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90
190화.
주영의 이야기가 나오자 형두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었다.
“아휴, 뭐 어떨 게 있나. 속을 모르니까.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하는 분 아닙니까. 아침마다 우리는 신문 보고 뉴스 보고 그러면 속상해 죽겠어요. 좋은 말 해 주는 언론이 없잖아. 언론마다 그렇게 지랄들을 하는데도 지지율 안 빠지는 게 기적이긴 한데, 이게 언제까지 갈지 불안하잖아요. 우리가 속상하다고 한마디 하면 본인은 그냥 허허 웃으면서 다 제 부덕의 소치입니다, 죄송합니다, 그래요. 그러면 우리가 뭐라고 그래. 열 내다가도 바람 빠지지.”
주영의 성격을 생각해 봤을 때 충분히 어떤 상황인지 알 만했다. 그러나 주영 역시 사람인 이상, 겉으로 그런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속으로 얼마나 감정을 갈음해야 할지 짐작이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형두가 한동을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말 나온 김에 전 부장, 진짜 뉴스 어떻게 안 되겠어? 다른 건 몰라도 만 어떻게 좀…….”
“내가 그게 되면 애초에 그따위로 내보내게 내버려 두냐?”
한동이 형두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잘랐다. 형두야 당연히 그렇지 않아도 조금 전 사무실에서 그것 때문에 한동이 대판 하고 왔다는 걸 알 리 없었다.
재희는 저도 모르게 한동의 눈치를 흘끔 살폈다. 확연히 울적해진 한동이 젓가락 끝으로 하릴없이 밥알을 뒤적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 것을 까맣게 모르는 형두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진짜 미친다, 내가. 언론 신뢰 거의 없는 젊은 지지층들도 YBS 신뢰도는 높은 편이잖아. 그런데 에서 논조 매일 그렇게 때리니까 아주 내가 다 돌아 버리겠어. 살얼음판 걷는 기분이라고. 언제 깨질지를 모르겠으니까. 무슨 주식 경마를 해도 이러지는 않겠네. 아침에 딱 일어나면 제일 먼저 지지율 확인하고 한숨 돌리는데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진짜.”
“황 의원이 그 정도면 민 의원은 어떻겠어?”
한동이 툭 내뱉은 말에 형두가 풀이 죽어 대꾸했다.
“그러니까 생보살 아냐. 아무리 겉으로 티를 안 내도 속이 속이겠어? 가족들도 걱정이고 참…… 사모님이 신경 많이 쓰이시는 거 같더라고. 사모님 얼굴 볼 때마다 죄책감 들어, 요샌. 우리가 정치 안 하겠다는 사람 꼬셔서 이 바닥 밀어 넣었으면 됐지, 대선까지 내보내서 만신창이 만들어야 하나 싶고.”
마지막 말에는 복잡한 감정이 어려 있었다. 모두가 흠결 없는 영웅을 원하는 세상이었다. 그러나 난세에서 어떤 영웅인들 상처 입지 않을 수 있을까.
구원해 달라고 외치는 이들이 실은 한 사람의 삶을 빠져나올 수 없는 늪으로 밀어 넣는 것이라면. 선한 사람이 자신의 그 선함 때문에 고통을 받아야만 한다면…… 세상은 언제나 희생을 통해 진보해 왔다지만, 그것을 남들보다 조금 더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는 위치에서 불현듯 찾아드는 죄책감은 선연했다.
“일단 보도 나가면 진짜 싸움은 그때부터 시작이니까 조금만 더 참아 주십시오.”
재희가 애써 웃으며 말하자 형두가 부러 더 과장된 동작으로 도리질을 쳤다.
“지금도 매일 싸움인데 그때부터 진짜 싸움이라니, 끔찍한 소리 할 겁니까? 지금도 죽지 못해 사는구만, 하여튼 강 피디는 젊은 사람이 너무 무서워.”
“그래도 살아야 되니까 식사 좀 하시죠. 저도 싸워야 되니까 밥 먹겠습니다.”
입맛이 있을 리 만무했지만 그건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재희는 모래알처럼 넘어가는 밥을 억지로 씹었다.
일이 진행될수록 느는 거라고는 반드시 버텨야 한다는 의지였다. 때문에 요즘은 억지로라도 끼니를 챙겨 먹고 하루에 단 서너 시간이라도 반드시 잠을 자려 노력하고 있었다. 자신뿐 아니라 팀의 모두가 마찬가지라는 걸 재희는 잘 알고 있었다.
“그, 는 좀 어때요? 방송 나가는 거 보니까 그래도 아직은 외압 덜 받는 느낌 확실히 나던데.”
곁에서 말없이 식사를 하던 형두가 그릇을 거의 다 비워 갈 때쯤 입을 열었다. 재희는 그사이 간신히 반쯤 먹은 밥그릇에 슬쩍 눈을 주고는 수저를 내려놓았다.
“위하고 눈치 싸움하는 상황이죠. 팀원들한테 문제도 좀 생겼고요.”
팀원들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말에 맞은편에 앉은 한동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재희는 담담하게 그간 있었던 일들에 대해 설명했다.
정언의 집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침입자, 자신에게 온 사찰 문자, 민혜의 남편에게 걸려 온 전화, 윤의 차 브레이크 호스가 절단된 이야기까지 가자 한동이 들고 있던 젓가락을 팽개치며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아니 이 미친놈들, 그거 진짜야? 너 왜 여태 말을 안 했어?”
“팀 바깥으로 얘기 새면 부장님 쪽에도 문제 생길 수 있겠다고 판단했습니다. 부장님이 별말씀 없으셔서 안전하다는 거 알았고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한동이 말끝을 흐렸다. 재희의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아는 탓이었다. 만일 한동 쪽에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면 그건 TF의 내용이 발각됐다는 뜻일 테고, 그러면 보도조차 하지 못하고 막힐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게 되면 정언의 계획은 시작조차 할 수 없게 되는 판이었다.
때문에 원진솔 기자와 이도하 기자가 거의 스파이처럼 비밀스럽게 움직이고 있다는 건 재희도 아는 사실이었다. 한동이 굳이 에이스 중 에이스인 두 사람만을 택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형두가 기가 질린 표정을 했다.
“브레이크 호스를 잘라요? 그거 완전 죽으라고 한 건데? 사고는 안 났습니까?”
“네. 다행히 보험사 직원이 먼저 발견했답니다.”
재희의 대답을 들은 형두가 초조한 티가 나는 동작으로 얼굴을 몇 번 문질렀다.
“야, 이거 진짜 문제 심각하네. 엄대진 주변에서 죽은 사람 예전부터 한둘 아니라는 소문 있긴 했는데, 그렇게까지 해야 되나? 지난번에 송민혜 작가 남편, 그쪽도 뭐 사찰 그런 거 있었다면서요. 엄대진이나 한선당 쪽에서 수상한 인물들하고 접촉 있는지 우리가 알아보는 중이니까, 일단 조금만 기다려 봐요.”
“예전에 민 의원님이 서온건설 대상으로 소송 진행하실 때 민간 자문단 쪽에도 사찰 붙었다면서요.”
재희가 말을 꺼내자 형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음, 그랬죠. 이것도 보수단체 이용하고 있을 확률 높기는 해요.”
“급하긴 급한 모양입니다.”
형두가 가벼운 한숨을 뱉고는 상 위에 놓인 소주병으로 시선을 주었다. 형두가 손을 뻗어 병을 따며 재희에게 물었다.
“강 피디, 술 한 잔 할래요?”
재희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바로 사무실로 다시 들어가 봐야 돼서요.”
형두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들으라는 듯 혀를 찼다.
“거 죽을 만큼 일하면 죽는다니까 말 진짜 안 들어. 전 부장은?”
“한 잔 줘 봐.”
한동은 형두 쪽을 보지도 않고 앞에 둔 잔을 밀어 놓았다. 잔을 채워 주자 숨도 쉬지 않고 단숨에 비운 한동은 그때부터 연신 쉬지 않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혼자 소주 두 병을 스트레이트로 비우는 꼴을 본 형두가 아무래도 뭔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는지 세 병째를 딴 한동을 제지했다.
“아이, 전 부장 뭐하는 거야. 소주 값은 혼자 내, 이럴 거면. 나는 맛도 못 봤어.”
“황 의원은 황 의원 거 시켜 먹어, 그럼. 나는 내 돈 내고 내가 사 마실 테니까.”
한동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세 병째도 기세 좋게 비웠다. 내버려 뒀다가는 가게를 거덜 낼 기세라, 재희는 시계를 보는 척 몸을 일으켰다.
“부장님, 그만 들어가시죠. 저도 사무실 가야겠습니다. 가는 길에 모셔다 드릴게요.”
“됐어, 인마.”
한동이 마지막 잔을 내려놓고는 한쪽 구석에 아무렇게나 벗어 쑤셔 박은 재킷을 집어 들었다. 재희가 뭐라고 말을 붙이기도 전 방을 나선 한동은 자기 카드로 결제를 하고는 휑하니 가게를 빠져나갔다.
형두가 아니 왜 저래, 하며 다급히 쫓아갔다. 한동이 길가에서 택시를 잡는 것을 본 재희는 후다닥 뛰어가 한동을 붙들었다.
“부장님, 제 차 타고 가시라니까요. 어차피 가는 길인데 왜 그러세요.”
“내가 택시비 없어서 남의 차 얻어 타냐?”
재희의 손을 뿌리친 한동은 때마침 앞에 선 택시를 타고 문을 닫았다. 재희가 부장님, 하고 창을 두드렸으나 한동이 기사에게 그냥 가라고 말한 듯 택시가 곧 출발했다.
재희는 이마를 짚으며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사정을 알 리 없는 형두가 의아한 표정으로 재희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전 부장, 무슨 일 있었습니까? 갑자기 왜 저러지?”
“여기 오기 전에 사무실에서 논조 때문에 김양운 앵커하고 일이 좀 있었습니다. 속이 많이 상하셨던 것 같아요.”
재희의 대답에 형두가 대경실색을 하며 발을 굴렀다.
“아니, 이거 내가 안 그래도 속상한 사람 뺨 때린 꼴 아냐. 전 부장은 그러면 그렇다고 말을 하지, 늙어서 사람이 꽁한 것만 생겨 가지고…… 나는 진짜 뭐 알고 한 소리가 아닌데, 이거 정말 미안하게 됐네.”
“아닙니다. 의원님이 죄송하실 건 없죠. 저희가 지금 내부에서 자정이 안 되는 상황이고 보도 시스템이 넘어가서 그런 건데요. 죄송한 게 있어도 저희가 있어야지 의원님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부장님도 이해하실 겁니다.”
형두가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얼굴로 재희를 마주 보다 에이, 하고 공연히 보도블록 위를 툭툭 찼다. 뒷머리를 긁적인 형두가 곧 말을 돌렸다.
“일단 강 피디 얘기한 건은 내가 최대한 빨리 알아볼게요. 그리고 팀원들 몸조심 좀 하라고 그래요. 사설 경호업체라도 붙이든지. 엄대진한테 한 번 찍히면 쉽지 않아요. 내가 들은 얘기도 한두 가지가 아니고…… 가볍게 생각할 일 아니라니까. 우리도 민 의원 불안해서, 본인은 괜찮다고 하는데 지금 경호업체 붙여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강 피디도 그렇고. 지금도 어디서 누가 보고 있을 수 있는 거 아냐.”
“제 걱정은 마시고요, 알아서 잘 하겠습니다.”
“아, 난 알아서 잘 하겠다는 사람들이 제일 무섭더라고. 아무튼 바쁜데 얼른 들어가 봐요. 연락할게.”
형두가 손가락으로 전화하겠다는 제스처를 만들어 보이며 서둘러 자리를 떴다. 인사를 건넨 재희는 주차장에 세워 둔 차에 시동을 걸고는 운전석에 타 문을 닫았다. 화려한 네온사인과 자동차 헤드라이트의 빛무리, 수많은 소음들이 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멀리서 떠돌았다.
언제나 빛이 있다면 그림자도 있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일생을 이 그림자 속에 갇힌 채 나가지 못할까 봐 문득 두려워졌다. 영직의 말처럼, 자신 역시 언젠가는 이 모든 노력이 다 허무했다고 생각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상상만으로도 어딘가가 무너지는 것 같았다.
잠시 고요한 차 안에서 멍하니 앉아 있던 재희는 핸들 위로 엎드렸다. 미치겠다 정말, 하고 중얼거린 말은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다. 그 작고 격리된 공간 안에서 재희는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