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07
207화.
“그거, 고원종합기술공사 이종규 팀장이 우리한테 제보한 내부 자료 기억나세요? 거기서 사내 메일로 감리 조작 지시 내리고 감리 확인서 이중 기록 요구한 사람이 윤양한이잖아요. 지금 고원 사외이사고 서온건설 상무 출신.”
민혜가 어머머, 하며 발을 굴렀다.
“아니, 안 그래도 여기 이 윤양한이 서온건설 상무라고 돼 있어서 내가 지금 이거 서치해 본 거거든요. 사진 하나 걸려 나오는 게 있는데, 이 사진에 있는 사람들이 발기인인 것 같아.”
몸을 기울여 민혜의 모니터에 뜬 사진을 뚫어져라 보던 정언이 민혜에게 말했다.
“이거 사진 프린트 좀 해 줘요.”
“오케이.”
민혜가 즉시 인쇄 버튼을 눌렀다. 윤은 후다닥 프린터 앞으로 가 출력돼 나온 사진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자리에 앉아 있던 찬수가 손을 내밀었다.
“김 피디, 그거 잠깐 줘 봐.”
윤이 순순히 사진을 내밀자 찬수가 사진을 보며 턱 끝을 매만졌다. 한참 고심하는 찬수를 본 현진이 면박을 주었다.
“보면 아냐?”
“한 작가는 날 너무 무시하는 경향이 있어.”
부루퉁하게 대꾸하던 찬수가 다음 순간 어, 하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잠깐만, 이거 최창묵 아닌가?”
“최창묵이라고요?”
윤은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찬수가 고개를 들어 윤을 쳐다보았다.
“이거 몇 년도 거야? 여기 오른쪽 끝에, 이 사람 최창묵처럼 생겼는데. 사진이 딱 선명하지가 않아서…….”
찬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 자리에서 뛰어온 정언이 바로 찬수가 들고 있던 사진을 낚아챘다.
“ 가져가서 물어보고 올게요.”
놀란 찬수가 야 서정언, 하고 불렀으나 정언은 이미 사무실을 뛰쳐나간 뒤였다. 찬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여튼 성질 급해.”
윤은 정언이 나간 문에 시선을 주었다. 닫힌 유리문 너머로 멀리서 둔탁하게 걸러진 누군가의 말소리들이 마치 소음처럼 희미하게 떠돌았다. 까닭 없이 불현듯 심장이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뛰어다닌 오전이 거짓말인 것처럼, 점심시간이 지난 뒤의 로비 카페는 지나치게 한적했다. 로비 벽에는 언론 탄압을 중지하라는 내용의 포스터와 대자보들이 길게 붙어 있었다. 함부로 찢기고 그 위에 다시 붙이고를 여러 번 반복한 탓에, 모서리마다 붙은 테이프가 너덜거렸다. 을씨년스러운 광경이었다.
정언은 소파에 등을 묻으며 그 스산한 공간에 눈을 주었다. 그러나 간간이 로비를 지나치는 사람들은 모두 평화롭게 보였다. 그런 일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 세상은 언제나처럼 평화롭다는 듯 고요하게 흘러가는 그 풍경이 문득 낯설었다.
그사이 픽업대에서 커피 두 잔을 가져온 윤이 컵 하나를 정언의 앞에 놓아 주며 맞은편에 앉았다. 잠시 넋을 놓고 멍하니 카페 밖을 보고 있던 정언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윤이 웃는 소리를 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아냐. 그냥.”
정언이 적당히 얼버무리자 윤이 고개를 돌려 정언의 시선이 머물렀던 곳으로 눈을 주었다.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 알아차린 듯, 윤의 얼굴에서 미소가 걷혔다.
정언은 차가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짧은 한숨을 쉬었다. 그때 카페 입구로 재희와 철진이 들어와 안을 둘러보았다. 정언이 손을 들어 보이자 두 사람이 다가왔다.
“지금 들어온 거예요?”
정언이 철진에게 묻자 철진이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한쪽으로 내려놓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EX빌딩하고 근처 부동산까지 다 돌았어.”
철진이 뭐라고 말을 더 잇기도 전 재희가 테이블 위에 놓인 사진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아까 민혜가 뽑아 준 어게인라이프 발기인들의 사진이었다. 재희는 오른쪽 끝에 서 있는 남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일단 이 사진에 있는 사람 최창묵 확실해?”
“현 기자한테 물어봤는데 맞대요. 인터넷 뒤져 보니까 최창묵이 공천 받기 직전에 낸 책 약력에 ‘홈리스 자활 지원 단체 어게인라이프 활동’이라고 쓴 것도 있더라고요. 지금은 절판된 책이라 시중에서 구할 수는 없고.”
정언이 대답하자 재희가 흠, 하며 팔짱을 끼었다. 정언은 철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일단 민 선배 얘기 듣고요. 뭐 건질 만한 거 있었어요?”
“나 먼저 커피 한 잔만 마시자. 아침부터 하도 뛰어다녔더니 카페인 충전 좀 해야겠어.”
철진이 죽겠다는 투로 손을 휘적거렸다. 그 말을 듣자마자 황급히 일어나려는 윤을 막은 재희가 몸을 일으켰다.
“아냐, 앉아 있어. 나도 커피 마실 거야. 아이스 아메리카노?”
철진이 손으로 오케이 사인을 만들어 보였다. 재희가 자리를 뜬 사이 아이고, 하고 신음 소리를 내며 의자에 등을 기댄 철진이 관자놀이 부근을 긁적였다.
“음, 일단 EX빌딩이 7층 건물인데 입주해 있는 사무실은 전부 스물한 개에 지금 공실로 남아 있는 건 네 개. 1층 전체는 카페로 쓰는데 이건 채기원이 직접 운영한다더라. 성재춘 사무실은 3층이고, 어게인라이프도 3층에 입주해 있어.”
“같은 층이라고? 어게인라이프 가 봤어요?”
정언이 묻자 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사무실이 엄청 썰렁하던데. 이상한 게 평수는 좀 되는데 상주하는 사람은 여직원 하나인 것 같더라고. 캐비닛에는 영상장비 몇 개 들어 있고, 나머지는 모르겠어. 일반적인 사무실 같지가 않아. 사람들이 상주하는데 외근이 잦고, 그런 사무실이 아냐. 그냥 아예 애초에 사람이 안 쓰는 데 같은 느낌 있잖아.”
정언은 미간을 좁혔다. 큰 사무실이라면 유지비만도 상당할 터였다. 거기에 여직원 하나만 상주시켰다면 일반적인 용도로 쓰는 사무실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스쳤다.
철진이 말을 이었다.
“내가 기자라고 하면서 어게인라이프 취재하러 왔다고 뻥을 쳤더니 여직원이 엄청 당황하더라고. 자기는 연락받은 게 없다고 그러면서.”
“그래서?”
“그래서 아이, 그럴 리가 없는데, 저랑 오늘 만나기로 하셨는데요, 그랬지. 그러니까 막 전화를 해 보더니 안 받는지 쩔쩔매. 그래서 내가 혹시 제가 연락한 거랑 다른 번호 아니냐, 대표님 명함 있으면 좀 주실 수 있냐 그랬더니 어디로 전화하셨냐길래 그냥 재희 선배 번호 댔거든.”
그때 커피 두 잔을 들고 돌아온 재희가 테이블 위에 컵을 내려놓으며 철진에게 면박을 주었다.
“여태 내 번호 그렇게 팔아먹었어?”
“왜 이러십니까, 알 거 다 아는 사이끼리.”
낄낄거린 철진이 커피를 단숨에 절반쯤 비우고는 숨을 돌렸다. 뭘 찾는지 재킷 위를 만져 보던 철진은 안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명함을 하나 꺼내 정언의 앞으로 밀어 놓았다.
“아무튼 번호 듣더니 이상하네, 그 번호 아닌데, 그러면서 이걸 주더라고. 여기로 한 번 해보시라고.”
무심코 그 명함에 눈을 준 정언은 다음 순간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낯익은 이름이 눈에 들어온 탓이었다. 이현교. 그 이름을 입 안으로 한 번 더 뇌어 본 정언이 철진을 다그쳤다.
“진짜 이 이름 맞아요? 대표가?”
“내가 어떻게 아냐. 주는 대로 받아 온 건데.”
철진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윤이 뭔가 싶었는지 몸을 조금 내밀었다. 정언은 자기 앞에 놓인 명함을 윤 쪽으로 돌리고는 말했다.
“허주경 사장 공판 때 검찰이 제출한 CCTV 영상, 그거 분석 전문가로 나왔다는 놈 기억나? 한국영상애널러시스라는 업체 대표. 걔 이름도 이현교였잖아.”
정언의 말에 윤이 눈을 크게 떴다.
“어, 네. 맞아요. 흔한 이름은 아닌데…….”
재희도 그 말에 퍼뜩 기억이 난 듯 바로 명함을 집어 들어 확인하고는 눈썹을 찌푸렸다.
“민 피디, 혹시 사무실에 영상장비 뭐뭐 있었는지 기억나?”
재희가 시선을 돌리자, 철진이 기억을 더듬는 듯 눈을 굴렸다.
“HDV 카메라35) 두 대인가, 그거랑 편집장비 구형 모델 있던 건 기억나는데. 그냥 언뜻 본 거라 뭐가 더 있었는지는 모르겠어요. 컴퓨터 같은 건 파티션 쳐 놔서 확인 못 했고.”
“구형 모델이면 뭐야? 아날로그?”
“네. 사무실에 저런 게 왜 있나 싶어서 그건 확실히 기억나거든요. 요샌 쓰는 사람도 많이 없을 텐데. 옛날 아날로그 ENG36) 쓰던 시절 거 같더라고요. 뭐 전원 넣어 놓거나 하진 않았고 그냥 한쪽에 놔뒀었어요. 얘 뭐 다른 사건하고 관련 있는 놈이에요?”
정언이 재희 대신 대답했다.
“허주경 사장 공판 때 검찰이 조작된 CCTV 영상 제공했는데 그거 분석 전문가라고 증인 출석한 사람 이름이 이현교였어요. 영상장비 가지고 있었으면 동일인일 확률 높을 것 같은데. 그래서 여기 연락해 봤어요?”
“뭐야, 소름 끼치게.”
짐짓 무섭다는 얼굴로 어깨를 감싸며 부르르 떤 철진이 말을 이었다.
“전화를 안 받길래 은혜영신교회하고 홈리스 자활 사업 하시는 거 봤다, 기자인데 인터뷰 좀 하고 싶다고 문자 남겼더니 오는 길에 전화가 왔어. 자기가 대표긴 한데 그런 실무는 담당자하고 하셔야 된다, 담당자랑 얘기해 본 뒤에 연락 주겠다 그래서 알았다고 했지.”
기자라는 말에 일단 속기는 한 모양이었다. 잃어버렸던 퍼즐 조각이 하나씩 발견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입 안이 말라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신 정언은 철진을 재촉했다.
“그리고?”
“사무실 나오면서 근처 부동산 몇 군데 들러서 물어봤는데 좀 재밌는 얘기를 하더라고. 내가 근처에 사무실 하나 알아보고 있다 하면서 EX빌딩 임대료가 얼마쯤 되냐 물어봤는데 20평대 사무실이 보증금 5천에 월세 4백 정도 된대.”
“20평대 사무실이? 아무리 강남이라도 좀 비싸지 않나? 월세도 월세인데, 보증금이 엄청 높은데요. 위치가 엄청 좋거나 인테리어가 잘 돼 있어요?”
“맞아. 주변 시세보다 가격이 높더라고. 위치도 역에서 좀 떨어져 있고, 딱히 권리금 받을 설비도 없어. 그래서 내가 어게인라이프 입주한 3층 사양이 어떻게 되느냐 물어봤거든. 3층에 사무실이 다섯 개고 어게인라이프 있는 301호랑 그 옆에 302호는 완전 똑같은 방이래. 성재춘 사무실은 305호인데 여기는 50평대라면서.”
“국회의원 사무실이 50평대라고요?”
정언이 눈썹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국회의원 사무실이 50평대라면 상당히 넓은 평수였다. 더구나 초선 의원이 그 정도 크기의 개인 사무실을 쓰는 경우는 드물었다.
사무실 운영비용이며 거기서 일하는 보좌관이나 비서관들 월급까지 생각한다면, 기반이 없는 초선 의원이 무슨 이유로 굳이 그런 곳을 택했는지 쉽게 납득하기는 어려웠다.
철진이 컵의 리드를 열고 얼음 한 조각을 먹으며 우물거렸다.
“그러니까. 내가 제일 오래된 부동산에서 그 얘기 하다가 의원님 사무실 좋은 데 쓰시네요, 그랬더니 거기 부동산 직원이 그러는 거야. 다른 데다 말하지 말라고 그러면서. 자기들이 EX빌딩 거래 전담으로 한 지 오래됐는데, 성재춘이 그 사무실 임대료를 안 내고 쓴다는 거지.”
“그걸 어떻게 알아요?”
“빌딩 주인이 외국 나가 있어서 제반 사항 처리하는 건 자기들이 한대. 시설 관리랑 임차인 관리, 월세 관리 이런 거 다. 내가 20평대가 5천에 4백이면 주변 시세보다 비싼 거 아니냐, 302호가 위치도 그렇고 크기도 그렇고 딱 좋은데 301호는 얼마 내고 쓰냐, 301호 직원이랑 아는데 자기는 금액은 잘 모른다면서 여기에 물어보라고 하더라 그랬거든. 그러니까 주인이 301호랑 305호 입주할 때 거기는 임대료 미납 이런 거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시설 관리나 잘 해주면 된다고 했다는 거야. 실제로 입주한 후로 한 번도 임대료를 낸 적이 없대.”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윤이 끼어들었다.
“어게인라이프는 그렇다 치고, 성재춘이 임대료 낸 적 없으면 문제되는 거 아닙니까? 의원실 운영비 항목에 임대료도 포함될 텐데요. 20평대 임대료가 월 4백이면 50평대는 아무리 낮게 잡아도 월 천 이상일 거고, 그러면 일 년 임대료만 억이 넘는 거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