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08
208화.
정언은 곁에서 윤의 말을 수긍했다.
“그렇지. 뭐 보나마나 빼돌려서 자기 주머니 채우고 있겠네. 채기원이 주변보다 임대료 높게 책정한 것도 그것 때문 아냐? 한 푼이라도 더 조작하려고. 성재춘 의원실 비용 항목 한 번 뽑아 보자고. 여기 대표가 이현교인 건 또 몰랐는데, 대체 관계가 어떻게 되는 거야?”
재희가 철진에게 고개를 까딱여 보였다.
“민 피디가 물고 들어가. 정공법으로 치자고. 대비 안 돼 있을 테니 난리 날걸.”
“그거야 뭐 전공 아닙니까.”
철진이 장난스럽게 경례를 붙여 보이며 대답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일단 사무실 먼저 올라갈게요. 연락받을 게 있어서. 녹취록 정리해 놓을 테니까 이따 다시 얘기하죠. 이현교 건 자료 있어요?”
“그건 올라가서 송 작가하고 얘기해 봐.”
대답한 재희가 먼저 가 보라는 손짓을 했다. 철진이 가방을 챙겨 자리를 뜨자, 정언은 그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런데 가 아무래도 영 걸리네. 여기 발기인이 최창묵이고 취재를 그렇게 했는데 왜 정보현 쪽은 생각을 안 했지? 일부러 우리한테 숨긴 건가?”
그러자 재희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턱을 만지작거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쪽도 숨길 이유는 없는데. 숨길 것 같았으면 이 정도까지 공개도 안 했을 것 같고. 임 기자님하고 직접 만나서 한 번 얘기해 봐. 그쪽도 등잔 밑이 어둡다고 놓친 거 있을 수도 있으니까.”
정언이 막 뭐라고 말하려던 찰나,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재희의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재희가 바로 핸드폰을 집어 들어 액정을 확인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 황 의원님이네. 전화 좀 받고 올게.”
네, 하며 전화를 받은 재희가 서둘러 카페 밖으로 나갔다. 재희가 나간 쪽을 한 번 돌아본 윤이 정언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물었다.
“임형원 기자님 의심되세요?”
속을 들여다보인 듯한 기분이었다. 확실히 어느 쪽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기는 했다. 아군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를 의심하게 된다는 건 이쪽에서도 결코 반가운 일은 아니었다.
일부러 자신들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그런 고급 정보를 제시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최창묵과 관련된 일이었기에, 이런 일을 만약 알고도 함구했다면 거기에는 어느 정도 의도가 있지 않았는가 생각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한동안 침묵하던 정언은 눈썹 위를 문질렀다.
“아니, 꼭 그런 건 아닌데 정황이…… 애초에 에서 엄대진 파기 시작한 데 최창묵 날아간 게 컸다고 인정했잖아. 그런데 어게인라이프 발기인이 최창묵이라고 하니까 이게 자기 식구 감싸기 아닌가 싶은 거야. 최창묵이 순결한 피해자도 아니고, 아무래도 팔이 안으로 굽는 게 있으니까. 처음에 우리가 임 기자님 만나서 얘기 들었을 때도 그런 게 없진 않았고.”
“그렇죠. 엄대진 말 듣고 차명계좌 개설하고 국토위 들어가 돈 받은 건 사실이었잖아요.”
윤이 정언의 말을 받았다. 의도를 짐작할 수 없는 상대는 언제나 어려웠다. 정언은 종이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고유명사들을 두서없이 끄적였다.
데일리시사, 정보현, 안영균, 어게인라이프, 최창묵, 임형원, EX빌딩…… 언뜻 아무런 관련도 없어 보이는 단어들 사이가 어떤 선으로 연결된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확신하기 힘들었다.
윤이 정언을 마주 보았다.
“어떻게 할까요? 일단 만나자고 할까요?”
정언은 순간 망설였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형원의 의도를 넘겨짚기 위해 낭비할 시간은 없었다. 짧은 한숨을 뱉은 정언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에서 시간 되는 대로 최대한 빨리 만나고 싶다고 말해 봐. 아무 때나 좋으니까.”
윤이 그 말을 듣자마자 바로 형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때 재희가 자리로 돌아왔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은 재희가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일이 재밌게 돌아가는데.”
재희가 툭 내뱉은 말에 멈칫한 정언은 재희를 마주 보았다.
“왜 그래요?”
잠시 사이를 둔 재희가 주변을 슬쩍 둘러보고는 목소리를 낮췄다.
“전화하고 들어오다 요 앞에서 현선준 기자 만났는데, 아무래도 변순철 사망 맞는 것 같아.”
“진짜예요?”
정언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윤 역시 크게 놀란 듯 핸드폰에서 바로 시선을 떼며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재희가 입가에 손가락을 하나 대며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현 기자가 얘기하더라고. 서울평화병원 관계자한테서 나온 말인데, 기자들이 확인하려고 하니까 에서는 일단 절대 인정 안 한대. 지금 언론사 전체에 변순철 관련한 모든 사항 무기한 엠바고 요청했나 봐. 만약 엠바고 파기하면 즉시 무조건 법적 최고 수준으로 대응하겠다고 하고, 이거 발설한 관계자 색출 중이라는데.”
“무기한 엠바고라고? 사람 죽은 걸 어떻게 무기한 엠바고를 걸어요?”
정언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이미 주요 언론사 기자들에게 이런 상황이 알려졌다면 시한폭탄이 동작되기 시작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더구나 내부 관계자에게서 나온 얘기였다. 아무리 엠바고를 건다 해도 그들이 원하는 만큼 무기한으로 정보를 막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무기한 엠바고 건다는 것 자체가 사망 인정한다는 소린데? 에서 그 생각 못 하진 않았을 거 아니에요. 의도가 뭐야?”
“걔들도 지금 다른 방법이 없어서 그럴걸. 증권가나 여의도에서 소문 도는 것까지는 못 막지만 오피셜이냐 아니냐는 차이가 크잖아.”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윤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혹시 상속세하고도 관련 있을까요?”
재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이유도 없진 않을 텐데, 생전에 이미 증여 상당히 진행됐어. 엄대진 대선 전에 문제 될 소지 정리하려고 오래 전부터 준비해 온 거라고. 그것 때문에 무기한 엠바고 건다는 건 위험하지. 가 보수 세력 결집시키는 축이고, 변순철이 직접 데스크에 논조 지령까지 내리니까 대선까지는 무슨 수를 써서든 지금 상황 유지하려는 게 더 클 것 같아. 현 기자 말로는 생명 유지 장치 붙여서 연명 중이라는데 강남 본서울병원으로 비밀리에 이송할 가능성도 있대.”
잠깐 침묵이 감돌았다. 정언은 턱을 괴며 재희를 마주 보았다.
“어차피 사망한 상태라면 차라리 이송하기는 더 쉬울 수도 있겠네.”
“내 생각도 그래. 본서울이면 들어가는 순간부터 보안은 아주 철저하게 될 테니까 그게 나을 수도 있겠지. 사인 관련해서도 무슨 소문이 돈다는데, 그건 기자들 사이에서도 확실히 아는 사람이 없다네.”
재희가 말을 덧붙였다. 정언은 뜻밖의 이야기에 의아한 표정을 했다.
“사인? 원래 지병 있었다면서요. 뭐 다른 이유가 있을 게 있나?”
글쎄, 하며 어깨를 으쓱해 보인 재희가 손끝으로 입술 위를 문질렀다.
“현 기자도 알아보는 중이라고 하더라. 일단 논조 계속 체크해 보자고. 김인택이 어떤 스탠스 취하는지가 중요하니까.”
“알았어요. 그나저나 황 의원님한테는 왜 연락 온 거예요? 혹시 이규완 관련 건이야?”
재희가 자리를 떴던 본래의 목적을 상기한 정언이 묻자, 재희 역시 잠시 잊고 있었던 듯 퍼뜩 정신이 든 얼굴로 대답했다.
“아, 아냐. 그런데 이것도 지금 엠바고 사항이라 언론에 공개는 못 한다는데, 일단 우리하고 관계된 일이라 먼저 연락했대. 어젯밤에 민주영 의원 사무실에 도청기 설치하려다 현장에서 검거된 놈이 있어.”
윤이 멈칫하더니 눈을 크게 떴다.
“도청기를요?”
“미친 거 아냐? 누가?”
정언의 목소리가 다시 커지자 재희가 손으로 소리 낮추라는 제스처를 취하며 말했다.
“나이는 40대고 일용직이라는데, 한국보수연합 회원이라네. 지갑에 회원증 가지고 있었대.”
말만 들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정언은 한숨을 내쉬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이 개새끼들이, 진짜 어디까지 가나 해보자는 거야?”
절로 짜증이 이는 걸 막을 방법이 없었다. 재희가 헛웃음을 뱉었다.
“그러니까. 어디서 돈 받고 한 건지 지금 조사 중이래. 그런데 뭐 어차피 뻔한 거 아냐. 한선당이지. 도청기 왜 설치하라고 했겠어, 이 시점에. 정치 공작 들어가려고 했을 거 안 봐도 비디오잖아. 지금 아주 작은 꼬투리라도 하나 잡으려고 눈이 시뻘개진 새끼들인데.”
“언론 플레이 들어가면 무조건 민 의원님이 유리할 텐데 왜 엠바고 걸었대요?”
“내부에서도 그것 때문에 지금 말이 좀 갈리는 것 같아. 그런데 수사 결과 나오기 전에 지금 공개를 해 버리면 한선당에서 딱 꼬리 자르고 모른 척할 거다 그거지. 누가 시켰는지는 뻔히 알지만 증거 없으면 그만이니까. 그래서 우리한테 만약에 그쪽에서 엄대진 사주 받았다는 증언 나오면 그동안 우리가 당했던 거 같이 증언해 줄 수 있냐고 물어보시더라고.”
정언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할 수 있죠. 김 피디는 진짜 죽을 뻔했는데.”
“이원욱은 구치소 수감됐나?”
“아직 병원에서 퇴원 안 했는데, 퇴원하는 대로 상태 보고 바로 구치소 들어갈 것 같더라고요. 아무튼 난 증언하는 거 어렵지 않아요. 우리가 이원욱 인터뷰 직접 딴 영상도 있고, 엄대진 영상 가진 것도 있으니까.”
정언의 대답을 들은 재희가 잠깐 뭔가를 생각하더니 알겠다는 얼굴을 했다.
“오케이. 일단 그렇게만 알고 있으라고. 둘 다 엠바고 사항이니까 우리 쪽에서 먼저 발설하는 일 없게 하고. 어게인라이프는 일단 민 피디한테 맡기고 만나 봐. 나 전 부장님하고 얘기 좀 해야 될 것 같아서 먼저 갈게.”
“알았어요.”
재희가 반쯤 남은 커피를 들고 자리를 떴다. 정언은 앞으로 내밀고 있던 몸을 다시 뒤로 젖히며 소파에 등을 깊숙하게 묻었다. 운명론을 믿지는 않았으나, 어떤 일이든 흐름은 분명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모든 상황이 엄대진에게 조금씩 더 불리해지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신들에게 더 여유가 있거나 여러 번의 기회가 주어질 리는 없었다. 지금까지도 엄대진은 늘 이런 위기를 어떻게든 넘겨 왔을 터였다.
가진 자들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는 욕망이 얼마나 큰 것인지 정언은 잘 알고 있었다. 일격을 가할 기회는 단 한 번뿐일 수도 있었다. 치명타를 입힐 수 있는 그 단 한 번이 언제일까.
마주 앉은 윤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만약에 에 다른 의도가 있었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