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16
216화.
“의원님이 더 높은 자리로 가신다면 사모님께서도 뜻 펼치기가 좀 더 수월하실 텐데요.”
“남편은 권력에 큰 욕심 없어요. 말씀드렸지만 오로지 의원님, 나라에 도움 되는 정책에 대해서만 생각하니까요.”
단 한 줄도 수정할 필요가 없는 책처럼 보현의 대답이 돌아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말을 그냥 표면적인 의미로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보현이 더 멀리를 생각한다면, 지금 자신에게 하는 모든 대답 역시 향후의 일을 위해 오래 전부터 마련된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안영균에 대해 무엇을 묻더라도 보현은 철저히 준비된 대답을 할 터였다.
정언은 그녀를 응시했다.
“혹시 어게인라이프라는 단체에 대해 잘 아세요?”
“제가 홈리스 자활 지원 봉사 활동 함께하는 곳이에요. 왜 그러시죠?”
불시의 습격이었던 듯, 보현의 단정한 눈썹이 미묘하게 잠깐 움직였다. 정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는 얼굴을 했다.
“저희가 아는 분이 거기하고 일하시는데, 사모님 칭찬을 굉장히 많이 하셔서요.”
“그래요?”
미소를 짓던 보현이 갑자기 핸드백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서둘러 핸드폰을 집어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 잠시만요. 전화가 와서요. 통화 잠깐만 하고 올게요.”
보현이 2층에 연결된 테라스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정언은 그녀의 뒷모습에 눈을 둔 채 윤에게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갔다 오면 인터뷰 접자고 하겠는데.”
그때까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윤이 물었다.
“왜요?”
“핸드폰에 아무것도 안 떴는데 전화 왔다면서 들고 나갔어. 어게인라이프 얘기하자마자 낌새 챈 거지. 지금 그쪽하고 통화하러 간 것 같아.”
보현이 쥔 핸드폰의 액정은 암전된 상태였다. LED 표시등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 짧은 사이 그것을 확실히 캐치한 정언은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보현을 지켜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5분쯤 지나 돌아온 보현이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피디님, 죄송합니다. 오후 약속이 갑자기 당겨져서요. 제가 지금 바로 일어나야 할 것 같아요. 혹시 다음번에 다시 연락드려도 될까요?”
“네, 그럼요. 저희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선뜻 대답한 정언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보현이 얼른 사양했다.
“아니에요. 근처라 제가 바로 가면 돼요.”
“택시비라도 저희가 먼저 지불하면…….”
“괜찮아요. 내려가실까요?”
정언의 제안을 다시 거절한 보현이 핸드백을 집어 들며 먼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카페를 나선 보현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얘기도 다 못 했는데 죄송해서 어쩌죠?”
윤이 괜찮습니다, 하고 웃어 보이자 보현이 지갑을 꺼내 안에서 명함 한 장을 건넸다.
“이거 저희 남편 명함인데, 다음번에는 이쪽으로 먼저 연락 주시겠어요?”
명함을 받아 든 정언은 깍듯하게 보현에게 다시 한 번 사과했다.
“알겠습니다. 오늘 저희가 무례했던 거 정말 죄송합니다. 인터뷰 응해 주셔서 감사하고요.”
“아니에요. 또 뵙겠습니다.”
묵례를 건넨 보현이 길가에서 택시를 잡아탔다.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고 있던 윤이 혀를 내둘렀다.
“말하는 게 고단수인데요.”
정언은 팔짱을 끼며 그 말을 받았다.
“정보현 인터뷰를 한 사람이 지금까지 아무도 없잖아. 그런데 모든 내용에 답변이 이미 다 준비가 돼 있다고. 말 한 번 안 더듬는 거 봤어?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 수천 번은 돌려 본 사람이야.”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윤이 물었다.
“안영균 출세에 대해서는 별 관심 없는 사람 같긴 하지 않아요?”
윤이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안영균의 출세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보현이 철저히 선을 그은 탓이었다.
원칙적인 사람, 그런 자리는 어울리지 않는다, 융통성이 없다, 자리가 사람을 선택한다…… 일견 그건 남편이 출세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들리는 단어들이었다. 정언이 몸을 돌려 차를 세워 둔 곳으로 걷기 시작하며 대답했다.
“임 기자님이 정보현은 의심하기 힘들다고 얘기하신 것도 그래서겠지. 사실은 목적이 반대니까, 안영균에 포커스 맞춰서 본다면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을 것 같아.”
“반대라고요?”
“우리는 안영균이 배지 달고 여의도 입성하는 게 목표라고 생각했잖아. 정보현도 그거 위해서 저러는 거고. 그런데 정작 정보현은 자기 자신한테 더 관심이 있는 느낌 아냐? 아버지가 했다는 얘기부터 딱 그런데. 데릴사위 들인 거라고. 돈 없고 말 잘 들을 놈 골라서. 엄대진 집안하고 원래부터 친했다는 거 보면 아버지도 속셈이 있었던 거지.”
“모든 걸 다 정보현이 조종한다는 거예요?”
정언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그렇게까지는 아니라도 내가 보기엔 동상이몽에 더 가까워. 돈 없고 백 없는 남자가 아무 이득 없이 오로지 충성심만 가지고 엄대진 밑에서 그 세월을 버틴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데 엄대진이 굳이 집안 차이 그렇게 나는 결혼 권했고, 안영균이 거기 응한 건 본인도 속셈 있었다고 봐야지. 안 그렇겠어?”
“하긴 집안끼리 친했는데 굳이 안영균 같은 남자를 권해 준 건 좀 이상하긴 하네요.”
“중매 잘못 서면 뺨이 석 대라는 속담이 왜 있겠어. 그런데도 그런 남자 소개한 거 보면 그 중매 선 엄대진, 그거 받아들인 정보현하고 아버지, 그 집안에 들어간 안영균 각자 다 생각이 있었던 거지. 정보현 집안에서는 엄대진 측근 집안에 들여 커넥션 강화하고, 안영균은 자금 받쳐 줄 처가 얻고, 엄대진은 빨대 꽂을 자리 하나 더 만들고.”
말을 하는 도중 생각은 점점 더 명료해졌다. 서로가 서로의 이득을 위해 물고 물려 있는 관계. 잘 짜인 그물일수록 첫코를 더듬어 올라가는 건 쉽다. 이현교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했던 것이 떠올랐다.
철저한 이익 연합, 그러니 그 결속을 해지하기 위해서는 아주 작은 계기 하나면 충분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안 순간부터 조직은 붕괴하기 시작할 게 분명했다.
어게인라이프에 대해서만 마저 알아낸다면 방송으로 내보낼 수 있는 거의 모든 얼개를 갖출 수 있었다. 정언은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실제로 숫자 만지는 건 안영균이 개입해 있을 텐데, 어게인라이프 같은 건 정보현 작품일 거야. 남편한테 하는 말 봐. 융통성 없고 그런 자리에는 안 어울린다. 하지만 자기는 야심이 있다고. 원하는 걸 하기 위해서는 권력이 필요하다고 하잖아. 자기 말대로 그게 더 많은 사람을 위해 일할 수 있는 힘인지, 아니면 어떤 사람들을 위한 힘인지는 모르겠지만. 부부가 서로 하는 일에 대해서는 모든 정보 공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겠네.”
“그럼 만약에 안영균이 위험해지면 정보현이 남편을 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요?”
윤 역시 같은 생각을 한 듯했다. 정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도 그래. 천사 같은 사모님으로 십 몇 년을 이미지메이킹 철저하게 해 왔다고. 안영균이 안 걸려들어 간다면 다행이지만, 걸려들어 간대도 정보현은 그걸 더 현명하게 써먹을 거야. 이런 대형 교회에 오래 다녔으면 인맥만도 장난 아닐 거거든. 오히려 지금 부인끼리 붙인다면 엄대진 와이프보다 정보현 쪽이 체급 훨씬 높을걸. 지역 유지고 엄대진 집안이랑 오래 전부터 연 있었다면 비례대표 입성하는 건 일도 아닐 수 있어.”
“그 반대도 가능하겠네요.”
“우리 생각대로라면 어게인라이프 건으로 정보현이 걸려 나간다, 그 순간 안영균이 먼저 선 긋겠지. 자기는 몰랐다고. 안영균까지 간다면 엄대진이 잘라 낼 테고.”
정언은 엄대진에게 모든 사람은 부품에 지나지 않는다던 말을 상기했다. 안영균은 개중 중요한 부품일 뿐이었다. 지금까지 엄대진이 해 온 일을 생각해 본다면, 안영균이 절대 대체될 수 없는 어떤 것일 리 없었다.
정언은 세워 둔 차의 문을 열었다. 윤이 조수석에 타며 물었다.
“인터뷰 다시 응할까요?”
“절대 안 할걸. 자기 번호 알려 줘도 되는데 남편 명함 주는 거 봐. 안영균 선에서 차단할 거야. 어게인라이프는 사실 거의 무명 단체나 다름없는데 갑자기 취재하겠다고 하고, 철진 선배가 이현교랑 통화도 했고. 어게인라이프 관리하는 쪽하고 연락했으면 추적당하고 있다는 거 눈치 깠을 확률 높지.”
“어렵네요.”
윤이 가벼운 한숨을 뱉었다. 운전석에 앉은 정언은 가방을 뒤로 던져 놓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그래도 김 피디 덕분에 말이라도 붙여 봤으니까 다행이네.”
윤이 민망하다는 표정으로 손을 휘적거렸다.
“에이, 저 때문은 아니죠.”
“정보현이 엄청 좋아하는 거 못 봤어? 김 피디가 정말 안 될까요? 이러니까 표정부터 완전 달라지던데.”
“그 정도까지는…….”
“안 통하는 여자 없어서 좋겠어, 김 피디는.”
놀리려고 시작한 말이었으나 무의식중에 끝이 부루퉁해졌다. 정언은 말을 뱉은 직후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누구나 윤을 좋아하고, 윤에게 쉽게 경계를 낮춘다는 건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런 기분이 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보현 앞에서 생글생글 웃던 윤의 얼굴이 뇌리를 지났다. 윤이 누구에게든 그런 얼굴로 웃는 건 자기 자유였고,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속이 문득 뜨끔해졌다.
그렇게 티가 났는데 윤이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옆얼굴을 빤히 보는 시선이 느껴져 귓가가 달아올랐다. 윤이 짐짓 도무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투덜거렸다.
“보좌관 사모님한테도 통하는데, 왜 선배한테는 안 통하는 거 같죠?”
그 말에 정언은 저도 모르게 욱하는 심정이 되어 되물었다.
“얼마나 더 통해야 만족할 거야, 도대체?”
사람을 이만큼 흔들어 놨으면 됐지, 얼마나 더 엉망으로 만들어 놓을 심산일까 생각하자 열이 올랐다. 정언이 정말 열 받은 표정으로 윤을 마주 보자 정언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윤이 씩 웃었다. 무슨 생각 하는지 다 안다는 듯한 그 눈빛에 정언은 미간을 구겼다.
“뭐야, 그 얼굴.”
“제가 웃으면 더 괜찮잖아요.”
윤이 마치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 받아쳤다. 그건 물론 이미 너무나 잘 아는 사실이었다. 대답할 말을 잃은 정언은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짧은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윤을 이겨 먹는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 같았다.
포기한 정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액셀을 밟았다. 쏟아지는 햇살을 가르며 차가 움직였다.
“……됐으니까 점심이나 먹고 들어가자.”
윤이 쿡쿡 웃으며 네, 하고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