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97
197화.
“이 기자님!”
병원 원무과 앞 로비를 서성이던 남자가 정언의 부름에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이도하 기자였다. 키는 큰 편이었으나, 가는 테 안경과 마른 체구가 예민한 느낌이었다. 도하가 정언을 알아보고는 가볍게 눈으로 인사를 건네며 가까이 다가왔다.
“오셨어요?”
쉽지 않은 인상과는 달리 말투는 부드러웠다. 정언이 네, 하고 대답하자 도하가 윤에게 슬쩍 시선을 주었다. 이도하 기자를 직접 만난 건 처음이었다. 곁에 서 있던 윤은 얼른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정언이 윤을 가리켜 보이며 말을 덧붙였다.
“여기는 저랑 같이 일하는 김윤 피디.”
“아, 그 유명한…….”
도하가 멈칫하더니 말끝을 흐리며 웃었다. 그 유명한, 이라니 도대체 시보국에서 자신에 대해 무슨 얘기가 돌고 있는 건지 윤은 잠시 고민해야만 했다. 그러나 남의 평판이야 어쨌건, 정언은 다급히 도하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혹시 들어갈 수 있나?”
“이원욱이 모텔에 투숙 중이었는데 방에서 칼에 찔린 모양이에요. 간신히 복도로 기어 나온 걸 올라오던 사람이 보고 경찰에 신고했다고 하더라고요. 범인은 도망쳤고, 이원욱은 그 자리에서 모텔 사장이 119 불러서 여기로 이송한 거죠. 출혈이 상당히 많았다는데, 얘기 들어 보니까 출혈에 비해 상처는 심하지 않대요. 일단 수술 들어갔다가 지금 회복실로 옮겼어요. 곧 일반병실로 내려 보낸다고 하더라고요.”
도하의 말을 들은 윤은 저도 모르게 정언을 보았다. 정언 역시 같은 생각을 한 듯 윤과 잠깐 시선을 마주쳤다.
손경일. 손경일이 이원욱을 제거할 거라는 예상이 들어맞은 게 분명했다.
그때 로비로 내려오던 노이섭 팀장이 정언과 윤을 알아보고 깜짝 놀라며 뛰어왔다.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얼굴이 많이 상한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피디님, 여긴 어떻게 오신 겁니까? 제가 아직 연락도 못 드렸는데…….”
“안녕하세요. 이 기자님이 이원욱이 여기로 이송됐다고 연락 주셔서요.”
이섭이 아, 하더니 도하를 보았다. 면도도 제대로 못 한 턱을 문지르며 난처한 표정을 한 이섭은 도하에게 장난 반, 진심 반인 말투로 투덜거렸다.
“아이, 이거 이 기자님 내 편인 줄 알았는데 팔이 안으로 굽네요.”
“저희도 워낙 큰 건이라서요. 죄송합니다, 팀장님.”
도하가 웃으며 사과하는 말을 건넸다. 마음이 급했는지, 초조하게 이섭의 표정을 살피던 정언은 서둘러 그 사이에 끼어들며 물었다.
“이원욱이 일반병실로 옮기면 저희가 만나 볼 수 있나요?”
“이게, 일단 방송이 되면 저희가 좀 곤란하거든요. 손경일이 걸려 있지 않습니까.”
이섭의 말에 정언이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검거 전까지는 절대 먼저 방송 안 하겠습니다.”
“촬영은 좀 곤란할 것 같고요, 상태 보고 의사가 면회 가능하다고 하면 그때 결정하죠. 상황이 이래서, 피디님들이 만나 보시겠다고 하면 일단 상부에 보고하고 허가를 받아야 되거든요.”
그래도 칼같이 거절하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정언이 이섭의 눈치를 살피고는 넌지시 그를 떠보았다.
“얼마나 걸릴까요?”
“조금 전에 의사한테 물어봤는데 한 삼십 분 있다가 일반병실로 옮긴답니다. 우선 상황 보고 연락드릴 테니까, 어디서 커피라도 한잔하고 오시겠습니까?”
도하가 그렇게 해요, 하며 정언에게 지하로 내려가자는 손짓을 했다. 도하의 뒤를 따라 병원 지하의 카페로 들어선 윤과 정언은 도하와 마주 앉았다.
정언이 사양하는데도 괜찮다며 굳이 커피 세 잔을 자기 돈으로 사 들고 돌아온 도하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 정언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도하를 마주 보았다.
“거기는 어느 정도 됐어요? 주민들 전수 조사 진행했어요?”
“네. 입주민 대표들 도움 받아서 설문지 돌리고, 수거해서 바로 시민연대 넘겼어요. 최대한 빨리 결과 달라고 했는데 본사 측에서 눈치는 챈 것 같아요. 관리사무소 쪽에서 얘기 들어간 건지…….”
정언이 그 말에 멈칫하며 물었다.
“서온건설 쪽에서 뭐라고 해요?”
도하는 얼굴을 조금 찡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홍보부라고 그러면서 연락 와서 자기들하고 만나자고 얘기하더라고요. 부장이 만나 보라고 하셔서 다음 주에 일단 약속은 잡았어요.”
천승욱이 직접 방송국까지 찾아와 뇌물을 제시하던 것이 떠올랐다. 정언도 그 기억이 난 것인지, 도하한테 뭔가를 말하려는 듯 잠깐 망설이는 표정을 하다 곧 말을 돌렸다.
“자문단은요?”
“오상근 교수님 연구실하고 상생변에서 도움 주기로 했어요. 법적인 문제 생긴다면 민권당 사반위에서 백업하겠다고 얘기는 됐고요. 황형두 의원님이 우리보고 당신들 YBS 법무팀 믿을 수 있겠냐고 하는데, 뭐 할 말이 없더라고요.”
도하가 씁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 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윤 역시 팀에서 김양운 앵커와 전한동 부장이 뉴스 논조 문제로 크게 싸움이 붙었다는 이야기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
뉴스가 이제 완전히 이사진 입맛대로 굴러가는 거 아니냐며 수군대는 소리가 시사보도국 전체에 퍼질 정도였으니, 당사자인 도하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갔다.
“부장님은 좀 어떠세요?”
정언의 물음에 도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장 성격 아시잖아요. 그러고 나서 그다음 날 와서 우리보고 미안하다고 하시는데, 이게 참…… 진솔이하고 그날 저녁에 술 한 잔 했는데 애가 울었어요. 부장 속 다 안다고, 너무 억울하다고. 내가 그 마음 모르는 것도 아니고, 되게 그랬죠.”
정언이 멈칫하더니 답지 않게 난처한 얼굴을 하며 도하에게 사과했다.
“제가 미안하네요. 애초에 저 아니었으면 부장님이 이거 시작 안 하셨을 텐데.”
도하가 에이, 하며 손을 휘적거렸다.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우리가 이거 안 했다고 그런 일 안 생겼겠어요? 이거 안 한다고 위에서 뉴스 가지고 장난 안 치는 것도 아니고. 서 피디님 탓 절대 아니에요. 우리도 그런 생각 전혀 없어요. 오히려 요즘 같은 때니까 이거라도 해서 다행이다 싶어요. 반격할 기회가 한 번은 있는 거잖아요.”
“말이라도 그렇게 해 주시니까 감사하네요.”
“정말 괜찮아요. 우리가 다른 건 솔직히 다 참는데, 사람들 밑바닥 보는 게 너무 힘들어요. 김양운 선배도 그런 사람인 줄 몰랐다고요. 다 같이 일하던 동료들인데 사람이 저렇게 달라질 수가 있나 싶어서 실망도 하고, 착잡하기도 하고.”
도하가 손끝으로 테이크아웃 컵을 만지작거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담담한 말투였으나, 그 아래 숨겨진 복잡한 심경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정언이 수긍했다.
“그렇죠.”
“그래서 우리 팀에서 부럽다 그 소리 많이 했어요. 적어도 그 팀은 그런 건 없잖아요. 김윤 피디님 새로 오셨어도 좋은 분이고.”
도하가 윤에게 시선을 주었다. 멀거니 앉아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윤은 갑자기 튀어나온 자기 얘기에 화들짝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하가 그런 윤을 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김 피디님 시보국에서 엄청 유명인사예요. 게시판에 글 쓰신 것도 많이들 봤고, 얼마 전에 이사회에서도 고광훈하고 한판 하셨다면서요.”
“그걸 어떻게…….”
저도 모르게 더듬거리는 윤의 얼굴에 도하가 씩 웃었다.
“다들 하루 종일 회사에서 사니까 재밌는 얘기가 뭐 있겠어요. 소문 빠르지.”
본의 아니게 주목받고 있었다는 걸 깨닫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정언이 곁에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짐짓 눈을 가늘게 떴다.
“시보국 온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내성 없어요. 그만 놀리세요.”
쿡쿡거린 도하가 곧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뒀다.
“아, 놀리는 거 아니에요. 정말 부러워서 그래요. 나 요새 진짜 우리 팀 사람들 보면서 몇 년을 같이한 사람들이 그렇게 변하는 거 보고 너무 놀랐거든요. 처음에는 잠도 안 오더라고요. 부장이 나랑 진솔이 불러서 TF 만들자 하시면서, 이 많은 기자들 중에 내가 진짜 의심 안 할 수 있는 게 니들 둘뿐인 게 믿기냐? 딱 그러셨어요. 우리가 처음에는 왜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그랬죠. 그런데 부장이 왜 그랬는지 이제는 너무 잘 알겠어요. 사람들이 너무 순식간에 변해요. 변한 게 아니라 그게 본모습인 건가?”
마지막 말은 자문하는 것처럼 들렸다.
잠시 가만히 도하를 마주 보던 정언이 위로하듯 짧은 말을 건넸다.
“그렇게 생각하면 더 힘들어요.”
“그쵸.”
도하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커피를 몇 모금 마시는 사이 잠시 정적이 지났다. 먼저 그 정적을 깬 쪽은 도하였다.
“아 참, 부장이 최영직 선배 만나 보신 것 같던데, 그쪽에도 혹시 무슨 얘기 있었어요?”
최영직이라는 이름을 듣기 무섭게 정언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정언은 탁자 위를 손끝으로 두드리며 머릿속으로 말을 고르듯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뭐 좀…… 좋게 말하면 타협하자, 까놓고 말하면 그냥 숙이고 들어와라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도하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부장도 만나고 와서 영 기분 안 좋으시던데, 진짜 모르겠어요. 나 입사할 때 최영직 선배 하면 정말 대단했거든요. 내가 기자 생활 이렇게 해도 아직 권력이 뭔지를 모르나 싶어요. 그게 뭐라서 사람들이 그렇게 되는지…… 백선경, 전한동, 서현국, 최영직 그러면 YBS 기자들 자부심이었다고요. 그런데 그 최영직 선배가 그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수십 년을 그렇게 쌓아도 망가지는 건 진짜 한순간이에요. 너무 허무한 거죠.”
답답했던 듯 토로하는 단어들은 묵직했다. 윤은 곁에 앉은 정언에게 슬쩍 눈을 주었다. 정언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탁자 위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후, 하고 짧은 숨을 뱉은 도하가 주머니에서 진동하는 핸드폰을 꺼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전화 좀 받고 올게요.”
“아, 네.”
정언이 대답했다. 도하가 자리를 뜨자 정언은 손을 깍지 끼어 이마에 대며 눈을 감았다. 윤은 곁에서 몸을 숙여 정언을 들여다보았다.
“선배, 괜찮아요? 아직도 머리 아프세요?”
걱정스럽게 묻는 말에 정언은 짧게 대답했다.
“아냐.”
그러나 무슨 일인지 갑자기 기분이 가라앉은 듯했다. 까닭을 묻는다고 해서 대답할 정언이 아닌 걸 알고 있었기에, 손끝으로 탁자 위를 덧그리며 눈치를 살피던 윤은 화제를 돌렸다.
“서현국 기자님이 엄청 대단한 분이었나 봐요.”
“왜?”
정언이 이마에 대고 있던 손을 떼며 윤을 보았다. 윤은 애써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예전에 선배한테 얘기했었잖아요. 저 어릴 때 저희 집에 YBS 기자님 오신 적 있었다고, 그분 때문에 제가 여기 피디 된 거라고요. 그 기자님이 서현국 기자님이었어요. 어릴 때라 사실 그렇게 유명한 분인 거 나중에 알았거든요.”
서현국. 윤은 그 이름을 발음하며 오래된 사진 속의 얼굴과 낡은 명함으로 기억 속에 박제된 젊은 기자를 떠올렸다. 도하가 서현국, 최영직이 YBS 기자들의 자부심이라는 이야기를 꺼낸 바람에 그 이름이 갑작스럽게 머릿속의 서랍을 연 것처럼 튀어나왔던 것이다.
“……그래?”
되물은 정언이 멈칫한 것 같았으나, 착각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윤은 정언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그 얼굴은 언제나처럼 무감하게 돌아간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