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198
198화.
“아직도 계신 건가? 그러고 보니까 얘기 못 들어본 것 같네요.”
윤의 말에 정언이 다시 시선을 내리며 대답했다.
“돌아가신 지 오래됐어.”
“진짜요? 그때 나이 그렇게 많지 않으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만약에 그분 안 돌아가셨으면 최영직 CP님도 안 변했을까요?”
남은 커피를 마신 정언이 나지막하게 내뱉었다.
“글쎄. 가정은 의미 없잖아. 아무리 좋은 선배가 있어도 본인이 따라갈 의지가 없으면 그만이니까.”
“그렇긴 하죠.”
그 말에 동의한 윤은 정언을 가만히 마주 보았다. 평소에도 창백한 얼굴이기는 했지만, 유독 이상하게 갑자기 안색이 나빠진 느낌이었다.
“선배, 진짜 괜찮아요? 얼굴 안 좋아 보여요. 피곤하세요?”
“아냐.”
정언의 대답과 거의 동시에 탁자 위에 놓여 있던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노이섭 팀장’이라는 이름을 본 정언은 거의 낚아채듯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전화 왔다.”
정언은 즉시 통화를 연결했다. 윤은 결국 더 이상 뭐라고 말하지 못하고 그런 정언을 지켜보았다. 전화를 받은 정언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의 업무 모드로 돌아간 채였다.
“네, 팀장님. 병실로 옮겼나요? 네?”
정언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 핸드폰을 고쳐 쥔 정언이 재차 물었다.
“저희 팀이라고 얘기한 거 확실한가요? 아, 알겠습니다. 바로 올라갈게요.”
통화를 종료한 정언의 얼굴은 약간 상기된 채였다.
“이원욱이 불러 달라고 그랬대.”
“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윤은 저도 모르게 커진 목소리로 되물었다가 제풀에 놀라 입을 막았다. 때마침 도하가 부리나케 다시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정언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며 도하에게 말했다.
“기자님, 이원욱이 우리 팀 불러 달라고 얘기했대요. 지금 바로 올라가려고요.”
도하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요? 딱 집어서 말했대요?”
“네.”
“제보해 달라고 나간 거 본 건가? 서 피디님, 혹시 뭐 중요한 얘기 있으면 연락 주시겠어요? 저 지금 진솔이가 급하게 찾아서 그쪽으로 이동해야 될 것 같거든요.”
도하가 시계를 보며 말하자 정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늘 진짜 고마워요.”
“아니에요. 회사에서 봐요.”
도하가 먼저 빠른 걸음으로 카페를 나섰다. 윤이 서둘러 다 마신 컵을 픽업대에 올려놓자, 정언이 빨리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고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시간도 없이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4층 병실까지 한달음에 도착한 정언이 숨을 고르자, 병실 앞을 서성거리던 이섭이 피디님, 하고 정언을 불렀다. 정언을 쫓아간 윤은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며 잠시 몸을 숙였다. 이섭이 복도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정언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이원욱이 다 얘기하겠다고 그러는데요. 제보자 찾는 거 봤답니다.”
“그래요?”
“자기 죽을지도 모른다면서 경찰에 신변보호 요청한다고, 정신 들자마자 불러 달라고 난리가 났어요.”
조창식, 장영관, 김성학처럼 이원욱 역시 제거 대상에 포함된 것이 틀림없었다. 정언은 다시 한 번 숨을 들이쉬고는 닫힌 병실 문을 가리켰다.
“저희 지금 들어가도 됩니까? 촬영 가능한 거죠?”
“잠시만요.”
이섭이 먼저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사이 벽에 기대선 정언이 호흡을 가다듬다 윤에게 시선을 주었다. 윤은 병실 쪽을 흘끔 보고는 마르는 입술을 축였다.
“무슨 생각일까요?”
“손경일한테 당한 거 확실해. 진짜 죽을 것 같으니까 우리한테 제보하겠다고 찾은 거겠지.”
정언이 거의 속삭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잠시 후 병실 문이 열리며 이섭이 고개를 내밀었다.
“피디님, 들어오세요.”
텅 빈 4인실의 창가 자리에 한 남자가 누워 있었다. 며칠 동안 면도도 하지 못한 듯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에, 오른쪽 눈가가 약간 일그러진 인상은 구면이었다. 이원욱. 주렁주렁 달린 링거 팩의 줄은 손등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얼굴을 다친 건지, 왼쪽 뺨에서 귀로 이어지는 곳에는 드레싱이 된 상태였다.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는 원욱에게서 식식대는 숨소리가 났다. 마치 뱀이 내는 듯한 그 소리에, 윤은 어쩐지 등줄기가 서늘해져 입술 끝을 눌러 물었다.
“김 피디, 세팅.”
정언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윤이 얼른 촬영 준비를 시작하는 사이, 정언이 원욱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를 내려다보았다.
“이원욱 씨 맞습니까?”
원욱이 누운 채 눈을 치켜떴다. 흰자가 더 많은 눈이 희번덕거렸다. 혈색이 나빠 거의 푸른빛에 가까운 안색 탓인지, 그 얼굴은 기억보다도 더 소름 끼쳤다.
정언은 곁에 의자를 끌어다 앉으며 가방에서 다이어리를 꺼내 펼쳤다. 윤은 카메라의 초점을 원욱에게 맞추고는 마른침을 한 번 삼켰다.
“저 기억하십니까? 의정부 사무실에서 한 번 뵈었는데요. 피디 서정언입니다.”
정언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원욱은 시선을 돌려 정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곧 기억이 났는지, 원욱이 하얗게 들뜬 입술을 혀로 축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아, 네.”
“저희 제보 요청 나간 거 보셨다고요. 김성학 씨하고 장영관 씨 사건에 대해 말씀하시겠다는 겁니까?”
정언이 묻자 원욱이 심하게 기침을 했다. 쿨럭거리는 소리가 병실에 울렸다. 쌕쌕 숨을 몰아쉬던 원욱이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가 다 얘기합니다. 전부, 전부 다 얘기할 수 있어요. 아는 거 다 말하겠습니다. 이거 싹 손경일 사장이 시킨 거예요. 처음에 박규형, 박 과장 죽인 것도 손경일 사장 지시였고, 그거 창식이 형이 한 거라고요.”
그 말에 곁에 서 있던 이섭의 표정이 달라졌다. 정언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원욱에게 재차 물었다.
“조창식 씨가 박규형 과장님을 죽였다고요? 증거가 있습니까?”
원욱이 목이 마른 듯 입맛을 다셨다. 곁에 서 있던 간호사가 얼른 물에 적신 거즈를 물려주자, 원욱은 힘없이 거즈를 몇 번 빨고는 뱉어 냈다. 새는 듯한 발음이 갈라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그게, 창식이 형이 우리한테 얘기를 했어요. 사장이 박규형 죽이라고 했다. 그래서 자기가, 형이 그때 우리한테 물어봤다고요. 티 안 나게 죽이라는데 어떻게 하면 티가 안 날까. 그래서 우리가 방법을 여러 가지 생각했거든요. 우리가 쓰는 방법이 있으니까. 원래는 그냥 없애고 어디 묻거나 바다에 버리거나 하는 거, 그게 제일 간단하다고요.”
“버린다고요?”
정언이 되묻자 원욱이 천천히 말했다.
“방파제, 방파제 삼발이.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그게 사이가 커요. 틈이 넓다고요. 거기 빠지면 바로 못 찾는다고. 그냥 바다 한가운데 던져 버리면 그게 밀물 썰물 왔다 갔다 하면서 거의 해변으로 옵니다. 그러니까 삼발이 틈새 있잖아요. 죽여서 그냥 시체를 그 안으로 쭉 밀어 넣고, 그러면 안에 걸리면서 시체가 잘 안 떠내려가요. 틈이 깊으니까 보이지도 않고, 찾기가 힘들다고. 떨어지면서 뼈가 막 여기저기 부러지니까 사고사로 처리하기도 쉽고.”
윤은 귀를 의심했다. 끔찍한 말을 하는 원욱의 표정이 지나치게 담담한 탓이었다. 흰자가 많은 원욱의 눈이 천장을 응시했다. 초점이 흐린 눈은 어디를 응시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숨소리가 절반쯤 섞인 그 목소리는 현실감이 희박했다.
“아무튼 원래는 그런 거 생각했는데, 박 과장이 가족이 있고 바다까지 가면 장소가 너무 이상하니까. 가족이라면 껌뻑 죽는 사람이야. 그걸 우리가 알았다고요. 하루만 없어져도 난리가 난다. 바다에 버리면 발견되는 데 시간이 걸리고, 그러니까 그냥 자살처럼 위장하자. 차 안에 태우고 번개탄 피우는 거…… 그것도 우리가 예전에 몇 번 했어요.”
이건 사실상 살인 자백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상황만 아니라면 당연히 교도소에 있어야 할 사람과 한 공간에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헐떡이며 숨을 고른 원욱이 킬킬 웃었다.
“근데 이렇게 하려면 술에 수면제 타서 먹이거나 그래야지, 안 그러면 힘들다고. 정신이 있으면, 그러면 차 밖으로 나오려고 하니까. 이건 나중에 시체 조사하면 걸리거든요. 뒤처리가, 골치가 아파요. 위에서 안 좋아하지. 박규형이 술도 잘 안 마시고 그러는 사람이라. 그러니까 막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창식이 형이 그냥 현장에서 떨어져 죽은 걸로 하자, 그런 거죠.”
힘이 드는지 원욱은 사이사이 말을 멈췄다가 이어 가기를 반복했다.
카메라를 잡은 손이 떨렸다.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한 집안의 가장을 어떻게 하면 쉽게 죽일 수 있을지 생각했다는 그 말에서 죄책감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정언이 겉으로나마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 놀라울 정도였다.
정언이 다이어리에 연신 메모를 하며 재차 질문을 던졌다.
“박규형 씨 사망 현장에 다른 사람들이 있었습니까?”
원욱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니. 없었어요. 형이 언제 박규형 죽였는지, 우리는 나중에 안 겁니다. 사장이 다이렉트로 오더를 내린 거니까. 창식이 형이 오른팔이니까, 그런 게 많았다고요. 박규형이 뭐 그렇게 중요하고, 그런 것도 나중에 알았지. 그냥 하도 말 안 들으니까 죽인 줄 알았거든. 말을 진짜 안 들었어. 본사에서, 자재 문제…… 그런 걸로 많이 싸웠다고. 그 오래전에, 이름이 뭐더라. 형이 비슷하게 사람 하나 죽인 적 있었다고요. 그것도 본사 과장이었는데, 이, 이, 뭐였는데. 산에서 사람을 떠밀어서.”
그 말에 정언이 되물었다.
“이훈주 씨 말씀하시는 겁니까?”
원욱이 몇 번 콜록거리더니 기억을 더듬는 듯 눈을 굴렸다. 색색대는 숨을 뱉던 원욱이 고개를 힘겹게 주억거렸다.
“예, 뭐 그런 이름이었던 거 같아요. 그것도 그때 자살이라고, 아마 그렇게 처리됐을 거예요. 창식이 형이 그거 전문으로 그렇게 일을 했어요. 사람 언제 죽이고, 어떻게 죽이고, 이런 거. 사장하고 창식이 형이 다이렉트로. 사장도 위에서 오더를 받고. 뭐 서온건설이나, 국회의원 누구. 이런 데서.”
“국회의원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