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11
211화.
“민 의원 지지자들 중에 고정층, 한 50퍼센트 가까이 될 겁니다. 이 사람들 지금 언론 절대 안 믿어요. 그 사람들이 원래 그랬겠습니까? 민 의원 정계 데뷔한 게 뭐 이십 년이 됐습니까, 삼십 년이 됐습니까. 몇 년 안 되잖아요. 근데 그사이에 지지자들이 알아 버린 거예요. 대한민국 언론계 밑바닥부터 작살났다는 거. 보수 언론이고 진보 언론이고 믿을 놈들 하나도 없다는 거.”
형원이 젓가락 끝으로 접시 위를 툭 쳤다. 플라스틱 접시를 치는 둔탁한 소리가 멈춘 공기를 움직였다.
“그 사람들 여론조사 해 보면 , , . 딱 이거 세 개만 보는 사람 천지예요. 그나마도 요샌 시청자들도 많이 돌아섰죠? 김양운 앵커로 바뀌고 욕 엄청나게 먹지 않습니까.”
정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마주 보았다. 깊은 한숨을 쉰 형원은 턱을 괴었다.
“까놓고 얘기하죠. 기자 초봉이 얼만지 아십니까? 한 4천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연차 십 년 이상 되는 애들도 그 돈 받기 힘들어요. 신입 열 명 뽑으면 먹고살려고 하는 짓인데 못 먹고 사니까 도망가는 애들이 아홉 명이라고요. 신념이 밥 먹여 주냐 그거예요. 안 먹여 주죠. 그거 아는데 우리가 어떻게 강요를 하겠어요.”
자조적인 말투였다. 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를 마주 보았다. 어디에서나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건 동질감 이전에 두려움을 주었다. 형원은 자기 잔을 다시 채웠으나 손을 대지는 않았다.
“저 사회부에 십 년 넘게 있었던 사람이에요. 걔들 생리 잘 압니다. 거기 기자들 입버릇이 그래요. 레벨은 연봉이 증명한다. 걔들 다른 언론사 기자들 엄청 무시합니다. 니들 기사는 니들 연봉 수준이라 그거죠. 근데 그 레벨이란 게 뭐냐. 기자 레벨은 기사로 증명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지껄이면서 지면 낭비하는 주제에 연봉만 높으면 일류 기자가 됩니까? 제가 그거 못 참고 와이프한테 미안하다, 내가 사람답게 살고 싶어 그런다 하면서 연봉 까고 왔습니다. 돈 모자라니까 프리 기고도 여기저기 하고 그러면서.”
취한 것 같지는 않았으나, 윤은 문득 그가 취하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형원이 손끝으로 잔 모서리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우리도 재벌들 뒤 캐다 광고 많이 떨어졌습니다. 단가 올려 줄 테니까 1면에 자기들 광고 박아라, 기사 내지 마라 그러는 기업들 한두 개가 아닙니다. 사장님, 국장님 다 기자들보고 굶어 죽느니 곁불 쬐는 게 낫다고 그래요. 그래도 그렇게는 안 되죠. 여기 있는 사람들 그 짓 안 하려고 온 건데 어떻게 또 그럽니까.”
허공으로 숨을 뱉은 형원이 술 한 모금을 마시곤 시선을 들어 정언을 마주 보았다.
“YBS 가지고 놀 시간 없는 거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피디님, 피디님이 절박하신 만큼 저도 절박해요. 저 한 집안 가장입니다. 책임져야 할 가족 있는 사람이에요. 우리 큰딸이 대학생인데 학교 신문사 기자입니다. 걔가 지 선배들하고 맨날 치고받고 하면서도 꼭 아빠 같은 기자 될 거라고 그래요. 그런데 제가 여기서 모가지 날아가면 되겠습니까?”
그 순간 정언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 그것을 알아차린 윤은 약간 의아한 기분이 되었다. 왜 정언이 그 말에 일순간 동요했는지 짐작할 수 없는 까닭이었다. 채 그 이유를 가늠하기도 전, 형원이 남은 술을 단숨에 마시고는 잔을 내려놓았다.
“저 절대로 피디님들 속이거나, 그러려는 의도 없습니다. 제가 아는 대로 말씀드린 거고, 필요하신 정보는 뭐든 공유해 드리겠습니다. 저희도 믿을 수 있는 거 이제 하나뿐이에요.”
마지막 말에 문득 가슴이 덜컥했다. 의 기자들 역시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이 갑자기 실감난 탓이었다.
기사를 내보내지 못할 수도 있다, 목숨을 걸고 취재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이 일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그 두려움이 뭔지 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형원을 물끄러미 보던 정언이 물었다.
“최창묵 씨하고 저희 접촉하게 해 주실 수 있습니까?”
형원이 자신 없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그거는, 다른 건 모르겠는데 그건 정말 제가 장담을 못 하겠습니다. 일단 최 주필 꼭 만나야겠다, 꼭 만나야 의심을 푸시겠다 그러면 제가 얘기 넣어 보기는 할게요. 되도록 어떻게든 만나실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다. 이러면 되겠습니까?”
“감사합니다.”
정언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네자 형원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리고 일본에서 제보자하고 접촉되는 대로 정보 공유해 드리겠습니다. 최 주필하고 어게인라이프, 그 부분에 대해서 조사를 하셨다면 제가 먼저 말씀 안 드린 거 의심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희 쪽에서는 끝난 얘기다, 그렇게 봤기 때문에 얘기 안 한 거고요. 좀 서운하긴 한데 어쩔 수 없죠. 어게인라이프 관련해서도, 우리가 아는 부분은 다 알려드리겠습니다.”
“제가 무례했다는 거 압니다. 죄송합니다.”
정언이 다시 사과하는 말에 형원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서로 의심하면서 시간 낭비하느니 차라리 이렇게 툭 까놓고 얘기하는 게 낫죠.”
형원은 곧 다시 웃는 낯을 했다. 아이고 식었네, 하고 중얼거리며 두루치기를 집어 먹는 형원에게서 윤은 묘한 페이소스를 느꼈다. 혼자서 말없이 접시를 비워 가던 형원이 소주 한 병을 더 시켰다.
정언과 주거니 받거니 하며 대작하던 형원이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그때 탁자 위에 놓아 둔 형원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화면에는 ‘으뜸공주’라는 이름이 선명했다. 아마 첫째 딸인 모양이었다. 그 이름을 보자마자 형원이 전화를 받았다.
“응, 공주. 어, 아니, 아니. 아빠가 일이 있어서 방송국 피디님들 잠깐 만났어. 이제 가지. 아이고, 술 마시고 운전을 왜 해. 걱정하지 말고, 엄마는 자? 아직 안 자? 엄마 먼저 자라고 그래. 아빠 금방 간다고. 그래요, 그래요. 누구 말씀이신데. 응, 그래.”
그 일상적인 대화에 가슴 한구석이 선뜩했다. 목숨을 걸고 이 일에 뛰어든 사람조차 결국은 누군가의 남편, 평범한 아버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은 어쩐지 스산했다.
무엇이 우리를 움직이는가…… 윤은 옥상에서 재희와 나눴던 짧은 대화들을 떠올렸다. 전화를 끊은 형원이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열두 시만 넘으면 아주 난리예요. 지 엄마보다 더하다니까요.”
“따님하고 사이좋으시네요. 보기 좋은데요.”
정언이 웃었다. 순간 까닭을 알 수 없이 정언의 그 얼굴이 눈에 맺혔다. 평소처럼 그 말이 그저 가벼운 인사치레처럼 들리지 않는 건 왜인지 모를 노릇이었다.
윤은 저도 모르게 정언의 옆모습에 시선을 붙들렸다. 정언이 감정을 누르는 데 능숙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쩐지 지금의 얼굴은 아무도 모르게 무너진 벽 틈으로 새어 나온 찰나의 부산물처럼 느껴졌다.
윤은 문득 예전에 들었던 정언의 아버지 이야기를 상기했다. 열여덟 살. 한순간 아버지를 잃기에는 어린 나이였다. 형원처럼 늦은 시간에 아버지에게 전화를 하고, 아버지가 다정하게 그 말을 받아 주는 일이 정언에게 존재하지 않게 된 지는 이미 오래였다.
어쩌면, 자신이 영원히 갖지 못하게 된 순간들을 반추하는 걸까.
그 짐작을 미처 확신하기도 전, 정언은 다시 표정을 감췄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윤은 서둘러 머릿속에서 그 생각을 지웠다. 술잔을 기울이던 형원이 마지막 잔을 털어 넣었다.
“그만 일어나시죠. 제가 너무 늦게 만나자고 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형원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카드로 계산을 했다. 정언이 만류했으나 형원은 괜찮다며 손을 몇 번 내저었다. 종이 냅킨으로 입가를 닦은 형원은 가게 밖으로 나왔다. 윤이 정언과 그 뒤를 따라 가게를 나서자, 형원은 잠시 길거리에 서 있다가 입을 열었다.
“YBS에서는 더 뼈저리게 느끼시겠지만, 엄대진 정말 무서운 사람이에요.”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윤은 퍼뜩 멈칫했다. 형원의 말이 마치 경고처럼 느껴진 탓이었다. 그러나 보도블록 위를 낡은 운동화 끝으로 몇 번 차 본 형원은 곧 그런 말은 한 적도 없다는 사람처럼 다시 웃는 얼굴로 돌아왔다.
“내일 출근하는 대로 자료 보내 드리겠습니다. 제가 연락하죠.”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정언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네자, 형원이 가볍게 묵례를 하고는 건물이 있는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윤은 형원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멀어지는가 싶더니 길가에서 택시를 잡은 형원이 도로 너머로 사라졌다.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던 윤은 등을 툭 치는 손길에 깜짝 놀라 퍼뜩 현실로 돌아왔다. 정언이 그만 가자, 하고 내뱉으며 몸을 돌렸다. 차를 세워 둔 공영 주차장으로 가는 길은 조용했다. 정언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이 없었다.
혹시 취한 걸까 싶어 흘끔 내려다보았으나, 가로등의 빛만으로는 정언의 상태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저희 속이려는 의도는 아닌 것 같은데요.”
윤이 넌지시 정언에게 말을 걸자 정언은 앞을 보며 대답했다.
“속이려는 사람치고는 너무 절박하지. 이쪽은 속았다고 보는 게 맞지 않겠어? 최창묵이 미끼 준 것 같아. 기부금 장부 일부 주고 명의 도용하는 건 숨기고. 이쪽에서는 기자님 말대로 자기들 동료 안 그래도 너덜너덜해졌는데 더 파기 뭐하다는 거 본인도 잘 알았을 테고. 내가 궁금한 건, 만약에 그게 사실이면 어차피 끈 떨어진 신세에 왜 그랬냐 그거야.”
“최창묵 무조건 만나야겠네요.”
주차장에 세워 둔 차 문의 도어록을 풀며 말하자, 정언이 먼저 조수석 문을 당겨 열었다.
“시도해 볼 가치 있을 것 같아. 정보현도 마찬가지고. 임 기자님 정도면 진짜 베테랑인데, 정보현이 어떻기에 저렇게까지 얘기하는지 내 눈으로 봐야겠어.”
조수석에 탄 정언이 팔을 올려 눈가를 가렸다. 낮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시동을 걸려던 윤은 그 소리에 손을 멈추며 정언을 돌아보았다. 절반이 가려진 얼굴은 표정을 짐작할 수 없었다.
“괜찮으세요?”
윤이 묻자 잠시 사이를 둔 정언이 되물었다.
“그거 마신 거 가지고 취했을까 봐 그래?”
“그래도요.”
정언이 팀 최고 주당이라고 혀를 내두르던 지혁의 말이 떠올랐다. 소주 한 병도 채 마시지 않았으니 정말 그걸로 취했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으나, 창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빛에 드리워진 짙은 그림자 탓인지 정언은 어쩐지 평소와는 달라 보였다. 윤이 시동을 걸지 못한 채 정언을 응시하자, 정언은 작은 목소리로 입술을 달싹였다.
“잠깐만 앉아 있자.”
정언이 이런 말을 하는 건 처음이었다. 내심 당황한 윤은 네, 하고 대답하며 시트에 등을 기댔다.
정언은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밀폐된 차 안의 공기는 고요하게 가라앉은 채였다. 어두운 공영 주차장은 가로등조차 멀었다. 입구의 안내 등만이 흐린 빛을 흩뿌렸다. 창 너머를 응시하던 윤은 정언이 나지막하게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김 피디.”
퍼뜩 놀란 윤이 대답하자 정언이 말했다.
“죽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