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04
204화.
재희가 다시 한 번 다짐을 두듯 묻자 현진이 버럭 성질을 냈다.
“아, 진짜 강재희 좀! 끝난 얘길 왜 자꾸 하려고 들어? 됐어. 퇴근하려는데 뭐 엄청 중요한 얘기 하는 줄 알았네.”
“엄청 중요한 얘긴데 왜요.”
“장난하냐? 금요일 밤에 되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어.”
재희를 한 대 치기라도 할 기세로 눈을 부라린 현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한쪽 어깨에 걸쳐 메며 삿대질을 했다.
“야, 앞으로 이런 얘기는 퇴근할 때 하지 마. 알았어? 기분 좋게 집에 가려는데 꼭 기분 잡치게 그래.”
“출근할 때 해도 기분 잡치지 않나?”
재희가 진지하게 되묻자 현진이 음, 하고 잠시 생각하는 척 입가를 만지작거렸다.
“그건 그렇지. 그러면 그냥 개소리는 너 혼자 간직하는 걸로. 오케이?”
“야, 한현진 님 말씀이 틀린 게 하나도 없어. 이 시대의 옳은 말 제조기야, 아주 그냥. 자다가도 한현진 말 들으면 떡 먹는 거 몰라?”
입이 찢어지게 하품을 한 찬수가 한마디 거들자 현진이 그렇지, 그렇지 하며 추임새를 넣었다. 재희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럼 나 진짜 걱정 안 할게. 다들 퇴근하고, 주말이니까 좀 쉬고 봅시다. 방송 나갈 때까지는 무조건 다 살아 있어야 돼. 무슨 말인지 알지?”
현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너나 잘 하세요, 너나. 북망산에 주상복합 올리고 황천강에서 제트스키 타는 새끼가 남 걱정은 왜 해?”
재희가 그 말에 잠시 말문이 막힌 얼굴을 하고 있다가 되물었다.
“레퍼토리가 갈수록 창의적인데 어디서 공부하고 와요?”
“내가 그 창의적인 레퍼토리로 여태 먹고살았다는 거 아냐. 말 걸지 마, 갈 거니까. 성옥아, 가자. 야, 빨리 퇴근해. 강재희 저거 맘 변하기 전에.”
콧대를 세운 현진이 자리에 앉아 있던 팀원들의 등짝을 두드렸다. 현진이 문 앞에 앉은 성옥의 뒷덜미를 낚아채다시피 하며 데리고 나가자, 다른 팀원들도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나 퇴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호형이 회의실 탁자 위에 흩어져 있던 자료들을 한데 모아 올려놓고는 수고하라며 정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정언은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응, 하고 대답했다.
곧 대부분의 팀원들이 빠져나간 사무실에서 가방을 챙기던 민혜가 퇴근할 기미조차 없는 정언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언, 퇴근 안 해?”
“안 피디 미팅 내용만 좀 체크하고요.”
정언이 자료에 눈을 둔 채 대답하자 민혜가 아휴, 하고는 뭐라 하려 입술을 달싹이다 포기했다는 듯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래, 그럼.”
“월요일에 봐요.”
“이원욱 잡혔다니까 좀 안심이긴 한데, 그래도…… 너무 늦게 가지 마. 알았지?”
민혜가 당부하는 말에 정언은 고개를 들어 민혜를 보고는 픽 웃었다.
“괜찮아요. 작가님이나 조심해서 가요.”
“내 걱정하지 말고. 주말에 집에서 푹 자고, 뭐 좀 챙겨 먹고.”
“나 지금 엄마랑 통화하는 줄 알았어.”
정언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대꾸하자 민혜가 으이구, 하며 눈을 흘겼다. 정언이 대답 대신 앉은 채 민혜의 등을 떠밀자 민혜가 마지못해 밀려가며 손을 흔들었다.
민혜까지 나가고 나자 사무실에 남은 건 재희와 정언, 윤뿐이었다. 뭔가를 보고 있던 재희가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안을 둘러보더니 정언을 나무랐다.
“서 피디가 안 가니까 김 피디도 퇴근을 못 하잖아.”
그 말에 곁에 앉아 있던 윤이 퍼뜩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더니 웃었다.
“아니에요. 저도 뭐 좀 잠깐 볼 게 있어서요. 금방 갈 거예요.”
“나보다 늦게 퇴근하는 사람 오랜만에 보네.”
재희가 툭 내뱉고는 재킷을 집어 들어 한쪽 팔에 걸치며 정언에게 물었다.
“안 들어갈 거야?”
“금방 가요. 퇴근하게요?”
정언이 묻자 재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주말엔 좀 쉬려고. 방송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쉬는 날일 것 같아서. 진짜 어지간히 급한 일 아니면 나오지 마. 나도 안 나올 거니까.”
재희가 자기 입으로 그렇게까지 말하는 건 정말 드문 일이었다. 빨리 가, 하고 한 번 더 다짐을 둔 재희는 사무실을 나갔다. 사무실 안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정언은 자료를 넘기며 윤에게 물었다.
“아까 어디 갔다 왔어?”
파티션 너머로 짧은 정적이 지났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하고 정언은 속으로 생각했다. 윤의 대답이 돌아온 건 직후였다.
“아, 그냥…… 옥상에 잠깐 올라갔다 왔어요.”
정언이 몸을 뒤로 젖히며 물었다. 모니터에 눈을 두고 있던 윤이 멈칫하며 정언을 보았다.
“답답해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윤은 내내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런 일 없을 거라고 약속하라던 윤의 얼굴이 문득 되살아났다.
농담으로 넘길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그러기에는 윤이 너무나 절박했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인 것을 뻔히 알면서도, 윤에게 절대 죽지 않겠다고 약속한 건 그 때문이었다.
정언의 물음에 윤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 저 이 부분 봤는데 이해가 좀 안 가서요. 여기 보면 변정화가 경영에 관여하는 회사들 회계 자료에서 연간 수치가 서로 안 맞는다고 체크가 돼 있잖아요.”
윤이 보고 있던 자료를 내밀었다. 일부러 말을 돌리려고 한다는 걸 알면서도, 정언은 굳이 더 캐묻지 않았다. 정언은 윤의 손에 들린 자료를 눈으로 훑고는 입을 열었다.
“오인영 세무사님 얘기로는 이중장부 가능성이 있다고 했대. 아까 송 작가님하고 내가 봤는데 실제로 주주들한테 공개된 자료 참조해 보면 국세청 제출 자료하고 수치가 달라. 본인이 최대 주주고, 나머지 주주들도 주변 사람들이 갈라 먹기 하고 있으니 굳이 명확한 자료 제출할 필요 없는 걸로 봐야겠지. 이중장부 기록하면서 매출액 조작해서 탈세하고 있을 가능성 높아. 조작된 매출액은 다시 엄대진한테 가겠지.”
“음, 그러면 그리스 소재 SO 컴퍼니하고 변정화랑 자식들 앞으로 된 부동산 사들이는 유령회사 사이에 명확하게 관계가 증명된 게 있어요?”
“그건 석현 선배가 체크했어. 존재하지도 않는 부품 구입 금액을 입금하는 방식으로 페이퍼컴퍼니 들어간 돈을 세탁하고 있다고 봐야 된다고. 그리고 선배 얘기 들어 보니까 한국에서도 SO 컴퍼니 주식 매입하거나 투자하는 방식으로 비자금 넣는 것 같다던데.”
정언의 말에 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가요?”
“SO 컴퍼니 비상장회사인데, 엄대진계 의원들 중에 일부가 여기 주주인 걸로 추측된대. 상장 기대하고 들어가는 비상장회사 주식은 상장 안 되면 그냥 휴지 조각이야. 거액을 투자한다는 게 되게 위험하지. 그런데 서온 게이트 터지고 난 뒤에 신차훈이 한 번 자기 지역구에서 공원 매점 사업권 독점하게 해 준다고 하면서 기부금 형식으로 입찰 업체 여러 곳에서 돈을 받았다, 이런 제보가 있었다더라고.”
“업체에서 제보한 거겠죠?”
정언은 들고 있던 펜 끝으로 관자놀이 부근을 누르며 대답했다.
“맞아. 그런데 당시에 신차훈이 그건 개인적인 뇌물 같은 게 아니다, 지역구 차원에서 유망 사업체에 투자했다 하면서 넘어갔다는 거야. 실제로 해외 기업 주식을 구매한 내역이 있었고, 지역구 소재 벤처기업하고 자매결연을 했다 뭐 그런 자료가 있었대. 자세한 건 비공개라는데, 그 주식이 SO 컴퍼니 주식일 확률이 높지. 자매결연했다는 기업은 폐업 처리된 지 오래됐고.”
“그것도 사기겠네요, 그럼. SO 컴퍼니는 주주명부 확인하면 확실하지 않아요?”
“우리가 보려면 주주명부 열람하게 해 달라고 법원에 소장 제출해야 돼. 그런데 해외 소재 회사라 시간도 오래 걸릴 거고 절차도 복잡해. 아니면 지분율이 일정 이상 되는 주주일 경우에 명부 요구할 권리가 있긴 하지. 그런 주주가 지금 우리 주변에 없는 게 문제지만.”
윤이 눈썹을 좁히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정언을 마주 보았다.
“변순철 회장은 아직 별 얘기 없죠? 이규완도?”
정언은 그 말에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병동 폐쇄했다는 소문 이후로는 뭐. 근데 아직도 본서울병원 이송 못 한 거면 이유 있다고 봐야 하지 않겠어? 이규완도 아직 말은 없는데 주말 지나면 좋든 싫든 움직여야 될 거야. 검찰 고위직이 싹 신환석 라인이라 구속영장 청구되면 백 퍼센트 구속이니까. 구속되면 경선이고 뭐고 끝나잖아.”
“어쨌든 우리한테 심증은 있는 거네요.”
정언은 코끝으로 웃는 소리를 내며 한숨을 쉬었다.
“심증은 처음부터 늘 있었잖아. 선배가 그렇게 좋아하는 팩트 가져오려니까 힘든 거지.”
아이고, 하며 몸을 길게 숙였던 정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이 고개를 들어 정언을 올려다보았다. 정언은 농담처럼 툭 내뱉었다.
“처음에 선배한테 팩트 가져오겠다고 했던 거 이제 후회돼?”
윤이 눈을 맞추며 씩 웃었다.
“게시판에 글 쓴 것도 이제 후회 안 하는데요.”
그 이유가 뭔지는 굳이 들을 필요도 없었다. 괜한 소리 했네, 하고 속으로 중얼거린 정언은 시선을 피하며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자료들을 가방 안에 쓸어 넣었다.
“그만 퇴근해. 나도 들어갈 거니까. 그리고 운전 무리해서 하지 마. 농담 아냐. 내가 데려다주는 거 싫으면 택시 타든지 대리 부르든지 해. 비용 청구하면 되니까.”
정언의 말에 윤이 대꾸했다.
“이원욱 말 들으니까 더 지기 싫던데요.”
“목숨 걸고 오기 부리는 거 하나도 안 멋있어.”
정색을 한 정언은 자리를 마저 정리하고는 차 키를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차는 주차장에 두고 걸어갈 셈이었다. 서둘러 정언을 따라 일어난 윤이 물었다.
“오늘은 제가 선배 데려다드리면 안 돼요?”
“걸어가도 코앞이야.”
칼 같은 거절이었으나, 물론 그렇다고 포기할 윤이 아니었다.
“그러니까요.”
여기서 윤을 설득하려고 해 봐야 아무 소용도 없다는 건 이제 경험상 충분히 알고 있었다. 윤과 더 입씨름을 한다는 상상만으로도 피곤해진 정언은 대답 대신 몸을 돌렸다.
침묵은 긍정이라는 걸 알아차린 윤이 사무실 불을 끄며 정언을 따라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