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91
191화.
정언은 크게 기지개를 켜며 등을 뒤로 젖혔다. 척추가 재조립되는 듯한 소리가 났다. 죽겠네, 하고 중얼거리며 벽에 걸린 시계를 보자 어느새 밤 아홉 시를 훌쩍 넘긴 뒤였다.
저녁에 황형두 의원과 약속이 있다던 재희는 아직 돌아오지 않은 채였다. 그 빈자리를 슬쩍 넘겨다본 정언은 곁에 앉은 민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작가님, 퇴근 안 해요?”
“그 조석문 영상만 찾아보고 가려고 했더니, 이거 옛날 거라 파일명이 정리가 안 돼 있나 보네. 우리 예전 편람 다 검색해 봐야 하나? 한 십 년 넘은 거래?”
민혜가 충혈된 눈을 누르며 묻는 말에, 정언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대꾸했다.
“글쎄, 그거 나 들어오기 전이라서. 아마 그때 있던 사람 선배밖에 없을 걸요.”
“그러면 강 피디 와야 확실히 알겠네. 정확히 연도도 모르고, 편람 무작정 뒤지긴 귀찮은데. 오래전 거라 그런지 인터넷 찾아봐도 날짜가 확실하질 않아서. 우리가 방송한 건 확실하지?”
“선배 오면 물어보죠, 뭐. 김정환 교수님이 없는 소리 하실 분 아니잖아요. 있지도 않은 방송 얘기 하셨을 리가 있나. 선배 기억력 아직 짱짱한데 작가님이 인터넷 뒤지느니 선배한테 물어보는 게 빠르지. 그만하고 퇴근해요, 얼른.”
“아이고, 모르겠다.”
고개를 흔든 민혜가 가방을 주섬주섬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려던 민혜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어폰을 꽂은 채 뭔가를 메모하고 있던 윤의 어깨를 툭 쳤다. 윤이 놀란 표정으로 민혜를 돌아보았다.
“조심해서 퇴근해요. 알았지?”
신신당부하는 민혜의 얼굴에 윤은 멋쩍은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사무실로 돌아와 아침의 일을 얘기하자마자 자기가 당한 건 새까맣게 잊고 발을 동동 구르며 걱정을 하던 민혜였다. 도리어 윤이 괜찮다며 민혜를 몇 번이나 진정시켜야 할 정도였다. 아무래도 보통 일이 아니다 보니 내내 그 일에 신경이 쓰인 모양이었다.
“정언, 너무 늦게 퇴근하지 말고 일찍 가. 너무 늦을 거 같으면 그냥 숙직실에서 자고. 응?”
민혜는 정언에게도 잊지 않고 말을 덧붙였다. 정언이 알았어요, 알았어, 하며 손을 젓자 민혜가 정언의 등을 찰싹 소리가 나게 쳤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지 말고!”
“작가님이나 조심해서 가요. 빨리 가, 얼른.”
정언은 앉은 채로 민혜를 떠밀었다. 아무래도 발이 떨어지지 않는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본 민혜가 사무실을 나갔다.
채 십 분도 지나기 전 다시 문이 열렸다. 무심코 고개를 들자 유독 피곤한 얼굴로 들어서던 재희가 시선을 맞추더니 가까이 다가왔다. 재희가 건넨 것은 서류 봉투였다. 입구가 단단히 밀봉된 대형 서류 봉투는 한눈에 보기에도 제법 두툼했다. 정언은 그것을 받아 들며 물었다.
“지금 끝난 거예요?”
“응.”
재희가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늘 만성 피로에 절어 있는 편이긴 했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라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었나 싶은 생각이 퍼뜩 스쳤다.
그러나 정언은 거기에 대해 더 캐묻는 대신 봉투를 살펴보았다. 황형두 의원 쪽에서 나온 자료인 듯했다. 정언이 봉투를 뜯어보는 사이, 재희가 맞은편의 호형에게 손짓을 했다.
“안 피디, 지금 서 피디한테 자료 준 거 같이 붙어서 좀 봐 줘.”
“지금 당장이요?”
놀란 토끼처럼 되물은 호형이 자기 책상 위의 스케줄러를 확인하고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전문가 섭외할 시간은 주시면 안 됩니까?”
“아, 그래. 얼마나 걸리는데?”
“일단 연락 돌려 보죠, 뭐. 빠르면 내일부터 검토할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안 돼도 우선 섭외하는 사이에 저랑 서 피디 팀에서 같이 보면 되니까.”
선뜻 대답하는 호형에게 재희가 고개를 까딱였다.
“그러면 그렇게 해.”
호형이 네, 하며 앉아서 핸드폰 주소록을 뒤지기 시작했다. 정언은 자리로 돌아가려는 재희를 불러 세웠다.
“선배, 혹시 예전에 한선당 의원 아들들 병역비리 방송한 건 기억나요?”
“꽤 오래전인데, 그거. 왜?”
뜬금없는 물음이었는지 재희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정언은 관자놀이 부근을 긁적였다.
“김정환 교수님한테 연락이 왔다는데, 윤대석 씨 처방전 발행한 김회영이라는 의사가 캐나다 한인 병원에서 일한다고 했잖아요. 그 한인 병원 원장도 한선당하고 관련 있고.”
“그런데?”
“그 김회영이 일하는 한인 병원 원장 조석문 있잖아요. 이 사람이 당시에 그 의원 아들들한테 진단서 허위로 발행한 의사 중 하나래요.”
조석문의 이름을 들은 재희가 잠시 기억을 더듬는 듯 눈썹을 좁혔다.
“어, 잠깐만. 우리 방송에 조석문 그 사람 나갔었나? 맞지?”
“방송 나가고 바로 캐나다로 이민 갔다고 그랬다는데. 한 십 년 된 거예요?”
“이훈주 과장 일 있고, 그 방송 나간 뒤에 이민 간 거면 십 년까지는 안 됐지. 아마 칠팔 년 전일 거야. 데이터베이스 검색하면 바로 나올 텐데?”
“송 작가님이 검색해 봤는데 예전 파일이라 파일명에 제목이 안 들어가 있대요. 방영 날짜랑 회차 정확히 알아야 검색되는 거 같더라고요.”
“그럼 내가 회차 정보 찾아보고 알려 줄게. 아, 그리고 서 피디, 나랑 잠깐 따로 얘기 좀 하자.”
재희가 손가락을 까딱여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정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얘기?”
“잠깐이면 돼.”
정언은 이유도 모른 채, 먼저 사무실을 나서는 재희의 뒤를 따랐다. 옥상 정원으로 올라간 재희가 먼저 벤치에 앉으며 자기 옆자리를 가리켰다. 풀썩 소리가 나게 곁에 앉은 정언은 팔짱을 끼었다.
“왜, 무슨 일인데 그래요? 아까 사무실 뒤집어졌다던데 혹시 전 부장님 무슨 일 있어요?”
정언이 묻는 말에 재희가 헛웃음을 뱉었다.
“그게 그새 소문이 났어?”
“문 열어 놓고 싸웠다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봤다던데.”
팀에서 한동이 양운과 한판 벌였다는 건 이미 시보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정언 역시 호형에게 그런 일이 있었다고 듣기는 했으나, 정확한 사정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짧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흩은 재희는 오후에 사무실에서 벌어졌던 일을 들려주었다. 김양운 앵커가 데스킹 과정에서 논조를 한선당과 엄대진에 유리하게 편집했고, 한동이 그 때문에 참다못해 폭발했다는 이야기였다.
심각한 표정으로 재희의 말을 듣고 있던 정언은 기가 차서 내뱉었다.
“김양운 그거 진짜 안 되겠네.”
재희가 그 말에 정언의 이마를 툭 밀었다.
“선배 소리도 안 하냐, 이젠?”
“뭐 그런 새끼까지 선배 대접하라고 그래요. 전 부장님 아주 속 뒤집어지셨겠는데.”
정언이 이마를 문지르며 대꾸하자 재희가 수긍했다.
“장난 아닌 거 같더라고. 회사 관두겠다고 막 그러셔서 달래긴 했는데, 속이 말이 아니시겠지.”
불현듯 공기가 무거워졌다. 잠시 침묵하던 정언은 손목의 시계를 흘끔 보고는 말을 돌렸다.
“그거 얘기하려고 불렀어요?”
“아, 아냐. 저번에 이사회 호출 건 때문에.”
재희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이사회라는 말에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건 왜요?”
저도 모르게 말투가 다소 방어적으로 나갔다. 다행히 눈치채지 못한 듯, 재희가 벤치에 비스듬히 등을 기대며 정언을 마주 보았다.
“김 피디가 녹취록 가지고 있다는 얘기 들어서 본인한테 물어보니까 맞다고 하더라고. 지금 노조에서 이사회가 제작진들한테 협박하고 뭐 이러는 자료 다 모으는 중인데, 혹시 그 녹취록 공개할 수 있냐고 물어보니까 서 피디랑 관련된 거라 자기 혼자는 결정할 수 없다고 얘기하길래.”
“아, 그게…….”
정언은 답지 않게 주저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선뜻 판단이 되지 않아서였다.
윤이 재희에게 녹취록을 주겠다고 말하지 않은 이유가 뭔지는 충분히 짐작 가능했다. 고광훈 이사가 했던 발언이 심각한 폭언에 성희롱 수준이었으니, 녹취록을 공개하면 그게 자신에게 피해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게 틀림없었다.
재희가 정언을 물끄러미 마주 보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러는 거 보니까 발언 수위 대단했나 보네. 서 피디 의견 존중할게. 공개하기 싫다고 하면 그렇게 해도 상관없어.”
“아니, 난 솔직히 그거 공개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아, 짜증나네.”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정언은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애초에 윤이 그 자리에서 이성을 잃은 건 고광훈 이사가 강재희랑 잤냐 소리를 운운한 탓이었다. 그게 물론 자신의 잘못은 아니었으나, 차마 당사자 앞에서 그랬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다.
손을 깍지 끼어 입가에 대고 잠깐 생각에 잠겼던 정언은 시선을 바닥에 둔 채 대답했다.
“김 피디한테 녹취록 주라고 할 테니까 선배가 들어 봐요. 내 얘기만 있는 거 아니라서 나도 뭐라고 말 못 하겠네.”
“다른 사람 얘기가 있어?”
“굳이 말하기 싫으니까 들어 보고 알아서 판단하시고. 용건은 그게 다예요?”
“응.”
“알았어요.”
정언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재희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정언을 쳐다보았다.
“혹시 김 피디가 무슨 얘기 했어?”
“뭐? 아침에 왜 지각했는지?”
정언이 되묻자 재희가 슬쩍 정언의 눈치를 살폈다.
“들었어?”
정언은 코끝으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팔짱을 끼었다.
“그럼 뭐 말 안 하고 언제까지 버틸 줄 알았어요? 남자들의 비밀 좋아하네. 걸리면 나한테 무슨 꼴 당할지 몰라? 그런 게 있었으면 선배도 나한테 바로 말했어야 할 거 아니에요.”
“아니, 그래서 난 김 피디보고 빨리 말하라고 했지.”
재희가 실실 웃는 얼굴로 말꼬리를 늘였다. 재희는 누구보다 정언을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윤이 그 일을 숨긴 걸 나중에 알게 되면 자신이 얼마나 펄펄 뛸지 모를 리가 없었다. 때문에 윤에게 빨리 말하라고 종용했다는 것까지 의심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애초에 윤이 말할 때까지 내버려 두려고 생각한 것 자체가 괘씸했다. 정언은 얼굴에서 웃음기를 싹 거뒀다.
“변명 듣기 싫고요. 내 일 말 안 했다고 김 피디보고 그렇게 뭐라고 하더니 하여튼 역지사지 더럽게 안 돼, 진짜. 김 피디만 가운데 껴서 그게 무슨 꼴이에요? 뭘 잘못했다고?”
정언이 따지는 말에 재희가 턱을 만지작거리며 심각하게 대답했다.
“원죄라면 김 피디가 서 피디 부사수 된 게…….”
“부사수로 붙여 준 건 누구냐고, 그래서!”
즉시 말을 자르며 도끼눈을 뜨자 재희가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바로 항복했다.
“아, 알았어. 알았어. 다 내 잘못이야.”
“진작 그러지, 사람이 꼭 두 번 말하게 만들어.”
혀를 차는 정언의 얼굴에 할 수 없다는 듯 웃은 재희가 말을 돌렸다.
“그래서, 김 피디 그러고 나서 무슨 얘기 있었어?”
“오후에 보험사에서 대차 받아서 갖다 놓긴 한 거 같던데, 모르겠어요. 경찰에서 조사해 보고 연락 주겠지. 선배가 자료 준 건 내일 안 피디랑 같이 검토 시작할게요.”
“알았어. 내려가서 다들 별일 없으면 들어가라고 해. 서 피디도 퇴근하고.”
재희가 앉은 채 말했다. 일어날 기미조차 없는 그 모습에 정언이 멈칫하며 물었다.
“안 들어가요?”
재희가 씩 웃고는 턱 끝으로 자판기를 가리켰다.
“커피 한 잔 마시고 가게. 먼저 들어가.”
그래요 그럼, 하고 대답한 정언은 옥상 문을 열려다 말고 다시 한 번 재희를 돌아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방금 전까지 웃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몸을 숙인 재희의 머리 위로 긴 그림자가 드리워져 그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