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92
192화.
까닭 없이 무언가 서늘한 감각이 심장 부근을 스쳐 지났다. 못 박힌 듯 잠시 서서 재희를 뚫어지게 보고 있던 정언은 문득 기시감을 느꼈다. 술에 취해 엉망으로 무너진 재희가 죽고 싶다고 중얼거리던 그 얼굴이 불현듯 겹쳐졌다.
재희가 약해지는 순간을 목격하는 건 정언에게 힘든 일이었다. 재희 역시 그런 걸 원할 리 없었다. 애써 거기서 눈을 돌린 정언은 서둘러 문을 열고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사무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기 무섭게, 윤이 기다렸다는 듯 파티션 너머로 몸을 내밀며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강 피디님이 뭐라고 하세요?”
“녹취록 얘기했었다며. 그거 관련해서 잠깐 뭐 좀 물어본다고.”
정언의 대답에 윤이 아, 하며 시선을 맞춰 왔다. 불안한 것 같기도 하고 걱정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한 그 눈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선배한테 녹취록 보내 줘. 직접 들어 보고 판단하라고 했으니까.”
“아, 네.”
윤이 멈칫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정언은 뒤에 던져 둔 가방을 집어 들며 윤에게 말했다.
“오늘은 그만하고 퇴근해. 아침부터 고생했는데. 집에 가는 거 괜찮겠어?”
“녹취록 편집해서 보내 드리고…….”
“내일 해도 돼.”
책상 위의 물건들을 대충 가방에 쑤셔 넣으며 말을 끊자 윤이 의아한 표정을 했다.
“선배는요?”
“나도 정리하고 가야지. 내일부터 국세청 자료 바로 검토 들어갈 거야. 선배가 조석문 병역비리 관련 회차 찾아 준다니까, 내일 김 피디가 작가님하고 영상 내용 한 번 확인해 보고.”
윤이 자기 다이어리에 급히 무언가를 메모하더니 주저하다 물었다.
“선배, 저…… 금요일에 이희경 씨 잠깐 뵙고 와도 돼요? 성이진 교수님 센터 예약된 날이라서요.”
“왜? 아, 그날 수아 보러 간다고 약속한 것 때문에? 그렇게 해.”
간단히 대답한 정언은 한쪽 어깨에 가방을 걸쳐 메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티션 위를 탁탁 치며 선배가 다들 퇴근하래요, 하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석현이 기지개를 쭉 켜더니 손을 흔들었다. 정언이 먼저 사무실을 나서자 윤이 서둘러 뒤쫓아 나왔다.
엘리베이터에 탄 정언은 버튼을 누르고 곁에 나란히 선 윤을 흘끔 보았다. 한쪽 손에 차 키를 쥔 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시선을 어슷하게 내린 채 말이 없었다. 지하 주차장에 내린 정언은 윤의 어깨를 툭 쳤다. 윤이 화들짝 놀라며 정언을 보았다.
“조심해서 들어가고.”
고개를 까딱이며 건넨 말에 윤이 네, 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정언은 윤을 지나쳐 자기 차를 세워 둔 블록으로 향했다. 시동을 건 정언은 차 문을 열려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 그 자리에 선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윤이 눈에 들어온 건 그때였다.
정언은 가만히 그 뒷모습을 보았다. 시동조차 걸지 못하고 서 있는 윤의 모습은 낯설지 않았다. 의 모두가 이미 겪어 본 통과 의례였다.
가벼운 한숨을 뱉은 정언은 윤에게 다가가 팔을 낚아챘다. 정언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몰랐던 듯, 짧은 숨을 들이쉬며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던 윤이 정언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눈을 깜빡였다.
“타. 데려다줄 테니까.”
정언이 세워 둔 자기 차를 가리키자 윤이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아니에요.”
떨리는 손끝을 황급히 말아 쥔 윤이 잡힌 팔을 빼려 했다. 그러나 정언은 손에 더 힘을 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렇게 손 떨면서 운전은 어떻게 할 건데? 원래 수전증 있어?”
모르는 척해 줄 마음 따위는 없었다. 날카롭게 지적하는 정언의 말에 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윤의 귀 끝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윤을 놓아 준 정언은 혀를 차며 내뱉었다.
“말 길게 하지 말고 빨리 타. 나도 피곤해.”
더 뭐라고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운전석에 올라타며 문을 닫자, 쭈뼛거리던 윤이 마지못해 조수석 문을 열고 들어와 앉았다. 죄송합니다, 하고 조그맣게 입술을 달싹이는 얼굴에 정언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한 대 꺼내 물며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죄송할 일 아니니까 그런 생각 하지 마. 당연한 거고 김 피디만 그런 거 아냐. 우리 팀 누구라도 다 똑같아.”
윤이 고개를 숙이며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그런 윤에게 신경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익숙해진다는 말은 두렵지 않다는 말과 동의어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은 이런 일을 조금 더 먼저 겪었을 뿐이고,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는 데 익숙해진 것에 불과했다. 윤이 이런 일로 죄책감을 갖는 건 싫었다.
정언은 손을 뻗어 라디오를 켜며 말을 돌렸다.
“아침에 보통 몇 시에 나와?”
“아무리 늦어도 여덟 시 반이면…….”
윤이 왜 그런 걸 묻나 싶었는지 정언의 표정을 살피며 말끝을 조금 흐렸다. 정언은 앞을 보며 여상하게 말했다.
“차 고칠 때까지 카풀해 줄 테니까 여덟 시 이십 분에 나와 있어.”
그 말에 윤이 정말 놀랐는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당황한 얼굴로 도리질을 쳤다.
“선배, 아니에요. 저 정말 괜찮아요.”
“누가 봐도 안 괜찮아.”
“안 그러셔도 돼요. 진짜예요.”
“매일 신경 써야 되는 거 싫으니까 그러겠다는 거야. 나 편하자고.”
귀찮다는 투로 말이 나갔으나, 그 말을 입 밖으로 낸 순간 가슴이 덜컥했다. 결국 신경이 쓰인다는 걸 자기 입으로 인정한 꼴이 된 까닭이었다.
윤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건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무심코 속내를 드러내 보일 의도는 아니었기에, 불현듯 뒷덜미가 화끈거렸다.
“선배.”
윤이 부르는 소리에 정언은 환기하는 척 창을 반쯤 내리며 그 말을 끊었다.
“나 김 피디랑 이러는 게 더 귀찮아. 그냥 고맙다고 했으면 좋겠는데.”
머뭇거리던 윤이 결국 감사합니다, 하고 대답했다. 사실 윤이 쉽게 그러겠다고 하지 않으리라는 건 예상한 일이었다. 서로의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하더라도 자신 역시 윤에게 절대 신세지지 않으려 했을 게 뻔했다. 내가 선배라 다행인가, 속으로 생각한 정언은 헛웃음을 뱉었다.
윤의 집 주차장에 도착한 건 이십 분쯤 지나서였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기둥마다 ‘CCTV 촬영 중’이라는 안내문이 큼지막하게 붙어 있었다. 누가 봐도 새로 붙인 게 분명했다. 아마 아침에 경찰이 찾아오고 경비실에도 조사가 들어간 바람에 부랴부랴 조치를 취한 듯했다.
차를 세운 정언은 전면창 너머로 주차장 안을 흘끗 살폈다. 빨갛게 반짝이는 CCTV 불빛이 몇 개 눈에 띄었다. 경찰이 드나들었던 데다 단속도 강화했을 테니, 어지간한 강심장이 아니고서야 바로 다시 윤을 노릴 확률은 낮을 터였다.
정언은 버튼을 눌러 도어록을 풀어 주었다.
“들어가. 문단속 잘 하고.”
그러나 윤은 어쩐 일인지 바로 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무슨 할 말이 있는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입술 끝을 몇 번 물었다 놓던 윤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저, 선배.”
“왜.”
“잠깐 들어왔다 가실래요? 뭐 마실 거라도 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정언은 고개를 돌려 윤을 마주 보았다. 바짝 긴장한 채 자신을 응시하는 윤의 얼굴에, 어쩐 일인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웃는 소리가 새었다. 정언은 윤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심각하게 물었다.
“김 피디가 나한테 그런 제안 하는 거 아주 부적절하지 않나?”
그게 무슨 뜻인지 생각할 시간이 잠시 필요했는지, 몇 초 정도 눈을 깜빡이던 윤이 곧 펄쩍 뛸 기세로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뇨, 선배! 그게, 그런 거 진짜 아니고요, 저 정말 아무 짓도 안 해요!”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고 누가 그랬던 거 같은데, 라고 놀리려는 말이 목까지 나왔으나 정언은 그 말을 애써 눌러 참았다. 이미 윤이 목덜미까지 달아올라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빤히 보이는 탓이었다. 하여튼 가끔 쓸데없이 귀엽지, 하고 속으로 중얼거린 정언은 손을 휘적거렸다.
“알았어. 커피나 한 잔 주든가, 그럼.”
반쯤 농담이긴 했지만, 부적절한 제안이라고 생각한 건 사실이었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 대답하는 건 확실히 여지를 주는 행동이었다. 이건 서정언답지 않았다.
선을 그어야 할 때 왜 그렇게 하지 못하는 걸까.
뒤늦게 따라온 물음에 정언은 바로 답을 떠올리지 못했다. 지금처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상황에 마주칠 때면 스스로가 낯설어졌다.
그런 속내를 알 리 없는 윤이 먼저 차에서 내리며 파닥파닥 손부채질을 했다. 물론 이미 새빨개진 얼굴에 그다지 소용이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먼저 입구와 연결된 계단으로 올라간 윤은 2층의 첫 집 앞에 멈춰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안에서 잠금장치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연 윤이 센서 등이 켜지는 걸 확인하고는 들어오세요, 하며 멋쩍게 웃었다. 거실 스위치를 올린 윤은 식탁 의자 위에 자기 가방을 올려놓고는 주방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선 정언은 잠시 윤의 집 안을 둘러보았다. 당장 인테리어 잡지에 소개된다 해도 그러려니 할 것 같은 집이었다. 벽에 걸린 작은 액자들이나 책상 위의 소품 몇 개만 봐도 튀지 않지만 세련된 취향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잠깐 앉아 계세요.”
윤이 말하며 냉장고를 열었다. 무심코 그쪽으로 시선을 준 정언은 냉장고 홈바에 가지런히 진열된 제로 코크 캔을 보고 저도 모르게 픽 웃었다. 등을 돌리고 있어 이쪽을 보지 못한 윤은 냉장고에 거의 머리를 집어넣을 기세로 문을 열고 있다가 정언을 돌아보았다.
“시간 늦었는데 커피 말고 주스 드릴까요?”
“아무거나.”
짧게 대답한 정언은 소파에 앉았다. 그러자 문득 익숙한 향이 움직이는 공기에 얹혀 밀려들었다. 섬유유연제 향 같은 것. 윤에게서 늘 나는 향이었다. 이 집 안 전체에 그 향의 입자가 배어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정언은 여기가 윤의 공간이라는 것을 불현듯 자각했다.
머그컵 두 개를 들고 돌아온 윤이 두 뼘 정도의 사이를 두고 정언의 곁에 앉았다. 윤이 컵 하나를 정언의 앞으로 밀어 놓았다. 파란색 컵 안에 담긴 건 오렌지 주스였다. 한 모금 마시자 차고 새콤한 감각이 목을 넘어갔다. 짧은 침묵을 먼저 깬 건 윤 쪽이었다.
“선배 오실 줄 알았으면 정리 좀 할 걸 그랬어요.”
“더 정리할 게 있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되묻자 윤이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약간 흐트러진 침구가 놓인 침대만이 이곳에서 거의 유일하게 정돈되지 않은 장소였다. 그건 윤 자신도 아마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정언은 주스를 마시다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