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
2화.
자리에 앉은 윤은 애써 잡생각을 지우려 노력했다. 태훈의 일은 일단 만나서 해결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고 나니 걱정되는 건 접촉 사고였다. 언제 전화가 올까, 뭐라고 할까 싶어 온 신경이 다 거기로 기울어졌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퇴근 시간이 다 되도록 아무 연락이 없었다. 무척 바쁜 사람 같았는데, 막상 보니 별문제가 없어 시간 낭비하지 말자고 생각한 게 아닐까. 제멋대로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마음이 편해졌다.
내내 신경을 쓰고 있던 터라 두통이 올 지경이었다. 일단 지금은 코앞에 닥친 태훈의 일이 더 문제였다. 여섯 시 정각이 된 걸 확인한 윤은 바로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김 피디. 일찍 퇴근하네?”
언제 퇴근하나 주시하고 있었는지, 바로 저만치서 최진수 부장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윤이 네, 하고 대답하기 무섭게 진수가 장난스럽게 삿대질을 했다.
“야, 인마. 최소한 5분은 기다렸다 가라.”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뼈 있는 농담처럼 들리기는 했지만 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5분 더 남아 있다고 뭐 대단한 일을 할 것도 아니었다. 진수가 파티션 위로 얼른 가라며 손을 휘적거렸다.
윤은 2년 차였다. 그 정도면 진수가 마이페이스인 윤의 성격을 파악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뭐라고 눈치를 줘 봐야 씨도 안 먹히는 데다 딱히 그 정도로 바쁜 팀도 아니었다. 진수가 눈치 주는 걸 진작부터 포기한 건 당연했다.
윤은 사무실을 나서며 문에 붙어 있는 프로그램 로고를 돌아보았다.
.
는 YBS에서 와 에 이은 세 번째 장수 프로그램이었다. 방송국에서는 있을 수 없다는 칼퇴근과 무야근을 자랑하는 팀이기도 했다. 모든 피디들의 꿈이자 희망이라는 생활은 야망 없는 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최적이었다.
늘 느릿느릿 굴러가는 팀이었다. 좋게 말하면 항상 변함없고, 나쁘게 말하면 발전이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윤은 그런 분위기가 싫지 않았다.
애초에 윤의 목표는 가늘고 길게 사는 것이었다. 남 앞에 나서서 주목을 받는다거나, 어딘가에 이름이 오르내리고 남들이 자기를 알아보는 일 따위는 천성이 아니었다.
예전에 진수가 회식 중에 옮기고 싶은 프로그램이 있냐고 물었을 때, 윤은 주저 없이 와 을 꼽았다. 둘 다 와 별반 다를 바 없는 프로그램이었다. 오래됐고, 변함없고, 느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 분명한.
진수는 그런 윤을 이해하지 못했다. 명문대 출신에 대기업 입사 경력, 입사하자마자 교양국의 핫 토픽이 된 비주얼까지 가지고 왜 그렇게 적당히 사느냐는 것이었다. 남자가 돼서 너처럼 야망이 없으면 쓰겠냐는 비난은 덤이었다.
그러나 윤은 살면서 야망이라는 것을 가져 본 적이 없는 인간이었다. 대기업에서 이직한 것도 승진만을 위해 달리는 쳇바퀴 같은 생활이 지겨워서였다. 야망 없는 몹쓸 놈 같은 소리는 윤에게 전혀 타격감이 없는 평가였다.
느긋하게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온 윤은 태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서너 번 간 뒤 건너편에서 통화가 연결되는 소리가 났다. 윤은 운전석에 앉으며 태훈에게 물었다.
“나 지금 퇴근. 어디야?”
『나 호수네 와 있어.』
윤은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했다. 정시 퇴근이었기에 당연히 태훈이 늦을 거라 생각하고 던진 질문이었다. 아직 여섯 시 십 분도 되기 전이었다.
“벌써?”
『외근하고 들어가는 길이라 그냥 먼저 왔어.』
넘어온 목소리는 이미 약간 취한 것 같았다. 윤은 잠시 귀에서 핸드폰을 떼고 다시 한 번 액정을 보았다. 오태훈. 선명한 세 글자의 이름은 분명 익숙한 것이었으나, 어쩐지 평소와는 다르게 느껴졌다. 태훈은 절대 초저녁부터 이렇게 취해 있을 타입이 아니었다.
“너 무슨 일 있냐?”
아침에 느꼈던 그 묘한 감각이 되살아났다.
『일은 뭐. 닭볶음탕 하나 시켜 놨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그러나 그것이 도리어 신경을 약간 잡아당겼다.
“금방 갈게.”
윤은 서둘러 말했다. 대답 대신 전화가 끊어졌다. 얘가 왜 이러지,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린 윤은 바로 액셀을 밟았다.
금요일 퇴근길 지옥이 시작되기 직전의 도로를 달려 오피스텔 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고 나왔을 때는 아직 삼십 분도 지나지 않은 채였다.
호수네 문을 밀고 들어서자, 벌써 좁은 가게 안은 거의 만석이었다.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건넨 윤은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구석에 앉아 혼자 소주잔을 기울이는 태훈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가스버너 위에서 닭볶음탕은 이미 팔팔 끓고 있었다. 그러나 태훈은 술 외의 무엇에도 젓가락 하나 대지 않은 듯했다.
“어우, 청승. 뭐야, 혼자서. 그새를 못 참냐.”
맞은편에 걸터앉은 윤이 툭 내뱉자 태훈이 말없이 씩 웃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몇 달 못 본 사이 살이 확 빠진 느낌이었다. 태훈은 워낙 덩치가 좋아, 처음 만난 사람들은 다들 체대생으로 짐작할 정도였다. 그 골격이 어디 갈 리 없었지만 얼굴이 반쪽이었다.
방송국 생활이라는 것이 워낙 불규칙하다 보니 몸 상하는 건 일상다반사였다. 그러나 태훈은 벌써 5년 차에 접어들고 있었다. 살이 빠지려면 그사이에 빠졌지, 여태 멀쩡하다 갑자기 이런다는 건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윤은 자기 앞에 놓인 잔에 소주를 따르고는 버너의 불을 줄였다. 병은 이미 절반이 넘게 비어 있었다.
“같은 건물에 있어도 얼굴 한 번 보기 어렵네. 어떻게 지냈어?”
넌지시 떠보는 말에 태훈은 대답 대신 잔을 들어 보였다. 잔 끝을 건성으로 부딪친 윤은 한 모금 홀짝이자마자 잔을 내려놓았다. 소주 반병이 치사량인 윤은 평소에 거의 술을 마시지 않았다. 싸한 알코올의 맛이 목으로 넘어갔다. 혀 위에서 감미료의 흔적이 선명하게 맴돌았다.
잠시 침묵이 지났다. 작은 식당 안에서 다른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며, 틀어 놓은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저녁 정보 프로그램 MC들의 목소리가 시끄러웠다. 이 테이블만 다른 세상인 것 같았다.
물끄러미 윤을 마주 보던 태훈이 되물었다.
“너는?”
“나야 뭐 맨날 그렇지.”
윤은 여상하게 대답했다. 그게 사실이기도 했다. 태훈은 맨날 그러냐, 하고 윤의 대답을 되풀이하며 중얼거렸다. 잠깐 웃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으나 그건 곧 지워졌다.
“나 회사 옮길까 생각 중이야.”
빈 잔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던 태훈이 말했다. 잠시 귀를 의심한 윤은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사람들을 한 번 돌아보았다. 너무 시끄러워서 잘못 들은 건가 싶어서였다.
윤은 다시 태훈을 마주 보았다.
“너 회사 옮긴다고 그랬어? 내가 뭐 잘못 들었냐, 지금?”
태훈이 쓰게 웃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맞아.”
“왜?”
진심으로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이건 오태훈이었다. 태훈이 그럴 리 없었다.
태훈은 대학 다닐 때부터 쭉 다큐멘터리 피디가 꿈이었다. 방학마다 방송국 아르바이트 자리를 쫓아다녔고, 남들이 아무리 힘든 일이라고 말려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입사하면 환상이 깨지겠거니 했지만 태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힘들어도 보람이 있다고 항상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실제로 태훈이 입봉 뒤 찍은 다큐멘터리 중 화제가 된 것도 여러 편이었다. 다큐멘터리 시상식에 노미네이트된 작품도 있었다. 누가 봐도 오태훈에게 다큐멘터리 피디는 천직이었다.
YBS의 구성원 대부분이 그랬지만, 태훈은 회사에 대한 자부심과 애사심도 대단했다. 윤이 매번 속으로 저거 정년 될 때까지 오지 탐험 다니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하고 속으로 걱정 아닌 걱정을 할 정도였다.
게다가 YBS는 다른 방송사에 비해 다큐멘터리 제작에 투자를 많이 하는 편이었다. 어디를 가도 태훈이 지금만큼 만족하며 일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태훈을 응시했다.
“너 이사진 바뀐 거 알지?”
태훈이 빈 잔을 채우며 물었다. 갑자기 이사진 얘기는 또 뭔가 싶었으나, 윤은 일단 고개를 주억거렸다.
YBS의 대주주인 정부 산하의 비영리법인 바른언론진흥회는 회사의 경영 관리 감독과 자금 운용 등을 감시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공공방송의 공영성을 견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구성된 경영 형태였다.
그런 시스템은 이미 수십 년간 유지된 것이었다. 독재 시절이라면 모를까, 윤이 아는 한 2000년대 이후로는 바언진 이사들로 인한 문제가 발생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작년에 갑자기 이사진들이 친정부 성향의 여당 인사들로 대거 교체된 후 이상한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노조의 어떤 항의에도 이사진은 오로지 ‘교체는 우연의 일치이며, 이사는 YBS 경영진 및 국회 방통위의 추천을 받아 결정된다.’, ‘구성원들이 걱정하는 어떤 외압도 없다.’라는 답변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윤은 출근하면서 봤던 시위대를 떠올렸다. 정말 이사진에 문제가 없다면 그런 일이 벌어질 리 없었다. 하지만 윤은 시류에 전혀 민감하지 않은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었다. 윤에게는 이사진들의 스탠스가 문제가 될 이유가 없었고, 때문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긴 한숨을 뱉은 태훈이 이마 부근을 긁적였다.
“이사진 바뀌고 나서 작년부터 시보국 분위기 개판인 건 들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