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02
202화.
영직이 내뱉었다. 순수한 호의. 지금 이 자리와 그만큼 어울리지 않는 말이 또 있을까 생각하자 입이 썼다. 어떤 의미로서의 호의라는 건지 쉽게 판단할 수 없었다. 그 말은 한때나마 자신들과 같은 위치에서, 같은 지향점을 가졌던 사람으로서의 호의라고 생각하기에는 지나치게 냉소적이었다.
“위기에 몰렸을 때 밑바닥을 안 드러내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확신해? 이까짓 회사 때려치우면 된다, 사표 내겠다, 그렇게 생각하지? 맞는 말이야.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되지. 그런데 회사가 가만히 있겠어? 이게 문제야. 본인이 똑똑한 건 좋은데, 윗대가리들이 본인 생각만큼 멍청하지가 않다고.”
재희는 눈썹을 좁혔다. 매번 이런 식으로 팀원들을 걸고넘어지는 건, 그게 자신에게 가장 약한 부분임을 알기 때문일 터였다. 강재희가 가진 단 한 가지,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유일한 것. 영직의 속을 꿰뚫는 듯한 눈빛이 감정의 발화점 부근을 건드렸다.
“만약 제작진들이 사표 내고 단체 행동 들어간다면 회사는 바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 시작할 거야. 프로그램 유지안 이미 제시했는데 안 들은 건 그쪽이니까. 본인은 지킬 거 없으니 용감하겠지만 다른 사람들도 그럴까? 부인 있고 자식 있는 사람들도 그렇겠냐고. 안 그래? 개인들이 회사 상대로 소송 걸려서 어디까지 갈 수 있겠어?”
“모든 책임은 제가 집니다. 팀원들 끌어들이지 마십시오.”
재희는 즉각 영직의 말을 끊었다. 머릿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이 자리에서 이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평소보다 훨씬 많은 인내심이 필요했다.
“아직도 협박이 아니라고 말씀하실 겁니까?”
짓씹듯 내뱉은 재희의 말에 영직이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어디까지나 제안이야. 잘 생각해 봐. 시간은 충분하니까.”
제안이라는 단어로 덮어 버리기에는 그 의도가 너무나 선명했다. 재희가 대답 대신 영직을 날카롭게 응시하자 영직이 손에 들고 있던 스틱의 전원을 켜고는 그것을 입에 물었다. 내뱉는 숨에 멘톨 향이 희미하게 어린 수증기가 흩어졌다.
영직이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그만 나가 봐. 성질 좀 죽이고. 연차 그 정도 됐으면 눈 똑바로 뜰 데 안 뜰 데는 구분해야지. 뭐, 또 그게 강 피디 인기 많은 이유라고는 하더라만. 생각 잘 해 보고 마음 바뀌면 언제든 찾아오라고.”
자리에서 일어난 재희는 인사조차 하지 않고 CP실을 나섰다. 등 뒤에서 묵직한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긴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그 위로 끝없이 쏟아지는 형광등의 빛에 숨이 막혔다.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던 재희는 긴 한숨을 뱉었다.
재희가 향한 곳은 사무실이 아닌 옥상이었다. 텅 빈 옥상 정원의 문을 열고 들어서 벤치에 걸터앉자 멀리서 희미한 도시의 소음들이 떠돌았다. 고개를 뒤로 젖힌 재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흐린 하늘이 쏟아질 것처럼 가까웠다.
눈을 감고 한동안 그대로 앉아 있던 재희는 문득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여기까지 굳이 올라오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무심코 그쪽으로 시선을 준 재희의 눈에 들어온 건 익숙한 실루엣이었다. 상대도 재희를 알아보고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윤이었다.
“어, 김 피디. 웬일이야? 취재 끝났어?”
누가 있을 줄 몰랐는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윤이 주저하며 대답했다.
“아, 네. 그냥 좀 답답해서…… 죄송합니다. 계신 줄 몰랐어요.”
윤이 얼른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돌아섰다. 그 뒷모습에 잠시 눈을 둔 재희는 윤을 불렀다.
“김 피디.”
재희는 멈칫하며 돌아본 윤에게 자기 옆자리를 가리켰다.
“앉아. 옥상이 내 것도 아닌데 뭐. 커피나 한잔할까?”
잠시 망설이던 윤은 재희가 가리킨 자리에 앉았다. 그사이 자판기에서 커피를 두 잔 뽑아 돌아온 재희는 한 잔을 윤에게 건넸다.
“이원욱 만나러 갔었다며. 어땠어? 뭐 좀 건질 거 있었나?”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두 손으로 종이컵을 감싸 쥔 윤이 시선을 내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박규형 과장하고 조창식 죽인 거 다 손경일이 시켰다고 얘기하던데요. 장영관하고 김성학 죽인 것도 손경일이라고 하고. 선배 집 털었던 거, 이희경 씨 애들한테 전화했던 거, 제 차 망가뜨린 것도 본인이라고 다 시인했고요.”
“그걸 자기 입으로 다 불었다고?”
재희가 놀란 표정으로 묻자 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경일한테 칼 맞고 실려 왔대요. 자기가 여기서 살아서 나가면 죽을 거 확실하다고, 방송에 모자이크 처리 필요 없으니까 얼굴 다 내보내 달라고 애원하더라고요.”
간혹 있는 일이기는 했다. 특히 이런 경우라면 아예 얼굴과 신원을 공개하는 편이 표적이 되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이원욱도 그걸 잘 알기에, 차라리 구속되더라도 방송에 제보하는 쪽을 택했을 게 뻔했다.
“안됐네. 범죄자라 자기가 공개하고 싶어도 우리가 공개할 수가 없는데.”
재희가 혀를 차며 농담 같지 않은 농담을 중얼거리는 사이, 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종이컵 안을 그저 물끄러미 들여다보고만 있었다. 곁에서 커피를 몇 모금 홀짝이던 재희는 툭 뱉듯 물었다.
“많이 힘들어?”
그 말에 윤이 퍼뜩 놀라며 재희를 쳐다보았다. 재희는 짐짓 그 시선을 외면하며 옥상 난간 너머 멀리로 시선을 주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윤이 입을 열었다.
“사명감은 타고나는 겁니까?”
뜻밖의 질문이었다. 하하, 하고 웃는 소리를 낸 재희는 되물었다.
“그렇다고 생각해?”
“잘 모르겠습니다.”
윤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언 때문이라는 건 묻지 않아도 당연했다. 서정언이 좀 대단하긴 하지, 하고 속으로 생각한 재희는 벤치에 등을 기댔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네. 봤으니까 알겠지만 다들 평범한 사람들이야. 나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우리가 더 엄청나게 정의롭고 그런 건 아니잖아.”
“그럼 대체 뭐가 선배들을 그렇게 움직입니까?”
윤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재희를 마주 보았다.
“본인은 왜 하는데? 그냥 이 팀에 왔으니까?”
그 물음에 윤이 머뭇거렸다. 그 얼굴을 빤히 보던 재희는 미소를 지었다.
“이유도 중요하겠지만 결과도 중요하다고. 나라고 뭐 대단히 엄청난 이유로 그러는 거 아냐. 처음엔 좋아하는 여자한테 멋있게 보이려고 더 목숨 걸고 했거든.”
윤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장난스럽게 뱉은 말이었으나 연수의 얼굴이 떠오른 건 필연적이었다. 뺨을 만지던 손길, 너 멋있다, 하고 웃던 목소리, 아무것도 숨길 수 없게 만들던 그 눈동자가 바로 어제 일처럼 되살아났다. 그 환각을 지우기 위해 재희는 서둘러 짐짓 진지한 얼굴로 입가에 손가락을 하나 댔다.
“이건 어디 가서 말하지 마. 쪽팔리니까.”
“농담하시는 거죠?”
“왜 그렇게 생각해? 김 피디도 그거 뭔지 잘 알 텐데.”
놀리려는 의도는 아니었으나 윤의 귀 끝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이렇게 쉽게 들여다보이니 이런 데는 영 젬병인 정언조차도 윤의 감정을 모를 수가 없는 상황일 것 같기는 했다. 하여튼 이 험한 세상에 다들 이렇게 순진해서야, 하고 생각한 재희는 말을 돌렸다.
“다른 사람들도 각자 이유가 있겠지. 어쩌다 보니까, 하다 보니까, 먹고살려고, 남들이 그렇게 하니까. 그런데 난 그게 잘못됐다고 생각 안 해. 그런 이유로라도 여기까지 오는 사람들 드물어. 김 피디도 마찬가지고. 그건 자부심 가져도 되지. 그런 보기 드문 사람들 여기서 다 만날 수 있으니까.”
팀원들이 재희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처럼, 재희 역시 팀원들에게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디서든 이런 사람들을 한꺼번에 만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입술 끝을 잘근거리던 윤이 몸을 숙이며 두 손을 깍지 끼어 이마에 대었다.
“……선배한테 도움 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는지 모르겠어요. 오늘 이원욱 만났을 때도 그랬거든요. 너무 끔찍하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데, 선배가 그런 걸 몇 년이나 견뎌 왔다고 생각하면 그냥 답답해서…….”
조심스러운 단어들만으로도 윤의 심정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좀 더 쉬웠을 수도 있겠지만, 상대가 정언이라면 윤이 그런 고민을 하는 것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바늘 끝 하나 찔러 넣기 힘들어 보이는 정언의 무표정한 얼굴을 떠올리자 웃는 소리가 났다. 윤이 주저하다 재희에게 물었다.
“제가 피디님이었으면 선배가 저한테 기대는 게 더 편했겠죠?”
“서 피디가 나한테 의지하는 걸로 보여?”
쿡쿡거리며 되물은 재희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서 피디 지금도 충분히 나보다 김 피디 의지하는 거 같은데.”
윤이 멈칫하며 재희를 마주 보았다. 재희는 팔짱을 끼고 짐짓 심각한 표정을 했다.
“김 피디 굉장히 겸손하네. 본인을 너무 과소평가하지 말라고. 친구가 그런 일 당했다고 경영진 비난하는 글 쓸 수 있는 사람 흔치 않아. 동료가 폭언 듣는다고 해서 이사들한테 대들 깡 아무나 있는 것도 아니고.”
윤이 민망한지 손끝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소년 같은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재희는 윤을 놀리듯 어깨를 툭 부딪쳤다.
“굳이 서 피디 좋아하는 것만 봐도 보통 사람 아닌데 왜 그래.”
윤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윤이 놀리는 재미가 있는 타입이라는 걸 깨달은 재희는 무심결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나한테 그 정도 용기 있었으면 서 피디하고 그냥 선후배 사이 아니었겠지.”
불쑥 튀어나온 본심은 의도한 게 아니었다. 그냥 웃어넘길 수도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윤은 기어이 그걸 지나치지 못했다. 잠시 사이를 둔 윤이 재희를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무슨 뜻입니까?”
방금 전까지 열아홉 소년처럼 보이던 윤은 순식간에 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얼굴을 빤히 보던 재희는 씩 웃었다. 어떤 여자가 이런 남자에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천하의 서정언이라도 무너지는 게 당연할 것 같았다.
재희는 부러 그 시선을 외면하며 대답했다.
“말 그대로야. 외롭고 힘든 적 없다면 거짓말이니까.”
재희는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던 감정들에 단 한 번도 이름을 붙인 적 없었다. 좋은 후배, 신뢰할 수 있는 동료, 그리고 어쩌면…….
이미 정언에게 말했던 것처럼, 단 한 번도 정언을 곁에 두는 걸 상상하지 않았다고 맹세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언제나 재희를 멈추게 하는 건 그다음의 일이었다.
“그런데 나도 그 정도 양심은 있거든. 안 채워질 거 뻔히 아는데 계속 부어 보라고 강요할 순 없잖아. 그러면 진짜 나쁜 놈 아냐.”
가볍게 내뱉은 진심은 언제나 재희가 선 안에 머무르는 이유였다.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빈자리는 자신에게 존재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정언에게 그런 고통을 공유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윤의 얼굴에 뭐라고 정의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지나쳤다. 단정한 얼굴은 그새 손을 대면 금방이라도 베일 것처럼 예민하게 날카로워져 있었다.
“피디님이 양심적인 남자라 감사해야 되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