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15
215화.
“저는 대학 막 졸업하신 분인 줄 알고…….”
말끝을 흐리는 보현에게 정언은 감사합니다, 하며 웃어 보였다. 빈말이든 아니든, 그녀가 타인을 대하는 데 아주 능숙한 사람인 건 확실했다. 세팅을 마친 윤이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정언은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입을 열었다.
“시간이 없다고 하시니까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편하게 말씀해 주시면 되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마시고요. 안영균 보좌관님이 엄대진 의원님하고 상당히 오래 전부터 같이 일하셨다고 들었는데요. 국회에서도 오래 같이하셨고 워낙 유능하시다 보니까 다른 의원님들이 많이 부러워하신다는 얘기 들었습니다. 두 분이 무슨 인연으로 만나게 되셨는지 아십니까?”
두 손을 깍지 끼어 입가에 대며 정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보현이 미소를 지었다.
“저희 남편은 어릴 적부터 수재다, 천재다 그런 얘기 많이 듣고 자랐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시댁 형편이 워낙 어려웠어요. 등록금이 없어서 대학 포기하려던 걸 의원님 댁에서 도와주셨죠. 남편은 대학 다니다 의원님이 정계 입성하신다는 얘기 듣고 사무실 청소라도 하겠다고 휴학하고 처음엔 무보수로 의원님을 돕기 시작했죠. 의원님은 어린 친구가 은혜 잊지 않고 그러는 걸 굉장히 좋게 보셨나 봐요.”
그게 안영균과 엄대진이라는 사실을 제외하고 생각해 본다면, 마치 그림으로 그린 듯한 전형적인 미담이었다. 가난한 수재와 젊은 정치인이라, 하고 속으로 뇌어 본 정언은 보현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 계기로 보좌관 일을 시작하신 거고요?”
“네. 남편은 굉장히 원칙적인 사람이에요. 남한테 빚지는 것 아주 싫어하고요. 정치 쪽 일 할 생각은 없었던 걸로 알아요. 자기가 받은 게 있으니까 갚아야겠다고 생각해서 시작한 거였죠.”
보현의 입으로 듣는 안영균은 자신들이 지금까지 추적해 오던 것과는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은혜를 잊지 않는 청년, 원칙적인 사람, 빚지는 것을 싫어하고 정치에는 관심 없던 남자…… 보현의 말 중 어느 정도가 사실인지 궁금해진 건 당연했다.
정언은 화제를 돌렸다.
“그러면 사모님하고는 어떻게 만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소문으로는 집안 차이가 많이 났다고 하던데요.”
이런 식으로 말을 꺼내는 건 정언에게도 그다지 편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보현은 이미 그런 이야기에는 초탈했다는 듯 작게 웃었다.
“아버지께서 의원님 집안하고 오래 전부터 친분이 있었어요. 집안 모임 하는 자리에서 제 얘기를 하면서 과년한 딸이 있다고 하니까, 의원님이 아주 괜찮은 친구 하나 소개시켜 주겠다고 먼저 얘기하셨대요. 아버지께서 사무실 갔다가 보셨는데, 집안은 볼 것 없어도 남자가 과묵하고 똑똑하니 그만하면 됐다고 아주 마음에 들어 하셨죠.”
“사모님께서도 첫인상이 괜찮으셨나요?”
그 말에 보현의 입매가 슬며시 말려 올라갔다. 오래전의 일을 되짚는 듯 보현이 잠시 눈을 감았다. 마스카라를 꼼꼼하게 바른 속눈썹 위로 햇살이 떨어져 맺혔다. 첫눈에 확 들어오는 화려한 미인은 아니었으나, 분위기나 말투, 행동 같은 것들이 눈을 끄는 부분이 있었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커피 잔 위로 스몄다.
“호텔 커피숍에서 만났는데, 무척 낡은 양복을 입고 나왔던 게 아직도 기억나요. 팔꿈치 양쪽을 이렇게 덧대 놨었죠.”
보현은 자신의 원피스 팔꿈치 부분을 손끝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그것도 누가 봐도 어설프게 했어요. 혹시 직접 하셨냐고 물어보니까 남편이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었어요. 가난한 걸 민망해 하지 않아서 좋았죠. 열등감이 없는 사람 같았거든요.”
아주 훌륭한 화가가 그린 동화책을 한 장씩 넘기는 듯한 기분이었다. 가난하고 똑똑한 남자와 부유하고 현명한 여자의 첫 만남. 언제, 어느 페이지를 펴더라도 눈이 사로잡힐 수밖에 없을 것 같은 이야기였다. 트집 잡을 곳 없는 아름다움, 조형적으로 완벽한 장면들.
정언은 보현의 표정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 주의하며 말을 이었다.
“열등감 있는 사람은 안 된다, 그런 게 확고하셨나 봐요.”
“네. 아버지께서 지역 유지셨으니까, 사실 그게 지역에서나 좀 대접받는 자리지, 나가면 별것 아니거든요. 그런데도 그런 부분을 자존심 상한다고 생각하는 남자들이 많았어요. 아버지도 그런 남자들은 집안에 들여 봐야 부인 위할 줄도 모르고 분란만 된다고 말씀하셨고요. 남자가 자기 집안에 돈이 많고 권세가 있으면 부인을 우습게 알고, 가진 것 없는데 자존심만 있으면 부인을 괴롭게 한다고 하셨죠.”
조용하고 부드러운 말투였으나 정언은 거기서 얼핏 어떤 확고함을 느꼈다. 이미 몇 십 년이 지난 일일 텐데도 아버지의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건, 본인 역시 그 말을 오랫동안 생각해 왔다는 증거일 터였다.
“아버님은 무슨 일을 하셨나요?”
“그냥 조그만 건축 하청, 그런 거였어요. 이제는 연세가 많으셔서 접으신 지 오래됐고요. 사업 정리하시고 노후자금 제한 나머지는 여기저기 봉사 단체 같은 데 전부 기부하셨어요.”
건축 하청이라는 말을 듣기 무섭게 윤이 멈칫했다. 정언은 테이블 아래로 윤의 무릎을 표시 나지 않게 살짝 눌렀다. 티 내지 말라는 뜻이었다. 다행히 보현은 윤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그 부분에 대해 집요하게 캐묻는다면 자신들의 목적이 순식간에 들통 날 건 뻔했다.
보현의 말대로 정말 조그만 건축 하청이었다면 지역 유지라고 스스로 말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엄대진과 오래 전부터 집안끼리 알던 사이였다면, 서온건설과도 연결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봉사 단체에 기부했다는 말 역시 마음에 걸렸다. 소규모 자선단체는 공시 의무가 없다, 어게인라이프는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던 형원이 떠올랐다. 정언은 그 생각에 사로잡히기 전 바로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다. 상대에게 여지를 줄 시간이 없었다.
“봉사 활동은 언제부터 시작하시게 된 건가요?”
“첫아이 낳고부터 시작했었어요. 교회도 그때부터 나갔고요. 의원님 따라 연고 없는 지역으로 이사를 오니까 제가 많이 외로웠어요. 그래서 남편이 교회에 다녀 보는 건 어떠냐고 권해 줬죠.”
“모든 삶이 의원님에게 맞춰져 있었군요.”
정언이 슬쩍 떠보자, 보현은 평온하게 대답했다.
“남편이 보좌관을 택했을 때부터, 어떻게 보면 숙명이죠. 그때 아이 키우면서 처음이라 참 미숙한 엄마였어요. 힘도 들고 원망도 했는데, 교회 다니면서 처음으로 아이라는 존재가 정말 은총이구나, 그렇게 생각이 바뀌더라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총에 보잘것없는 인간인 내가 어떻게 보답해야 하나 생각하다 봉사 모임에 들게 된 거고요.”
“대단하시네요.”
“아니에요. 부끄럽지만 거기 나가기 전에는 그렇게 어려운 분이 많은 줄 몰랐어요. 일하다 보니까 도움이 필요하신 분들이 정말 많고, 내가 지금까지 이런 분들을 외면하면서 살았구나 하는 죄책감이 심하게 들었어요.”
보현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정언은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쉽지 않으셨을 텐데요.”
“처음에는 모임에 갔다 오면 굉장히 많이 울었어요. 남편이 그렇게 힘들어할 거면 하지 말라고 할 정도로요. 저한테 목소리 한 번 높인 적 없는 사람인데, 그때는 몇 번 싸웠어요. 남편이 좋은 일 하는 건 좋지만 당신이 힘들어지는 걸 바라지는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막상 내일은 가지 말아야지, 생각하면서 자리에 누우면 내가 그 하루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또 떠올라요.”
순간 정언은 형원이 왜 그녀를 의심하지 못했는지 깨달았다. 만약 그녀가 위선자라 해도, 이토록 철저한 위선자가 되기 위해서는 악행을 저지르는 것 이상의 노력이 필요한 건 분명했다.
정언은 문득 자신이 만났던 이들을 생각했다. 자기 돈으로 갈 곳 없는 고아들을 먹이고 입히고 가르친다며 생불로 소문났던 스님은 어린 여자아이들을 성폭행하는 소아성애자였고, 노숙자와 빈민을 돕는다며 다큐멘터리까지 찍었던 목사는 헌금을 빼돌려 강남에 빌딩을 몇 채씩 사들였다.
그런 부류의 인간은 두 손으로 꼽을 수도 없을 만큼 많았다. 그들 모두 수십 년 동안을 그 위선을 유지하며 살던 이들이었다. 누구도 감히 그들을 의심하지 못했다.
위선의 이면은 쉽게 드러나지 않았다. 그 위선의 가면이 강력하면 강력할수록, 그림자 속의 사람들은 더 앞으로 나서기를 두려워하기 마련이었다. 정언이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하자, 보현은 핸드백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새 빨개진 눈가를 눌렀다.
“죄송해요. 제가 이 일을 무척 오래 했거든요. 그런데도 사람이 무뎌지지가 않네요. 세상은 점점 살기 좋아진다고들 하는데, 왜 이렇게 도움을 받아야 될 사람들은 더 많아지는지 모르겠어요.”
“남편분께서 여기 집중하는 걸 서운해 하지는 않으세요?”
그 물음에 순간 보현의 얼굴에 낯선 표정이 스쳤다. 착각인가 느낄 정도로 짧은 찰나였다. 정언은 그 표정의 정체를 명확히 설명할 말을 찾지 못했다.
보현이 대답했다.
“남편은 그저 의원님 도와서 더 좋은 나라 만드는 것, 그것 하나만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다른 해석의 여지는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단어들이었다. 모든 답변은 마치 언제든 준비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언은 미소를 지었다.
“의원님이 이번 대선에서 좋은 결과 얻으시면 사모님께서도 하실 수 있는 일이 더 많아지겠네요.”
보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매일 남편보고 더 열심히 일하라고 성화를 하죠. 의원님이 잘돼야 당신도 잘되고, 당신이 잘돼야 나도 사람들 더 많이 도와줄 수 있다고요.”
“이미 의원님 승리 확신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저한테는 참 다행이죠. 민주영 의원님이 되셔도 좋겠지만, 엄대진 의원님이 대통령 되시면 제가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이 더 많아질 테니까요.”
제가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
일개 보좌관의 부인이 하는 말치고는 묘한 뉘앙스였다. 마치 예비 영부인의 인터뷰를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정언은 그녀를 조금 더 밀어붙여 보기로 마음먹었다.
“요즘 여의도에서는 의원님이 당선되시면 차기나 차차기는 안 보좌관님이 유력하지 않겠느냐,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고 하던데요. 혹시 들어 보셨어요?”
“글쎄요. 참 재미있는 얘기네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요.”
보현이 짧게 웃었다. 그런 말은 들어 본 적도 없다는 투였다. 그건 자신들의 유력한 예상 시나리오였다. 철저한 외부인의 시선으로도 예상 가능한 일을 본인들이 생각해 본 적 없다는 건 믿기지 않았다.
“당선되시면 당연히 의원님이 보좌관님 챙겨 가실 테고, 다음 지선 찍고 총선 가면서 국회 입성하시면 충분히 가능성 있다고 보는데요.”
“남편은 원칙적인 사람이라고 말씀드렸죠? 그런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아요. 제가 항상 당신은 조금 더 융통성이 있어야 한다고 얘기하거든요.”
“사람이 자리를 만드는 게 아니라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 아닙니까?”
“자리가 사람을 선택하기도 하죠.”
정언은 자신과 보현 사이의 공기가 당겨지는 것을 느꼈다. 까닭 없이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정보현이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걸 새삼 자각하자 입 안이 말랐다. 정언은 표정을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