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10
210화.
형원은 아직 눈치채지 못한 듯했으나, 정언이 약간 초조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늘 같은 포커페이스였지만, 형원에게 묻는 말투가 미묘하게 변한 걸 보면 그를 다그치고 싶은 충동을 누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정언의 속을 알 리 만무한 형원은 느긋하게 대답했다.
“일단 저희는 조금 더 기다려 보기로 했죠. 김인택이 어떤 방향으로 가느냐, 이거 확신하면 그때 움직이자. 지금 저희가 채기원 관련 제보자하고 이번 주 안에 일본에서 접촉하기로 돼 있습니다. 이 제보자가 한국에서 채기원 자산 관리하던 사람인데, SO 컴퍼니 설립할 때도 자문을 했어요. 실질적으로 엄대진이 세탁한 비자금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 중 하나죠.”
윤과 정언은 거의 동시에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건 고급 중에서도 최고급 정보였다. 형원이 그런 정보를 아무런 방어막 없이 내보인다는 건, 만일 함정이라면 본인에게도 리스크가 큰 일이었다.
그때 아주머니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두루치기 한 접시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돌아갔다. 칼칼하게 매운 냄새가 삽시간에 공기 중으로 번졌다. 두툼한 돼지고기와 파, 양파 따위를 매콤하게 한데 볶은 두루치기가 작은 접시 위로 가득 쌓여 있었다.
형원이 젓가락을 들며 두 사람에게 음식을 권했다.
“여기 두루치기가 아주 기가 막힙니다. 제 생각에 최소한 강북에서는 여기만한 데가 없지 않나 그렇게 생각을 한다니까요. 김 피디님도 술은 안 드셔도 맛은 좀 보시죠. 여기가 정말 괜찮거든요.”
한밤중이라도 식욕을 당기는 비주얼과 냄새이기는 했으나, 이 상황에 도저히 손이 가지는 않았다. 형원은 두루치기를 한 젓가락 가득 집어 먹으며 약간 부정확해진 발음으로 말했다.
“아무튼 이 제보자 추적에 저희가 굉장히 공을 들였습니다. 일 년 반 정도를 쫓아다녔어요. 이 사람이 유럽에서 만나기로 해 놓고 도망치고, 이거 한 서너 번 했다고요. 돈 날린 것만 해도 장난 아닙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진짜 결정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거든요.”
“결정적인 증거요?”
“SO 컴퍼니랑 관련된 엄대진 명의 스위스 은행 계좌번호.”
그 말을 할 때 형원은 거의 속삭이는 목소리였다. 등줄기가 문득 서늘해졌다. 확실한 계좌번호라면 무엇보다 분명한 증거였다. 계좌번호가 있다면 스위스 은행에서도 내역 추적이 가능하다는 건 윤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엄대진이 가진 스위스 은행 계좌가 전부 몇 개냐, 그건 저희가 지금 정확히 모르지만 일단 이 사람이 아직 해지되지 않은, 살아 있는 계좌 하나를 확실히 알고 있다. 그건 확인을 했습니다. 일 터져서 특검 시작되고 스위스에 계좌 내역 요청할 수 있다면 이건 완전히 이긴 게임이죠.”
정언은 심각한 표정으로 형원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말을 마친 형원이 다시 잔을 비웠다. 잠시 자리에 감도는 침묵 위로 희미하게 마감 뉴스의 앵커 목소리가 떠돌았다. 그 정적을 끊은 건 정언이었다.
정언은 형원을 마주 보았다.
“그 제보자 신상이라든지, 다른 정보도 공유하실 수 있습니까?”
“어느 정도까지 원하시는 거죠?”
정언의 말투가 다소 공격적인 까닭인지, 형원의 얼굴에 경계하는 빛이 떠올랐다. 정언의 의도가 뭔지 짐작해 보려는 듯했다. 자세를 고쳐 앉은 정언은 형원을 똑바로 응시했다.
“기자님, 저희가 오늘 급하게 만나자고 한 이유 말씀드리겠습니다. 저 지금 기자님 의심하고 있습니다. 정확히 말씀드리면 의도가 궁금하다, 이렇게 얘기해야겠네요.”
눈을 깜빡이던 형원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정언에게 되물었다.
“지금 저 의심스럽다고 말씀하신 것 맞습니까?”
황당하다는 얼굴이었다. 형원이 결백하다면 날벼락 맞은 기분일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신뢰를 잃고 동맹이 깨질 위험을 각오하고라도, 형원이 적인지 아군인지 확실히 판별해야 했다. 정언은 그를 뚫어지게 보며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 처음부터 정보 공유 요청한 것도 저희 쪽이고, 에서 선의로 저희한테 중요한 정보 내주셨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엄대진이 어떤 방식으로 차명계좌를 확보하는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저희가 취재 과정에서 아주 유력하게 의심이 가는 곳을 발견했습니다.”
그 말에 형원의 표정이 싹 달라졌다. 눈을 크게 뜬 형원이 무의식적으로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정말입니까?”
정언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 얼굴만으로는 알기 어려웠다. 정언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최창묵 씨하고 관련이 있어요. 그래서 제가 기자님한테 최대한 빨리 만났으면 한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안영균 조사하셨고 은행 지점까지 매핑하셨는데 이걸 발견 못 하셨다는 게 이상하거든요.”
“피디님, 저희는 정말…….”
형원이 당혹스러워하며 뭔가 말하려 했으나, 정언은 가차 없이 그의 말을 끊었다.
“저한테 시간 있다면 절대 이런 방식 안 썼습니다. 말 돌리지 않겠습니다. 안영균 보좌관 부인 정보현 씨에 대해 알고 계셨습니까? 최창묵 씨가 발기인으로 있던 어게인라이프는요?”
정보현과 최창묵의 이름을 듣자 형원의 표정이 약간 굳어졌다. 잠깐 사이를 둔 형원이 마른 입술을 축였다.
“둘 다 이미 저희도 취재를 했습니다.”
“저희는 안영균이 정보현 씨하고 어게인라이프 이용해서 차명계좌 명의 획득했다고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걸 왜 에서 모르셨는지 납득이 안 가요. 그게 최창묵 씨를 보호하기 위해서인 건지, 아니면 진짜 모르셨던 건지 확인하려고 온 겁니다.”
정언의 말을 들은 형원이 아이고, 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리더니 긴 한숨을 뱉었다. 머리를 긁적인 형원은 목이 타는 듯 잔에 술을 따라 한 잔 들이켰다. 다시 자기 잔을 채워 놓은 형원은 소주병을 내려놓고 정언에게 물었다.
“정보현 만나 보신 적 있으세요?”
“아직 없습니다.”
정언이 고개를 가로젓자 형원은 헛웃음을 뱉었다.
“아, 이게 참…… 정보현이 정말 이상한 사람이에요. 이게 행적 보면 사실 의심이 돼요. 저 피디님이 그러시는 거 이해합니다. 그런데 제가 정보현 만나 봤거든요. 만나 보면, 이게 참 환장할 노릇인데, 이 사람 의심하는 내가 나쁜 것 같고 그렇단 말이에요. 저희가 한두 달 정도 교회 따라다니면서 미행한 적도 있는데, 그때도 증거가 안 나왔어요.”
정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에서도 증거를 찾지 못할 정도라면 얼마나 철저해야 하는 것일까. 천사의 얼굴을 한 야심가라는 건 확실히 누구나 생각할 만한 조합은 아니었다. 물론 정보현이 결백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정말 그렇다면 엄대진의 온갖 악행을 진두지휘하는 남편 안영균과의 조합은 더 납득이 되지 않았다.
정언이 미간을 좁혔다.
“최창묵 씨가 발기인으로 있는 어게인라이프하고 홈리스 자활 관련 행사를 상당히 여러 번 같이 했는데도요? 사진으로 본인이 직접 교회 홈페이지에 올려 둔 것만 수십 장입니다.”
형원은 한숨을 쉬었다.
“일단 만나 보시면 제 얘기가 무슨 얘긴지 아실 겁니다.”
정보현에 대해 더 이상 왈가왈부하는 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는지, 정언은 즉시 화제를 돌렸다.
“좋습니다. 정보현은 제가 직접 만나 보기로 하죠. 어쨌든 그럼 어게인라이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신 겁니까?”
어게인라이프 이야기가 나오자 형원은 정보현 때와는 달리 약간 주저하는 태도를 보였다. 들고 있던 젓가락을 접시 위에 톡톡 두드리던 형원이 손을 멈췄다.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될지 제가 지금 굉장히 당황스럽네요. 저희 쪽에서도 어게인라이프, 이거 좀 이상하다 그렇게 얘기하긴 했습니다. 그런데 본인이 아니라고 하니까. 최 주필 본인이 거기 엮여 있었던 거 아닙니까. 최 주필 말로는 그런 건 아니다. 소규모 자선단체의 경우 기부금 내역, 사용처 같은 게 조사가 잘 안 됩니다. 공시 의무가 없거든요.37) 이런 데는 회계도 단식부기38)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용도로 이용하려고 만든 단체다. 이렇게 말을 한 거죠.”
형원의 말끝은 약간 떨렸다. 그건 거짓말을 한다기보다는 억울함에 더 가깝게 느껴졌다. 정언 역시 그것을 느낀 듯, 약간 누그러진 말투로 물었다.
“최창묵 씨 얘기 외에 다른 증거는 없었던 거고요?”
“최 주필이 당시 어게인라이프 앞으로 들어온 기부금 내역 장부 일부를 저희한테 넘겼어요. 대부분 서온건설 하청업체나 이런 쪽에서 들어온 돈이었습니다. 이게 어디로 나갔겠습니까? 최 주필은 어차피 끈 떨어진 사람인데 저희가 의심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당시 서온건설 상무였던 윤양한 데려다 거기 대표로 앉혀 놓고, 이 사람 지금은 고원종합기술공사 사외이사로 가 있죠? 거기 그때 발기인으로 있던 사람들 다 엄대진하고 줄 댄 사람들이에요.”
마지막 말을 뱉으며 다시 잔을 비운 형원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두 손을 모아 잠시 이마를 대고 있던 형원은 고개를 들어 정언을 보았다.
“의심하신 이유 알겠고요, 제가 최 주필한테 받은 자료 다 드리겠습니다.”
그 표정은 결연했다. 정언은 서둘러 형원에게 말했다.
“기자님 기분 상하게 하려는 거 아니었습니다. 상황이 워낙 안 좋게 돌아가니까요, 지금.”
형원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의 층위들이 형원의 얼굴 위에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정언은 자기 잔을 채우고는 형원의 앞에 놓인 잔에도 술을 따라 주었다. 형원은 그 잔을 반쯤 마시다 내려놓았다.
“저희가 최 주필 안일하게 생각한 거 인정합니다. 그런데 저희 입장에서도, 피디님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 김윤 피디님이 그런 일 겪었다, 그러면 서 피디님이 김 피디님 취조하실 수 있겠어요? 너 진짜 받아먹은 거 없냐, 너 나한테 거짓말 안 하냐 그럴 수 없다고요.”
정언이 그 말에 멈칫했다. 형원이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래서 저희가 정보력 하나로 신문 유지하는데, 그거 다 드리겠다는 겁니다.”
이쪽에서 의심을 받는 것만은 죽어도 피하고 싶은 듯했다. 잔을 쥔 손으로 시선을 주며 한동안 침묵하던 형원이 입을 열었다.
“저희도 지금 회사 걸려 있는 입장입니다. 운영도 간당간당한 판에 목숨 내놓고 취재하겠다, 죽어도 바른 소리하고 죽겠다는 기자들 요새 얼마나 됩니까. 돈만 주면 위시한 보수 언론 욕하면서 우리가 진보 언론이네, 자기들이 진짜 민족 정론지네 하고 떠드는 신문들 1면마다 한선당이 민주영은 빨갱이다, 종북 간첩이다 동네방네 선전하는 광고 걸 수 있어요. 말도 안 되죠. 그런데 사명감, 의식, 이런 것보다 돈이 더 중요한 세상이잖아요. 안 그래요?”
대답을 기대한 질문은 아닌 듯 형원이 하하, 하고 열없이 웃는 소리를 냈다.
[다음 편에 계속….]37) 공시 의무가 없다. : 사회복지법인, 종교법인, 장학재단 등은 법인세법시행령에 따라 공시의무 부과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종교단체를 제외한 공익법인 역시 현행법상 자산 총액 5억 원 미만, 또는 수익금액과 해당 사업연도에 출연 받은 재산 합계액이 3억 원 미만이면 결산 서류 공시 의무가 없다.
38) 단식부기 : 특별한 법칙 없이 인명·채권채무·현금출납·상품 매입과 매출 등 적당한 항목으로 기장하는 장부. 일반적인 가계부가 단식부기에 해당한다. 경영조직에서 외부와 거래를 할 때 자산, 부채, 자본 등을 모두 인식하여 거래의 주고받는 양 측면을 함께 기장하는 복식부기와 대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