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0
20화.
“야, 어쩌다가…….”
태훈이 말끝을 흐렸다. 아까보다 더 미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해진 얼굴이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윤은 미간을 좁혔다.
“뭐가 어쩌다가야.”
“너 피디들끼리 우리 중에 사장님 멱살도 잡을 성질머리 딱 둘이라고 그러는데, 그게 누군지 아냐?”
“누군데?”
“하나는 강재희, 하나는 서정언.”
이럴 땐 뭐라고 해야 될까. 아니, 그 정도까진 아닌 거 같은데……라고 반박하고 싶었으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태훈이 심각해진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게 한 삼사 년 전인가, 에서 강재희 선배가 친일파 국회의원 후손 재산 환수 건 방송했다가 명훼 걸려서 재판 갔단 말이야. 거기 서정언 선배가 증인으로 나가서 국회의원 개망신 준 거 몰라?”
처음 듣는 얘기였다. 남 얘기에 그다지 관심 없이 살아오기도 했거니와, 설령 들었다 한들 팀에서는 하등 필요 없는 정보였기에 순식간에 잊어버렸을 게 뻔했다. 반쯤 얼이 빠진 윤의 얼굴을 보던 태훈이 한숨을 쉬었다.
“한국선진당 홍현남 알지? 맨날 막말해서 뉴스 나오던 인간 있잖아. 홍현남이 진성 친일파 자손이라 방송 나가고 난리가 났단 말이야. 그런데 서정언 선배가 증인으로 나와서 홍현남보고 친일파 후손으로 잘 먹고 잘 살던 주제에 뭐가 억울한지 모르겠다, 방송한 것 중에 사실 아닌 게 하나라도 있으면 허위 사실 유포로 고소해라, 이러고 대든 거지. 강재희 선배 국민참여재판 신청해서 승소하고 저번 총선에서 홍현남 나가리 됐다고.”
“……진짜?”
그러고 보니 작년 총선에서 이변이라며 다룬 걸 본 기억이 났다. 친일파 논란 어쩌고 했는데, 그게 재희와 정언의 작품이라니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태훈이 혀를 찼다.
“폐지하면 뒤집어질 거 뻔히 알면서 위에서 왜 죽이려고 하는데. 홍현남 자기 아버지 텃밭 세습해서 4선 해먹은 양반이야. 그 양반 대가리도 그렇게 날아가는데 뭐는 못 날리냐. 하고 가 공조가 잘돼 있다고. 켕기는 거 있는 놈들은 양쪽에서 때리면 백이면 백 다 킬 따여. 보는 눈 많아, 돈도 안 먹어, 겁대가리도 없어. 걔들이 그걸 어떻게 다루겠어. 그냥 폐지하는 게 답이지.”
상사한테 적당히 까불어 본 적은 있었어도 법정에서 국회의원에게 삿대질을 한다는 건 꿈에서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매우 복잡하고 미묘해진 윤의 얼굴을 빤히 보던 태훈이 하하, 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한 반 년 있다 보면 너도 간 내놓고 다닐 수도 있지.”
반 년 있다 간을 내놓는 게 문제가 아니라 지금 간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아무래도 자기가 말실수를 한 것 같다는 걸 깨달았는지, 태훈이 곧바로 말을 돌렸다.
“근데 뭐 취재하려고? 뭔데 서울 전체를 다 돌았는데?”
그러나 윤은 이미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을 절감한 뒤였다. 한숨을 쉰 윤은 힘없이 대답했다.
“진송신도시 건설 현장에서 서온건설 현장 과장이 자살했는데, 부인이 자살일 리 없다고 제보 넣었거든. 건축 중인 아파트에서 뛰어내렸다는데, 뭐 유서도 없고 자살할 이유가 전혀 없대. 그래서 제보자 만나고, 의정부경찰서 담당 형사 만나고, 서울과학수사연구소 부검의 보러 갔다가 서온건설 인사과도 찾아가고 그랬지.”
“진송신도시? 서온건설 현장 과장이라고?”
태훈이 되물었다. 윤이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태훈이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눈을 굴리다 자기 핸드폰을 꺼냈다. 갤러리를 열어 사진을 한참 내려 보던 태훈이 윤 쪽으로 핸드폰을 내밀었다.
“혹시 이 사람이야?”
윤은 몸을 약간 기울여 태훈의 핸드폰을 보았다. 낡은 명함을 찍어 놓은 사진이었다. 서온건설 현장 과장 박규형이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놀란 윤은 태훈을 마주 보았다.
“어, 맞아. 너 이거 뭐냐?”
“이 사람이 죽었어?”
태훈이 대답 대신 도저히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윤은 태훈의 핸드폰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분명 박규형의 명함이었다. 진송신도시 건설현장에 같은 회사, 직급의 동명이인이 있을 확률은 거의 전무했다.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태훈이 말했다.
“나 진송신도시 취재했잖아. 다큐 엎어진 거.”
그러고 보니 태훈이 찍고 있던 다큐가 진송신도시 개발 지역 원주민 다큐였다는 것이 떠올랐다. 윤이 어, 하며 놀란 표정을 하자 태훈이 핸드폰을 가리켰다.
“그때 이 사람 만났어.”
“만났다고?”
뜻밖의 말에 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태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키 좀 크고 얼굴 둥그렇고, 그 사람 맞지? 그때 자기 명함이 다 떨어졌다고, 이거 딱 한 장밖에 없어서 죄송한데 사진으로 찍으시면 안 되냐고 하길래 찍었었어. 어차피 나 명함 다 찍어서 앱으로 관리하니까.”
“왜 만났는데? 너 뭐 기억나는 거 있어?”
윤은 저도 모르게 태훈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태훈이 흠, 하고 한참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취재 과정에서 회사 입장은 어떤지 한 번 알아보려고 섭외했었지. 보통 그런 거 찍겠다고 하면 싫어한단 말이야. 회사가 악역이 되잖아. 근데 이 사람은 되게 협조적이어서 기억이 나거든. 주민 대표 말로 충돌 있을 때 사측에서 주로 박규형 과장이 나왔었다고 얘기하더라고.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치고 성격이 확실히 많이 유했던 거 같고…….”
“다른 직원들하고도 괜찮았대?”
“음, 잘은 모르는데 현장 인부들한테도 평이 좋았을걸. 뭐 회사 쪽에서는 싫어했을 수도 있겠네. 자기도 진송신도시 개발 과정에 문제가 있는 건 인정한다는 식으로 얘기했었거든. 오프더레코드 해 달라고 해서 어차피 방송됐어도 쓰지는 않았겠지만.”
윤은 태훈의 말을 곱씹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문제가 있는 거 인정한다고 했다고?”
“진송신도시 부지 선정하고 개발할 때 윗선에서 투기 목적으로 개입했다는 얘기 있었잖아. 검찰에서는 무혐의라고 하긴 했는데, 뭐 이 사람도 확실히 그렇다고 얘기한 건 아니고 우리도 프로 성격상 그런 쪽은 아니라서 자세히 묻진 않았지. 신도시 개발 과정에 그런 거 없는 데 없다고 하고, 우리는 어차피 주민들 그림만 딸 생각이었으니까.”
몸이 피곤한 탓인지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도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세를 고쳐 앉은 윤은 태훈을 마주 보았다.
“너 혹시 취재한 자료하고 촬영 파일 같은 거 아직 다 가지고 있어?”
“응.”
“그거 나 좀 보여 주면 안 돼?”
“그래, 뭐 어려운 거 아닌데.”
태훈은 흔쾌히 대답했다. 윤은 잠시 빈 테이블 위에 시선을 둔 채 생각에 잠겼다. 하루 종일 정언과 돌아다니며 들었던 이야기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의정부경찰서의 담당 형사는 유서도 없고 동기도 없는 자살이 이상하다는 건 인정했다. 그러나 자살이 아니라고 볼 이유도 없다고 말했다.
경찰의 말대로, 타살을 확신할 만한 다른 증거가 부족했다. CCTV나 블랙박스 영상도 존재하지 않았다. 현장의 CCTV는 사건 전부터 고장 나 있었고, 업체에서 수리가 늦어진 탓에 사건 전후로 녹화된 영상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서울과학수사연구소의 담당 부검의는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며 말을 아꼈다. 부검의에게서 얻어 낸 정보는 외견상으로는 모든 부분이 추락사의 소견과 일치한다는 것뿐이었다. 규형을 이송했던 119 대원의 증언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온건설 인사과의 담당자는 규형이 현장 업무에 잘 적응하지 못했고, 과도한 초과 업무로 계속해서 힘들어했다는 이야기만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할 뿐이었다.
하루 종일 만났던 사람들을 떠올리던 윤은 문득 정언을 생각했다. 돌아오는 길에 정언은 거의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서온건설 본사까지 들렀다가 방송국으로 돌아와 근처 백반집에서 저녁을 사 주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였다. 계산을 하자마자 바로 퇴근해, 하더니 인사도 듣지 않고 가 버렸던 것이다. 아이템이 될 것 같다고 생각해서인지, 혹은 그 반대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태훈은 잠깐 멍하니 상념에 빠진 윤을 신기하다는 듯 마주 보았다.
“근데 너 진짜 의외로 거기가 체질에 맞나 보다. 나한테 그런 소릴 다 하고.”
“내가?”
되물은 윤은 문득 뜨끔해졌다. 사실 자신은 빈말로라도 그리 열정적인 피디라고는 할 수 없었다. 이 직업이 싫은 건 아니었지만 그건 아마 가 느긋한 팀인 까닭도 있었을 터였다.
매주 루틴한 일과를 반복하며 더한 것도 덜할 것도 없는 결과물을 내보내는 것이 자신의 일상이었다. 윤은 그런 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고, 정해진 일을 하며, 정해진 시간에 퇴근하는. 거기에 열정이라는 말이 끼어들 여지는 그다지 없었다.
진수가 항상 너는 열정이 없어, 젊은 애가 의욕이 없냐, 하고 다그치던 것이 떠올라 윤은 저도 모르게 바람 빠지는 소리로 웃었다. 그게 이상했는지 태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웃냐, 갑자기.”
“이제 좀 열정적으로 살아 보려고.”
농담 반, 진심 반으로 대꾸하자 태훈이 팔짱을 끼며 윤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 열정 얼마나 가나 보자. 서정언 선배 밑에서 세 달 버틴 부사수가 딱 두 명이라던데.”
“와, 그럼 내가 세 번째겠네.”
역시 모르는 게 약이었다. 애써 과장된 동작으로 기쁨을 표출하는 윤을 본 태훈이 윤의 이마를 찰싹 때렸다.
“너 하는 꼴 보니까 죄책감 안 가져도 되겠다. 전보됐대서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냐?”
“너나 걱정해, 너나. 회사 진짜 옮길 거야?”
빨개진 이마를 문지르며 묻자 태훈이 멋쩍은 듯 웃었다.
“가긴 어딜 가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있어 보는 거지, 뭐. 옮긴다고 나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겠냐. 끝까지 버텨 보고 그래도 안 되면 그때 가서 생각해야지.”
태훈이 뒷머리를 긁적이다 몸을 일으켰다. 윤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태훈을 쳐다보았다.
“가려고?”
“진짜 걱정돼서 얼굴이나 보려고 왔어. 아까 낮에 시보국 지나가면서 슬쩍 물어보니까 너 외근 나갔다고 그래서. 잘 지내는 시늉이라도 해 줘서 좋네.”
“시늉 아니라고, 자식아.”
발끈하는 윤을 본 태훈이 손을 내저었다.
“알았으니까 세 달 있다가 다시 얘기하자고. 너 거기서 안 도망가면 그때.”
야 너, 하고 윤이 벌떡 일어나려는 척을 하자 태훈이 얼른 윤을 도로 눌러 앉혔다. 잠시 머뭇거리던 태훈이 열없이 웃었다.
“나 사실 진짜 고민 많이 했었어. 근데 너 때문에 정신 들었다. 고마워. 이 소리 하러 왔어. 얼굴 봤으니까 간다. 나 내일 새벽에 출근하니까 아무 때나 연락해. 부탁한 거 찾아 놓을게.”
“뭐야, 민망하게. 고마울 일 그렇게 없냐?”
“그러게. 살다 보니 고마운 일이 이렇게 없다.”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 넘긴 태훈이 나오지 마, 하고 팔을 휘적대고는 가방을 둘러메며 현관을 나갔다. 문이 닫히며 도어록이 잠겼다. 긴 숨을 뱉은 윤은 소파에 풀썩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마구 뒤엉킨 리본처럼 머릿속의 매듭이 복잡하게 얽혔다.
아이고 모르겠다, 하고 중얼거린 윤은 눈을 감았다. 몸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이대로 잠이 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