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03
203화.
날이 선 윤의 말투에 재희는 쿡쿡거리며 웃었다.
“감사하는 사람 표정이 그래?”
속을 빤히 들여다보였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는지 윤이 멈칫했다. 재희는 웃음기를 거두지 않은 채 그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 말했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쌓인 거 많은 앤데, 이사회에서 김 피디가 대신 화내 줘서 고마웠어. 내가 서 피디한테 그렇게 좋은 선배 아니었어서 지금까지 마음에 걸리는데, 거기서 서 피디 그런 소리 듣는 거 아무도 안 말렸으면 내가 더 죄책감 느꼈을 것 같아. 서 피디 성격에 아마 혼이나 안 냈으면 다행이겠지만, 그랬어도 본심 아닐 테니까 담아 두지 말라고.”
잠시 말이 없던 윤이 한숨처럼 웃었다.
“선배 너무 잘 아시는 게 더 화나는데요.”
뜻밖의 직구였다. 재희는 짐짓 놀리는 투로 대꾸했다.
“그러게 있지 말고 처음부터 우리 팀 지망하지 그랬어.”
“선배 같은 사람 있는 줄 알았으면 당연히 그랬겠죠.”
윤이 대답했다. 정언이 들었다면 배트 한 번 못 휘두르고 삼진을 얻어맞은 타자 꼴이 났을 멘트였다. 솔직한 게 매력이네, 하고 속으로 생각한 재희는 허공에 시선을 두며 툭 뱉었다.
“시간을 돌릴 수가 없으니까 사는 게 재밌지, 안 그래?”
그 말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동안 침묵하던 윤이 물었다.
“앞이 안 보일 때도요?”
“앞이 안 보이니까. 우리가 처음부터 결말을 다 알면 그게 무슨 재미겠어.”
그건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윤이 재희를 마주 보았다.
“결말을 알았으면 시작 안 하셨을 것 같으세요?”
“아니.”
재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끔 수십 번, 수백 번 시간을 되돌리더라도 결국 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연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의 피디가 되지 않았더라면, 쉽게 타협하는 인간이 되었더라면…… 그러나 수없이 생각해도 결론은 언제나 같았다.
“사람은 안 변하니까.”
재희는 쓰게 웃었다.
“그게 내 성격인 걸 어쩌겠어. 그래서 지는 싸움인 거 알아도 하게 되잖아, 지금처럼. 억울하니까, 그거 못 참겠으니까. 그냥 있을 수는 없고. 시간을 돌린다고 내가 나 아니게 되진 않을 거 아냐.”
되돌릴 수 없는 수많은 선택들. 가지 않은 길을 돌아볼 때면, 재희는 스스로에게 말하곤 했다. 지금 서 있는 이 길이 나를 만들었다고. 모든 선택에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을 수는 없다고. 그건 그림자처럼 내내 자신을 쫓아다니는 두려움을 외면하기 위한 주문이었다.
“CP님이 그러시더라고. 위기에 몰렸을 때 밑바닥 안 드러내는 사람 있을 거라고 확신하냐. 확신은 없지. 누가 변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재희의 목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윤이 입을 열었다.
“변할 사람들이면 진작 그랬겠죠.”
잠시 말을 고르는 듯 머뭇거린 윤은 재희를 마주 보았다.
“전 이유도 모르면서 따라가는데요. 선배들은 이유 아시니까, 가야 된다고 생각하면 끝까지 가실 분들이잖아요. 그런 생각 하지 마세요.”
신중한 단어들이었다. 누구라도 그 성정을 짐작할 법한 다감한 말투에 재희는 웃었다.
“좀 위로되려고 그러는데.”
그건 진심이었다. 아무도 변하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사실은 확신할 수 없었다. 신념과 현실의 삶 사이에 경중을 매긴다는 건 불가능했다. 때문에 타인의 입으로 듣는 그 말은 재희에게 약간의 위안을 주었다.
재희는 윤의 어깨를 툭 치며 내뱉었다.
“너무 괜찮지 말라고. 나 인기 뺏기는 거 실시간으로 느껴지니까.”
짐짓 정색하는 재희의 얼굴에 윤이 멋쩍게 웃었다. 기지개를 켠 재희는 옷을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 마셨으면 그만 내려갈까?”
윤이 네, 하고 대답하며 몸을 일으켰다. 윤을 먼저 내보낸 재희는 옥상을 나서려다 말고 다시 한 번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새 구름이 조금 걷힌 하늘 어딘가에서 작은 빛이 반짝였다. 긴 숨을 내뱉은 재희는 문을 닫았다. 되돌아간다는 건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장부 가지고 장난질 친 거 확실하네, 그치? 조금만 신경 써서 봤으면 바로 걸렸을 것 같은데, 어떻게 여태까지 묻혀 있었대?”
민혜가 심각한 표정으로 호형을 올려다보았다. 호형은 길었던 전문가 미팅을 끝내자마자 달려와, 민혜와 정언에게 자료 분석 결과를 알려 주는 중이었다.
다크서클을 턱 밑까지 늘어뜨린 호형이 탁자 위에 흩어진 자료들 위를 탁탁 쳤다.
“굳이 누가 이상하다고 문제 제기 자체를 한 적이 없는 거죠. 이상연 변호사님 말로는 정상적인 회사라면 우리가 발견하기 전에 주주총회에서 누가 이의를 제기했어야 한다고 그러던데요. 변정화 소유 계열사 중에 우리가 주목한 게 식자재 공급하는 뉴테크푸드라는 회사인데, 조한일보 계열사 구내식당이나 외식사업부 쪽 회사는 전부 여기하고 계약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내부에서 매출 내역이나 장부 조작하는 건 너무 간단하다는 거지. 대주주도 대부분 관련인들이고.”
호형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있던 민혜가 턱 밑을 문질렀다.
“회계 조작이 상대적으로 간단하니까 여기 계좌를 이용한다?”
“그렇죠. 건물 매매 대금이나 이런 게 왔다 갔다 한 게 몇 번 있어요. 금액이 몇 백만 원 단위로 자잘한 건 내역 확실히 잡아내기 힘드니까, 작은 단위 뇌물 주고받는 용도로 유용한 적 없다고 장담도 못 하고.”
“각 잡고 캐면 증거 찾는 것 자체는 일도 아니겠는데.”
정언이 팔짱을 끼며 내뱉자 호형이 손가락을 딱 소리 나게 튕기며 그렇지, 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증거가 없는 게 아냐. 엄대진이 언터처블이라 아예 시작도 못 한 거지. 이정수 검사랑 진형은 검사가 몇 년 전부터 주시하다 특검 들어갔는데도 결국 모가지 따였잖아. 그거 보고 누가 엄두가 나겠어. 그러니까 갈수록 더 느슨해진 거고. 우리한테는 호재지. 이거 완전 노다지야.”
“SO 컴퍼니 쪽은?”
“에서 받은 자료 석현 선배가 체크하고, 오인영 세무사님이 분석해서 가져온 거 봤는데 여기도 문제될 부분 많아.”
호형이 자료를 펼쳐 놓았다.
“SO 컴퍼니가 에너지 사업 업체로 등록돼 있다고 했잖아. 그런데 대체에너지 생산 산업 부품 회사로 업종 등록한 유령회사 앞으로 돈이 들어가는 걸 찾았단 말이야. 장부에는 부품을 샀다고 기록이 돼 있는데, 실제로 석현 선배가 유럽 나가는 물류 쪽 알아보니까 장부에 기록된 시기에 그리스로 간 화물 자체가 아예 없어. 그 유령회사 쪽에서 부품 생산한다는 동남아 공장 주소도 현지에 확인해 보니까 이미 폐업한 지 십 년도 넘은 공장이고.”
“돈 벌기 진짜 쉽네. 없는 공장에서 존재하지도 않는 부품 생산하고, 실체 없는 회사가 다른 유령회사한테 그걸 사들인다?”
정언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픽 웃자 호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거 보다 보면 봉이 김선달 정도면 희대의 양심 사업가 같지 않냐? 최소한 대동강 물은 눈에라도 보이잖아. 이건 뭐 있지도 않은 거 가지고 지지고 볶고 잘도 해요.”
“아우, 진짜 양심이 얼마나 없고 머리가 얼마나 좋고 얼마나 부지런해야 이런 게 되니?”
민혜가 진저리를 쳤다. 호형이 그러니까요, 하고 맞장구를 치며 기지개를 켰다. 죽겠다는 얼굴로 목을 몇 번 돌리던 호형이 창밖을 넌지시 보더니 생각났다는 듯 정언에게 물었다.
“김 피디는 어디 갔어? 아까부터 안 보이네.”
정언은 그 말에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이원욱과의 인터뷰 후, 사무실로 돌아온 윤은 눈에 띄게 가라앉아 있었다. 파일 인코딩을 걸어 놓고 자리를 비우기에 잠깐 바람이라도 쐬러 갔나 했더니, 이삼십 분쯤 지난 것 같은데 아직도 자리에 없었다.
어딜 갔지, 하고 속으로 생각한 정언은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커피 한 잔 하러 갔나 보지 뭐.”
“금방 퇴근할 건데 커피는 왜 마시러 갔대?”
“퇴근할 거면 커피 마시지 말라는 법 언제 새로 생겼나?”
정언이 되묻자 호형이 뭐라고 한마디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나 때마침 재희가 회의실 문을 두드리며 나오라는 손짓을 했다. 호형이 방금 하려던 말을 잊어버린 듯 의아한 표정을 하며 정언을 마주 보았다.
고개를 갸웃한 정언이 호형과 함께 회의실을 나서자, 그새 윤이 자기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퇴근 준비를 하던 다른 팀원들이 무슨 일인가 싶었는지 동작을 멈추며 재희에게 눈을 돌렸다. 재희가 파티션 위를 짚으며 입을 열었다.
“본론만 얘기할게. 지금 위에서 폐지 안 할 테니까, 대신 8주 휴방하고 CP 체제로 전환하자고 그러는데 어떻게 생각해?”
충혈된 눈을 끔벅끔벅하던 찬수가 귀를 후비적거리더니 되물었다.
“CP 체제가 뭔 소리야? 최영직 CP가 다 컨트롤하겠다 그거야?”
“그렇죠.”
재희의 대답에 정언이 대번에 얼굴을 찌푸리며 손을 휘적거렸다.
“아니, 개소리가 뭐 그렇게 심각해. 됐어요. 지금 그딴 소리 들어 줄 시간 없어.”
다 챙겨 둔 가방을 한쪽에 밀어 놓은 현진이 콧방귀를 뀌며 의자를 뒤로 젖혔다.
“8주 휴방 좋아하네. 아무리 피디들이 회사원이고 지들이 하라면 하고 말라면 만다지만 문 닫으랬다가 열랬다가, 쉬었다가 하랬다가 아주 지랄 염병을 다 하네. 쉬긴 왜 쉬어? 뭣 때문에?”
“본인도 공부하실 시간이 필요하다는데요.”
재희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자 현진이 혀를 찼다.
“공부는 혼자 해야지 남은 왜 잡아 놔? 우리는 나갈 테니까 공부는 혼자 하든 말든 알아서 하라고 그래.”
“위에서 프로그램 유지안 제시했으니까 우리가 단체 행동하면 소송 걸겠대요. 그래도 괜찮겠어?”
그 말에 정언은 순간 멈칫했다. 소송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그래도 괜찮겠냐고 묻는 재희의 얼굴에 얼핏 스친 걱정 탓이었다.
재희가 이 팀 외의 무엇에도 미련을 두지 않는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바꿔 말하자면, 그건 결국 팀이 재희의 유일한 약점이라는 뜻이었다. 위에서 굳이 단체 행동을 하면 소송을 걸겠다고 한 건 그들도 그 사실을 뻔히 안다는 얘기였다.
소송 얘기를 듣자마자 호형이 짜증나 죽겠다는 투로 내뱉었다.
“가지가지로 치사하네, 진짜. 아, 몰라요. 걸려면 걸라고 하세요. 그거 무서웠으면 지금까지 하지도 않았어요. 지금 멤버로 몇 년을 했는데 윗대가리들은 아직도 우릴 그렇게 모르나?”
“그럼 내가 걱정 안 해도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