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09
209화.
그 말에 문득 현실로 돌아온 정언은 시선을 들었다.
“골치 좀 아파지겠지. 그런데 뭐 다른 의도라고 해 봐야 그쪽에서도 우리 이용해서 엄대진 엿 먹이겠다, 이 목적은 다르지 않을 것 같아. 우리한테 준 채기원 정보도 확실했고, 결정적으로 조창식이 남긴 동영상도 우리한테 공유해 줬으니까. 우리도 팩트 체크했으니 정보 자체는 문제가 없는데, 어게인라이프 관련해서 최창묵을 감추려고 일부러 말을 안 한 거냐, 그쪽에서도 몰랐냐 그게 문제인 거지. 의도적으로 말 안 했다면 시간 끌려고 그랬다는 것밖에 안 되잖아. 그게 사실이면 왜 시간을 끌려고 했는지 그 의도가 궁금한 거고.”
복잡한 가정들 속에서 뒤엉킨 단어들이 튀어나왔다. 다행히 아까보다는 머릿속이 차분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덫이라면 리스크가 너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사냥꾼이라도 자신이 걸릴 덫을 일부러 놓을 리 없었다. 형원이 준 모든 정보가 진짜라면, 결국 일이 이렇게 된 까닭은 한 사람에게 있었다. 최창묵.
윤이 말을 보탰다.
“어게인라이프 발기인으로 들어간 게 상당히 오래된 일이던데요.”
정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날짜 확인해 보니까 최창묵이 한선당 비례로 공천받기 전이더라고. 아마 정계 입성에 생각 있었거나 엄대진하고 줄 대야 하는 사람들 모은 거 아닐까 싶어. 엄대진이 차명계좌 티 안 나게 수집할 방법 찾다가 그쪽 사람들 끌어들여 어게인라이프 설립했다고 보는 게 지금은 제일 타당하지 않겠어? 사회적 지위 있는 사람들 참여시켜 단체 신뢰도 올리고, 뒤로는 명의 수집하고.”
“정보현이 관련된 게 확실하다면 안영균이 그림 그린 거겠죠?”
“그럴 가능성이 높지. 내가 궁금한 건 그 의도를 이 사람들이 알고 들어갔느냐 이거야. 만약에 어게인라이프가 진짜 그런 용도로 설립된 단체라면 임 기자님이 처음에 말했던 것 같은 피해 사례가 분명히 더 많을 거거든. 제보 요청하기 전에 최창묵 직접 만나서 얘기 한 번 해 보고 싶은데, 에서도 얼굴을 못 본다니까 그게 문제네.”
잠깐 뭔가를 생각하던 윤이 정언을 마주 보았다.
“계속 연락하니까 안부 인사 정도는 받아 주던데, 무작정 찾아가서 뻗치기 한 번 해 볼까요?”
생각도 못 한 말에 정언은 귀를 의심했다.
“안부 인사를 받아 준다고? 누가? 최창묵이?”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다그치자 윤이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지난번에 임 기자님 만나서 연락처 받은 다음부터 주기적으로 연락하거든요. 인터뷰할 수 있냐고 물어본 뒤로 전화 잘 안 받더라고요. 그래서 만나고 싶다, 취재하고 싶다 그런 얘기는 안 하고 문자로 그냥 잘 지내시냐고, 칼럼 잘 읽고 있다고만 하고 가끔 칼럼 내용 질문도 해요. 몇 번 그러니까 이제 답장은 잘 오던데요.”
그러고 보니 윤이 지난번에도 최창묵과 통화한 적이 있다고 얘기한 것이 떠올랐다. 그 후로도 계속 연락을 시도해 본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언 역시 제보자를 섭외하기 위해 안 해 본 일이 없을 정도였기에, 거기에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건 충분히 알고 있었다. 왠지 기특한 마음에 윤을 물끄러미 보자, 윤이 눈을 깜빡였다.
“왜요?”
정언이 피식 웃는 소리를 내며 턱을 괴었다.
“햇볕정책 쉽지 않을 텐데.”
툭 내뱉은 말투는 빈말로라도 상냥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냥 칭찬해 줘도 될 일인데 굳이 이런 식으로 말을 뱉어 놓고 후회하는 성격은 어디서 온 걸까, 하고 정언은 문득 생각했다.
물론 효명에게 묻는다면 펄쩍 뛰며 난 아니다 얘, 라고 대답할 게 분명했다. 마치 그 속을 읽기라도 한 듯 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선배 공략하는 것보다는 쉬울 것 같은데요.”
커피를 마시려고 뻗었던 손이 허공에서 그대로 멈췄다. 정언은 애써 당황한 티를 감추며 되물었다.
“농담이야?”
“아뇨.”
윤이 여전히 웃는 얼굴로 대꾸했다. 그 얼굴을 본 정언은 눈썹을 좁혔다.
“진담을 그런 얼굴로 해?”
“그럼 어떤 얼굴로 할까요?”
안 웃고 그 소리를 했다고 생각하니 더 할 말이 없었다. 말문이 막힌 정언은 대답 대신 남은 커피를 마셨다. 공연히 더워지는 기분이었다. 손목의 머리끈으로 짧은 머리를 당겨 묶자, 윤이 다 안다는 표정으로 빙글거렸다.
대체 어떻게 해야 윤에게 면역이 생길까 하는 부질없는 의문을 새삼 떠올려 본 정언은 시선을 피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올라가자. 에서 연락 오는 대로 알려 주고.”
서둘러 빈 컵을 치운 정언은 먼저 카페를 가로질러 로비로 나섰다. 뒤에서 큰 보폭으로 정언을 따라온 윤이 먼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정언은 층수 표시창에 시선을 둔 채 침묵했다. 나란히 선 윤은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 이제 진짜 거의 다 온 거 맞겠죠?”
여상한 질문 같았으나, 정언은 불현듯 그 아래 감춰진 희미한 불안감을 느꼈다. 착각일까. 그러나 이미 흐트러진 목소리의 조각들로는 거기 담긴 감정의 실체를 분명히 확인할 수 없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정언은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서며 대답했다.
“그래.”
불안정한 확신. 그러나 지금 누구보다도 그 확신이 간절한 건 자신임을 정언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정언은 닫힌 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늘 그렇듯 한 겹의 무표정은 많은 감정들을 숨긴 채였다. 소리 없이 들이쉰 숨결 사이로 낯익은 햇살 냄새의 입자가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이런 순간이 부디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건 그뿐이었다. 그러나 이 작은 바람을 위해 우리는 때로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해야 할까.
아직은 답을 알 수 없을 질문이었다.
자정이 거의 가까워진 시각이었다. 저녁 시간에는 줄을 서서 먹는다는 맛집이라는데, 시간이 워낙 늦어서인지 불을 밝힌 가게 앞은 한적했다. 윤은 벽에 걸린 시계로 눈을 주었다. 천장의 거치대에 고정된 구형 텔레비전에서는 마감 뉴스 시작 전의 광고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언과 윤이 근처의 작은 식당에 도착한 건 십 분쯤 전이었다. 전날 윤이 형원에게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하자, 대답이 돌아온 건 그날 늦은 밤이 되어서였다. 스케줄 때문에 이른 시간에는 만날 수 없다며, 형원은 시간과 장소를 직접 정해 메시지를 보내 왔다.
야근이 잦은 고객들이 많은지, 가게 앞에 손으로 써 붙여 둔 영업시간은 새벽 두 시까지였다. 가까이 다가온 아주머니가 두 사람이 앉은 구석 자리의 테이블 위를 행주로 대충 닦으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주문하실 거예요?”
“일행이 있어서요. 도착하면 할게요.”
정언의 말에 아주머니는 예에, 하고 건성으로 대답하며 자리를 떴다. 그때 아귀가 잘 맞지 않는 문을 한쪽으로 밀며 헐레벌떡 들어온 형원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윤이 기자님, 하고 부르며 손을 들자 형원이 서둘러 윤의 곁에 앉으며 사과부터 건넸다.
“아이, 이거 늦은 시간에 진짜 죄송합니다.”
정언은 그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바쁘실 텐데 저희가 괜히 무리하게 약속 잡은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형원이 머쓱하게 웃고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휴, 천만에요. 안 그래도 한 번 뵈어야지 하긴 했는데, 어제 오늘 내내 정신이 없었어요. 김 피디님이 문자 보내신 것도 어젯밤에 겨우 봤다니까요.”
윤은 정언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날카로워진 것을 알아차렸다. 만나자는 메시지에 답이 돌아오기까지 거의 반나절 이상을 기다린 터였다. 형원이 의심받고 있다는 걸 알아서 시간을 끈 건지, 아니면 정말 메시지에 답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바빴던 건지 가늠하는 모양이었다.
정언은 곧 그 표정을 숨기며 언제나처럼 예의 바르게 물었다.
“저녁은 드시고 오셨어요?”
“그럼요. 여기요, 이모님. 두루치기 작은 거 하나랑 소주 빨간 거, 빨간 걸로 하나 주세요.”
저녁을 먹었다면서도 형원은 대번에 손을 들어 주문을 했다. 주방에서 두루치기 작은 거,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머니가 가까이 와서 썰어 놓은 오이 몇 조각과 마늘 편, 쌈장, 잘 익은 김치와 콩나물국 따위를 숙련된 솜씨로 착착 늘어놓았다. 형원은 마지막으로 놓인 소주병 뚜껑을 따며 정언에게 물었다.
“술 좀 하십니까?”
정언이 그 말에 고개를 까딱였다.
“김 피디는 못 마셔서요. 전 한 잔 주시죠.”
형원이 정언의 앞에 놓인 잔에 술을 따르고는 자기 잔을 채우며 윤에게 시선을 주었다.
“김 피디님은 이런 일 하시면서 어떻게 술을 못 하시지? 하기야 뭐 술하고 담배는 시작도 안 하는 게 좋긴 한데.”
윤은 대답 대신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형원이 잔을 들어 보이더니 순식간에 소주 한 잔을 숨도 쉬지 않고 들이켰다. 쌈장을 찍은 오이 한 조각을 입 안으로 밀어 넣은 형원은 오이 조각을 우물거리며 입을 열었다.
“어제 저희가 엠바고 사항이 들어온 게 하나 있는데, 혹시 YBS에서도 아시는지…….”
“ 건 말씀하시는 겁니까?”
정언이 목소리를 낮췄다. 혹여나 듣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그런 듯했다. 굳이 변순철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으나 형원 역시 바로 눈치를 챈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네. 아시는구나. 그것 때문에 저희가 어제 오늘 긴급회의를 했거든요. 보도 시점을 조절해야 하는가, 이걸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런데 아직 결정이 안 됐습니다.”
정언이 눈을 가늘게 떴다.
“김인택 때문에요?”
그 말에 형원이 웃는 소리를 냈다.
“아이고, 눈치가 너무 빠르시니까.”
짐짓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형원은 다시 잔을 채웠다. 입맛을 다신 형원이 주변을 한 번 쓱 둘러보고는 작게 말했다.
“ 인맥 동원해서 알아봤는데, 거기서도 김인택이 어떤 스탠스를 취할지 지금 아무도 몰라요. 엄대진하고 사이 안 좋은 건 공공연한 사실이지만, 김인택 입장에서는 진퇴양난이거든요. 엄대진 버리자니 가 그간 해온 게 한두 가지가 아니지 않습니까. 만약에 민주영이 대선 당선돼 버리면 바로 피바람인데 엄대진 안고 간다, 이것도 골치 아파요. 청와대 입성만 하면 엄대진이 바로 눈엣가시인 김인택을 제거해 버릴 수도 있단 말입니다.”
형원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변순철이 죽은 게 사실이라면, 지금 상황이 난처한 건 엄대진보다도 김인택일 확률이 더 높았다. 선택의 기회는 그에게도 한 번뿐일 터였다.
엄대진을 버린다면 변순철이 보수 정권에서 저질러 온 일들을 수습해야 하고, 엄대진을 백업한다면 토사구팽 당할 건 뻔했다. 그가 어느 쪽을 선택할지 외부에서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정언이 잠시 생각하다 얼굴을 찌푸리며 말을 받았다.
“그래도 민주영 의원님 쪽이 낫지 않을까요? 지금까지도 보수 정권이 보수 언론 장악하고 여론 흔들어 오긴 했지만, 엄대진 경우에는 아예 를 사유화할 수 있잖아요. 거대 미디어그룹 장악해서 국가 전체를 선동하는 권력이 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되면 사람 하나 보내는 건 일도 아니고요. 민 의원님 경우라면 시시비비 따지고 법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문제지만, 엄대진 경우라면 목숨 왔다 갔다 할 상황 생각해야 될 텐데요.”
형원은 정언의 말에 순순히 동의했다.
“그렇죠. 그런데 문제가 김인택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겠느냐. 부인은 자리보전하고 누워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인데, 김인택은 당장 발등에 불 떨어졌으니 어떻게 하겠느냐 그거예요. 실질적으로 1:2 싸움인 거거든요. 김인택은 엄대진하고 변정화 동시에 상대해야 하니까. 돈 앞에 형제자매가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하시기로 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