어도 돼.」
바꾸어 말하자면, 그건 그런 세상이 오기 전까지 반드시 이런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누군가는 이 일을 해야 했다. 그 중 한 사람이 자신이었다. 정언에게는 그게 전부였다. 다른 생각은 해 본 적 없었다.
정언은 재킷 주머니에서 담배를 한 대 꺼내 물고는 창을 열었다. 한 뼘의 공간 사이로 날카롭게 밀려드는 바람 소리가 차 안의 침묵을 휘감았다. 윤이 반대편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정언은 액셀을 밟으며 윤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다. 바람에 흐트러지는 짧은 머리칼 사이로 느슨한 셔츠 칼라에 감싸인 목덜미가 눈에 들어왔다. 섬세하게 그린 듯 떨어지는 선에는 소년 같은 예민함이 존재했다.
― 선배는 어떻게 견디는 거예요?
머릿속에서 윤의 질문이 되살아났다. 지금까지 아무도 자신에게 어떻게 견디느냐고 물어본 적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직후였다. 정언은 서둘러 다시 앞을 보았다. 눈가루가 가라앉은 스노우 볼을 흔들듯 마음속 어딘가에서 낯선 감각들이 산란했다.
그 예민함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 * *
현관문을 열자 센서 등이 켜졌다. 윤은 거실 스위치를 올릴 생각도 하지 않고 소파로 쓰러지듯 몸을 묻었다. 평소보다 그나마 이른 퇴근이었지만 통째로 물에 빠졌다 나온 듯 온몸이 피곤했다.
정언과 의정부경찰서의 담당 형사와 서울과학수사연구소 부검의, 서온건설 본사 인사 과장까지 만나러 하루 종일 돌아다닌 탓에 최근 몇 년 동안 할 드라이브를 이미 다 한 기분이었다. 서울을 상하좌우로 누비는 동선에도 기가 질렸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건 지치는 기색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도 없는 정언이었다.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홍제동에서 희경을 만났을 때부터 윤은 막연하던 두려움이 실체를 갖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타인의 고통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기록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남편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희경의 모습을 지켜보며, 윤은 그녀가 그날의 일을 수십 번, 수백 번도 더 끊임없이 곱씹었으리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잊으려 애를 써도 괴로울 판이었다. 단 하나도 잊지 않으려고 계속해서 기억하고 또 기억하며 게시판에 매일 글을 올리는 희경의 심정이 어떤지 눈앞에서 보는 것은 숨이 막혔다.
당장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기에 더욱 그랬다. 내내 낯선 지도 속에 갇혀 버린 사람처럼 막막할 뿐이었다. 그러나 차마 그 모습을 바로 보지 못하는 자신과 달리 정언은 침착했다.
「이거 진짜 아무것도 아냐.」
무심하게 내뱉은 그 한마디에 윤은 정언이 기획했던 많은 방송들을 복기했다. 거기에는 늘 진실이 존재했고, 그 진실에 이르는 길은 항상 어둠 속에 있었다. 정언이 그 속에서 길을 잃지 않는 법이 문득 궁금해졌다.
하지만 매번 이런 일을 어떻게 견디는 거냐고 물었을 때, 정언은 대답하지 않았다. 왜였을까.
몸도 마음도 완전히 한계에 가까웠다. 더 이상 생각하는 것이 힘들었다. 윤은 손을 뻗어 소파 위의 리모컨을 찾았다. 전원 버튼을 누르자 화면이 켜졌다. 케이블 채널의 낯선 프로그램이 흘러나왔다. 낯익은 연예인들 몇몇이 텔레비전 안에서 깔깔거렸다.
소파에 거의 모로 누워 거기 멍하니 시선을 주던 윤은 다시 눈을 감았다. 가벼운 두통이 밀려들었다.
“미치겠네, 진짜…….”
중얼거린 윤은 팔을 올려 눈가를 덮었다. 이런 일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날이 올 것 같지가 않았다. 정언은 처음부터 그럴 수 있었던 건지, 그게 아니라면 그렇게 되는 데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했을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반쯤 넋을 놓고 누워 있던 윤은 소파 아래서 핸드폰이 울리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손을 뻗어 더듬었으나 벨소리만 날 뿐 핸드폰은 잡히지 않았다. 들어오자마자 손에 들고 있던 것들을 다 내팽개쳤더니 소파 아래 틈으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아오 진짜, 하고 투덜거리며 몸을 구겨 소파 아래를 헤집은 윤은 간신히 핸드폰을 꺼내 액정을 보았다. 태훈이었다. 놀란 윤은 얼른 전화를 받았다.
“어, 태훈아.”
『회사냐?』
거두절미하고 돌아오는 질문에 윤은 자세를 고쳐 바로 앉으며 대답했다.
“집이야. 오늘 좀 일찍 퇴근해서. 왜?”
『팀 옮겼다면서.』
“소문 빠르네.”
반쯤 자포자기한 투로 대답한 윤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너 괜히 이상한 생각하고 전화한 거 아냐?”
태훈의 성격이라면 분명히 자기가 강제 전보 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책했을 게 틀림없었다. 잠시 침묵하던 태훈이 말했다.
『나 너희 집 근처야. 얼굴이나 잠깐 보자.』
“그럼 우리 집으로 와.”
태훈은 더 묻지도 않고 그래, 하며 전화를 끊었다. 한숨을 쉰 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제야 거실 스위치를 켰다. 집 안은 아침에 나간 그대로 깔끔한 상태였다. 어질러 놓을 시간조차 없어 치울 것도 없는 탓이었다.
태훈이 벨을 누른 건 십 분쯤 뒤였다. 문을 열자마자 며칠 사이 더 수척해진 태훈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놀란 윤이 야, 하고 손가락질을 하자 태훈 역시 윤을 보더니 대번에 눈을 크게 떴다.
“살 빠졌다, 너.”
“내가 할 소리야, 자식아.”
다음 순간 윤과 태훈은 동시에 헛웃음을 뱉었다. 생각해 보면 서로 딱히 나을 것 없이 오십보백보인 처지긴 했다.
윤이 냉장고를 열어 보며 물었다.
“뭐 마실래?”
“아니. 진짜 그냥 퇴근하다 얼굴 보려고 온 거야.”
태훈이 등 뒤에서 대답했다. 윤은 냉장고 문을 닫으며 거기 기대섰다.
“우리가 그럴 사이였냐? 너 뭐 할 말 있어서 그러지?”
태훈이 열없이 웃었다. 짧은 한숨을 쉰 태훈이 몸을 조금 앞으로 숙여 바닥에 시선을 두더니 입을 열었다.
“ 갔다며.”
“뭐 그렇게 됐어.”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로 대꾸하자 태훈은 오랫동안 침묵하다 조금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야, 윤아. 내가 진짜 미안하다. 난 일이 그렇게 될 줄 몰랐어. 그냥 정말 너무 답답해서 너한테 얘기한 건데…….”
“내가 너 그럴 줄 알았다.”
윤은 혀를 차며 태훈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오태훈 이건 하여튼 진짜 인간이 앞뒤로 꽉 막혀 가지고. 야, 너 나한테 그 얘기하면서 게시판에 글 올려 달랬냐? 내가 혼자 설치다가 그런 거 가지고 마음에 걸려서 사과하러 왔어? 다큐 엎어져서 무지하게 한가해?”
“아니, 그게…….”
“됐어.”
윤은 우물거리며 뭐라고 말하려는 태훈을 막고는 소파에 풀썩 앉았다.
“진짜 괜찮아. 내가 언제 그런 팀에서 또 일해 보겠냐. 소문은 무서운데 막상 가 보니까 안 그래. 선배들도 다 잘해 주고.”
“그래?”
태훈이 의심을 지우지 못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눈을 가늘게 뜬 윤은 태훈의 이마를 뒤로 밀었다.
“그 표정 뭐야, 짜증나게.”
태훈이 고개를 젖힌 채로 윤을 빤히 보다 피식 웃었다. 평소에는 돌부처 같은 주제에 쓸데없이 눈치 하나는 빨랐다. 윤은 이마를 누르고 있던 손을 떼고는 테이블 위에 놓아 둔 캔을 다시 집어 들었다.
“오늘 처음 취재 따라갔는데 빡세긴 빡세더라.”
하루 종일 지쳐 있었던 탓인지 쉽게 본심이 튀어나왔다. 태훈이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로 팔짱을 끼었다.
“취재를 벌써 나갔어? 혼자?”
“아니, 난 보조만 했지. 제보 들어온 게 있어서 그거 확인하러 간 거야. 제보자만 만나고 말 줄 알았는데 서울 드라이브 실컷 했다, 아주.”
“사수가 장난 아닌가 보네. 거기 피디들 다 그렇긴 한데, 사수 누군데?”
“서정언 선배.”
정언의 이름을 듣자마자 태훈의 눈이 휘둥그렇게 뜨였다. 어리둥절해진 윤은 태훈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평소에는 눈동자가 반이나 보일까 말까 한 그 실눈이 이렇게 한껏 커지는 건 매우 드문 일이었다.
“왜, 너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