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12
212화.
윤은 그 순간 진심으로 환청이 이런 건가, 하고 의심했다. 죽지 말라고? 잘못 들은 건가 싶어 정언에게 시선을 주자, 정언은 눈을 가린 팔을 떼지 않고도 마치 윤의 표정을 보기라도 한 양 그 말을 되풀이했다.
“나 농담하는 거 아냐. 절대 죽지 마.”
정언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착각일까. 그러나 도저히 착각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무릎 위에 놓인 정언의 반대편 손끝이 안으로 말려드는 것을 본 탓이었다. 정언은 떨림을 참는 듯 손끝이 새하얗게 질릴 정도로 손을 꽉 움켜쥐었다. 윤은 애써 웃었다.
“왜 그러세요. 그거 제가 선배한테 해야 될 말인데.”
농담처럼 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때 주차장 입구의 안내 등이 꺼졌다. 다음 순간 어둠이 정언의 창백한 얼굴을 거의 뒤덮었다. 이미 막을 내린 극장 위의 텅 빈 무대에 선 배우처럼, 정언이 그 어둠 속에서 입을 열었다.
“전에 말했지, 나 열여덟 살 때 아빠 돌아가셨다고.”
그건 독백에 가깝게 들렸다. 윤은 불현듯 아까 형원을 보던 정언의 표정을 떠올렸다. 이상하게도 눈에 맺혔던 그 얼굴. 정언이 자기에게 다시는 허락되지 않을 순간을 반추하는 것이 아닐까 짐작했었다. 눈가를 가린 팔 아래로 정언의 입술이 희미하게 미소 짓는 것처럼 호를 그렸다.
“병원으로 오는 도중에 이미 늦었어. 엄마랑 나 보지도 못하고 죽었다고, 우리 아빠가.”
정언이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기 위해 죽을 만큼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건 그때였다. 우리 아빠가, 라는 마지막 말을 발음하는 목소리는 이미 젖은 채였다. 정언은 윤이 듣고 있든 말든 상관없다는 말투로 내뱉었다.
“아빠가 마지막에, 죽기 전에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그 생각만 하면 가끔 진짜 미치겠어. 딱 5분만 있었으면, 내 얼굴 보고 딱 5분…… 그러면 마지막으로 아빠가 하고 싶었던 말이 뭔지 알 수 있었는데, 지금처럼 이렇게 돌아 버릴 것 같은 기분 안 느껴도 되는 건데.”
정언이 웃는 소리를 냈다.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단 한 번도 이런 이야기를 한 적 없으리라는 짐작이 들었다. 그건 거의 확신에 가까웠다. 내쉬는 숨마다 얕게 움직이는 정언의 어깨는 금방이라도 부스러질 것처럼 떨렸다.
“선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정언을 부른 목소리 끝이 잠겼다. 정언은 창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긴 침묵이 멈춰 있는 공기 사이를 휘감고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그 정적을 깨고 정언은 거의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김윤이 나한테 마지막으로 무슨 말 하고 싶었을까 생각하게 하지 마.”
정언이 자신의 이름을 그렇게 불러 준 건 두 번째였다. 자로 잰 듯 떨어지는 발음으로 말한 김윤이라는 이름은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다. 정언과 자신 사이의 경계가 그 순간 흐릿해졌다.
윤은 정언을 보았다. 선이 가는 옆얼굴은 절반이 가려진 채로도 언제나처럼 날카롭고 단호했다. 그러나 방금 정언의 그 말은 분명 김 피디가 아닌, 그저 팀 동료나 후배로서가 아닌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렇게 사라지지 말라고. 잃고 싶지 않다고. 남겨지는 건 싫다고.
아주 잘 드는 칼날 위로 손끝을 움직인 것처럼 온몸이 선뜩해졌다. 단 한 걸음이면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던 그 선 너머를 그렇게 갈망했는데도, 막상 정언의 선 안에 들어왔다는 확신을 얻은 순간이 왜 이토록 서늘한지 윤은 알지 못했다.
정언이 얼굴을 가린 팔을 내려 손으로 눈가를 덮었다. 불안정하게 흔들리던 공기의 입자가 다시 가라앉았다.
그때 퍼뜩 윤은 정언이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눈을 덮은 정언의 손 아래로 순식간에 흘러내린 눈물은 마치 환각처럼 느껴졌다. 상상조차 한 적이 없는 정언의 눈물에, 윤은 눈을 크게 떴다.
눈물이 떨어진 길은 희미한 빛에 짧게 반짝이기 무섭게 곧 흔적 없이 말라 사라졌다. 불현듯 심장의 어딘가가 그대로 무너지는 듯한 감각이 엄습했다. 그 순간, 정언의 벽을 무너뜨리려 하지 말 걸 그랬다고 윤은 처음으로 후회했다.
정언이 자신의 가장 약한 부분을 필사적으로 감추려 하는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 너머를 보고 싶었던 건 어느 정도 호기심과 오기가 뒤섞인 감정이었다. 그러나 그저 그것만으로 이렇게 가까이 온 건 잘못된 일일지도 몰랐다. 정언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을 버티지 못하게 될까 봐 겁이 났다.
정언의 눈물이 술 때문인지, 형원과 그의 딸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이유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유가 뭐든 상관없었다. 입 안이 말랐다.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온통 표백된 것처럼 새하얘졌다.
“선배, 저 보세요.”
윤은 거의 숨소리에 가깝게 속삭이며 정언의 팔을 잡았다. 마치 절벽 끝에 선 사람을 구하려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정언은 그 손을 떼어 내려 했으나 윤은 정언의 손을 쥐며 몸을 기울였다. 정언이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돌렸다.
“한 번만요. 선배, 딱 한 번만요.”
윤은 어린애처럼 조르며 정언을 끌었다. 자신을 보지 않으려 애쓰는 정언의 뺨을 다른 손으로 감쌌을 때, 아직 거기 남은 습기의 흔적이 순식간에 손바닥 전체로 스며들었다. 달래듯 조심스럽게 자신을 보게 하자 정언이 주저하며 시선을 들었다.
그건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리고 누구도 본 적 없을 얼굴이었다. 아마 정언 자신조차도. 누군가가 아주 잠시 시간을 되돌린 것처럼, 열여덟 살의 정언이 거기 머물러 있었다. 아버지의 마지막 말을 듣지 못한 그날의 소녀.
무표정의 가면 뒤로 숨겨진 그 얼굴은 그저 평범한 소녀에 지나지 않았다. 남들보다 더 강하지도 않고, 더 차갑지도 않은.
정언이 얼마나 오랫동안 그 시간에 사로잡힌 채 아무렇지 않은 척 스스로를 눌러 왔는지 윤은 문득 궁금해졌다. 형언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들이 응결하며 심장의 어딘가에서 빠르게 역류했다. 순식간에 눈가가 달아올랐다.
눈물을 참기 위해 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짙게 내려앉은 어둠은 쉽게 표정을 감췄다. 그러나 자신이 그렇듯, 정언 역시 지금의 자신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이미 알아차렸을 터였다.
“안 죽을게요. 저 절대 안 죽어요. 그런 생각 하지 마세요.”
윤은 두서없는 단어들을 중얼거렸다. 그 말이 정언에게 닿는다는 확신은 없었다. 그러나 그런 건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떨리는 손으로 부드러운 머리칼을 어루만지고 그 뒷머리를 감싸 끌어당긴 윤은 어깨에 정언의 얼굴을 묻게 했다.
정언이 가는 숨을 뱉었다. 옅은 알코올의 자취가 그 숨결 끝에 잠시 묻어났다. 심장 부근에 스민 숨결이 녹아들었다. 한 팔에 그대로 들어오는 마른 몸에서 전해지는 체온과 떨림이 생생했다. 늘 그렇듯 희미하게 떠도는 눈의 냄새 역시도.
난공불락의 유리 성벽 뒤에는 무엇이 존재할지 늘 궁금했었다. 산산이 부서져 내린 성벽 앞에서, 윤은 마침내 그 너머를 보았다. 끝없이 펼쳐진 그림자가 아득했다. 슬픔과 두려움, 외로움과 나약함. 가장 인간적인 그 공허 속에 서 있는 건 오로지 한 소녀뿐이었다.
윤은 정언을 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주며 눈을 감았다.
지금 여기서, 그 소녀는 오로지 자신만이 아는 존재였다. 어둠이 걷히면 사라질 환상. 그러니 이 순간의 모든 조각들을 단 하나도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짙은 적막이 잠시 세상을 멈췄다.
아침부터 화창한 날씨였으나 출근하는 정언의 기분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피곤하고 지쳐서 씻고 나오기 무섭게 거의 기절하듯 잠들었다가 일어난 참이었다. 간밤에는 힘이 들어 아무 생각이 없었지만, 문제는 알람 소리에 눈을 뜬 순간부터였다.
잠시 천장을 보며 멍하니 누워 있는 사이 어젯밤의 일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른 정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아무도 안 보는데 혼자 창피해진 정언은 죄 없는 베개만 두들겨 패다 얼굴을 덮으며 한숨을 쉬었다.
윤은 정언을 집에 데려다주는 내내 거의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물론 정언은 그게 자신을 위한 배려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스스로도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소주 한 병도 채 마시지 않았으니 취했다는 핑계도 통하지 않았다.
형원이 딸과 통화하는 걸 보고 불현듯 마음 한구석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을 느낀 건 사실이었다. 만약에 아버지가 죽지 않았다면 늘 입버릇처럼 말했던 대로 YBS에 입사하지 않고, 평범한 회사에 다니며 아버지에게 언제 오냐고 전화를 걸어 대는 딸로 살 수도 있었을까.
무의미한 가정에 빠지는 데는 취미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 생각에 사로잡힌 건 어느 정도 알코올의 탓도 있을 거라고 정언은 애써 생각했다.
윤에게 죽지 말라고 말하며 울었던 건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범주의 일이었다. 평소라면 결코 하지 않을 생각과 약간의 취기가 합쳐진 결과물이 분명했다. 그렇게 컨트롤할 수 없는 감정들이 튀어나오는 빈도가 잦아지는 건 정언에게 결코 반갑지 않았다.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걸 간신히 참으며 트리플 샷 아메리카노 한 잔을 산 정언은 빨대를 입에 문 채 사무실 문을 열었다. 의자에 느슨하게 기대 눈을 감고 있던 재희가 실눈을 뜨고 정언을 보더니 건성으로 손을 흔들었다.
“일찍 왔네.”
“좀 더 성의 있게 인사할 수 없어요?”
“후배님 오셨다고 벌떡 일어나서 90도로 인사할까?”
재희가 정언의 농담을 받아쳤다. 그사이 어쩐 일인지 일찍 출근해 있던 철진이 핸드폰을 한쪽 귀와 어깨 사이에 끼우고 정신없이 뭔가를 메모하며 정언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정언이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며 자리에 앉자 곧 네, 고마워요, 하고 전화를 끊은 철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정언 쪽으로 몸을 숙였다.
“서 피디, 이현교 안다는 사람 나왔어.”
컴퓨터 전원을 넣던 정언은 그 말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디서요? 누가 안대요?”
“대구 YBS 가 있는 한승문 선배라고, 나 바로 위 기수. 이현교 사무실에 영상장비 있었다고 했잖아. 그게 상당히 고가라고. 지금은 구하기도 힘들고. 그래서 아무래도 이쪽 일 하던 사람 맞을 것 같아서 내가 방송국하고 프로덕션 쪽 사람들한테 연락 다 돌려 봤거든. 그랬더니 어젯밤에 한 선배한테 연락이 왔더라고. 선배가 대구 출신이라 거기 내려가서 일한 지 오래됐는데, 이현교 대구에서 외주 프로덕션 운영하던 사람이래.”
눈을 감은 채 의자를 돌리며 철진의 말을 듣고 있던 재희가 급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정언은 철진에게 되물었다.
“외주 프로덕션?”
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구 YBS에서 자체 방송하는 지역 정보 프로그램 하나 외주 따서 몇 년 했었다네. 그런데 그것도 당시에 한선당 지역구 의원들이 줄을 댔대. 이 프로덕션에 일 하나 주라고 대구 YBS 사장한테 찔렀다 그거야. 그리고 이현교가 당시에 한선당 선거용 홍보 영상, 당 행사 영상 이런 거 전문으로 제작했었대. 그래서 대구 YBS 교양국하고, 보도국 기자들이 그 사람 잘 안다고 하더라.”
“외주 프로덕션 제작자를 법영상분석전문가로 증인 출석시켰다 그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