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17
217화.
재희는 책상 위에 펼쳐진 신문에 눈을 주었다. 를 비롯한 각종 조간들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미간을 문지르며 신문을 접으려던 재희는 문득 손을 멈췄다. 오늘 발표된 여론조사 결과 기사의 제목이 시선을 붙든 까닭이었다.
‘엎치락뒤치락 표심, 추격자 민주영 가속 붙나.’
엄대진과 민주영의 가상 양자 대결 여론조사 결과, 민주영이 처음으로 앞서기 시작했다는 내용이었다. 아직 오차 범위 내이긴 했지만 분명 주영 측에서는 의미가 있는 결과임이 틀림없었다.
재희는 책상 위에 놓인 탁상 달력을 집어 들었다. 칸칸마다 빼곡하게 채워진 메모들이 가득했다. 쫓기는 자는 언제나 마음이 급하기 마련이었다. 엄대진의 인내심이 그리 오래갈 것 같지는 않았다. 눈으로 남은 날짜를 세어 보던 재희는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며 호형이 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엘리베이터도 안 타고 계단을 달려 올라온 건지, 시뻘게진 얼굴로 숨이 턱까지 차서 헉헉거리던 호형이 물 한 잔을 마시고는 겨우 입을 열었다.
“변정화 소유로 된 계열사 자료 확인 끝났습니다. 이상연 변호사님하고 오인영 세무사님 말로 분식회계 하고 있는 거 확실하다는데요. 그리고 세무법인 통해서 거래처 내부자들 제보 받았는데, 영수증 허위 청구 방식을 제일 많이 사용한대요. 거래 금액보다 영수증 청구 금액 크게 해서 발행 요청하고, 차액 챙기는 방식으로 넘어가는 것 같더라고요. 납품 시에 아예 영수증 없이 무기장39) 요구하는 경우도 상당히 있었답니다. 거래처에서 나온 증빙 자료 확보해 뒀고요.”
마지막 미팅이 방금 끝난 모양이었다. 그 말을 들으며 빠르게 메모를 한 재희는 호형에게 물었다.
“부동산 거래 차익 관련된 부분은?”
“이현성 대표님 만나서 엄대진 가족들이나 엄대진계 의원들 소유로 된 부동산 등기부등본 싹 떼고 거래 내역 알아봤거든요. 대부분 공시지가는 당연하고 실 거래가하고도 안 맞는 금액으로 매매됐어요. 변정화나 가족들 명의로 된 땅 사 간 업체들 기업정보 조회했는데 한 군데도 안 나오고요. 이 대표님 소개로 강남에서 땅 놀이 전문으로 하는 부동산 전문가들도 만나 봤는데, 그 사람들 말로 엄대진 측근들이 어디 샀다 소리 들리면 그 인근 부지 무조건 매입하는 게 법칙이래요. 거의 백 퍼센트 개발 호재 걸린다고.”
숨도 쉬지 않고 대답한 호형이 다시 한 번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벌컥벌컥 들이켰다. 재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무실 안을 둘러보았다.
“알았어. SO 컴퍼니 자금 흐름 확인하는 건 어떻게 됐어? 누가 봤지?”
석현이 모니터에 눈을 둔 채 손을 들어 보였다.
“내가. 호형이가 연결해 준 국세청 쪽 정보원하고 얘기했어. SO 컴퍼니 그거 국세청 감사 쪽에서도 몇 년 전부터 계속 얘기 나온다던데.”
“그래?”
“SO 컴퍼니 공시 자료 확보했는데 연간 매출액이 한화로 몇 억 안 돼. 그나마도 최고치일 때. 대체 에너지 사업이라고는 돼 있는데 실제로 그리스에서 무슨 사업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그게 실제 매출인지도 확인이 안 되고. 그런데 매출 겨우 그거 나오는 회사에 한국에서 수십 군데 유한회사가 적게는 몇 억대, 많게는 수십 억대 투자 금액을 넣고 있어서 감시한 지 오래됐다네.”
재희는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하다 눈썹 위를 긁적였다.
“이미 말 나오고 있는데도 못 잡았으면 위에서 프레셔 있었다는 거겠네.”
석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감사 목록에서 아예 제외하라고 오더 내려왔다는 얘기 있대.”
그 명령을 누가 내렸을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뻔했다. 호형이 가까이 다가와 손에 말아 쥐고 있던 서류 뭉치를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든 재희는 서류를 펼쳐 보았다. 회사 이름과 폐업 날짜가 기록된 서류였다.
“안 피디, 이게 지금 투자 금액 넣은 뒤에 폐업 처리된 회사 리스트야?”
“알았어. 체크해 볼게. 앉아서 숨 좀 돌리고.”
재희가 손짓하자 호형이 의자에 풀썩 소리가 나게 주저앉으며 등을 기댔다. 한여름 아스팔트에 떨어진 아이스크림처럼 늘어지는 호형을 본 재희는 픽 웃고 다른 사람들에게 물었다.
“아, 명의 도용 관련해서 연락 돌려 보라고 했잖아. 뭐 건진 거 없어?”
철진이 그 말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대답했다.
“경제부하고 사회부 인맥 다 털고 경찰하고 민변, 상생변까지 다 털어 봤는데 연락받은 것 중에 비슷한 사례가 몇 건 있어요. 에서 가져온 자료하고 중복되는 건 제외하고 세 건 정도더라고요. 전화해서 확인해 봤는데 대부분 집에서 실종 처리도 안 하고 있다가 국세청에서 고지서 받고 경찰에 신고하거나 법률 상담 받은 케이스던데요.”
“눈에 띄는 거 있었어?”
“그 중에 강남서 지능범죄수사팀에 걸린 게 하나 있거든요. 여기는 아예 담당 형사 말로 작년 초에 강남서 관할이라고 사건 넘어왔는데, 서장 선에서 조사 중지 오더 떨어졌다고 얘기하더라고요.”
서장 선에서 조사 중지 명령이 떨어진 거라면 그 윗선에서 압박이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SO 컴퍼니에 대한 국세청 조사 중지 명령도 그렇고, 이 건 역시도 어디와 관련이 있는지는 뻔했다.
“확실해?”
재희가 다시 한 번 묻자 철진이 자기 핸드폰에 메시지 화면을 띄워 흔들어 보였다.
“네. 담당 형사가 당시에 서장이 조사 중지 지시한 문자 메시지 가지고 있어서 그거 받았어요.”
“좋아. 혹시 명의 도용당한 당사자하고 연결되면 정보현 안다고 하는지 확인 좀 해 볼래? 큰 그림은 거의 다 나왔으니까 디테일만 채우자고.”
철진이 네, 하고 대답했다. 서 있던 재희는 등 뒤의 창턱에 걸터앉았다. 아침 식사야 대부분 거르는 편이니 그렇다 치고, 점심도 제대로 먹지 않았다는 게 떠오른 건 그때였다.
최대한 잘 먹고 잘 자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신경 쓸 일이 워낙 많다 보니 마음대로 되는 적은 그다지 없었다. 관자놀이 부근을 누르던 재희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법 길어진 해가 빌딩 숲 너머에서 짙은 주황색으로 하늘을 물들였다.
잠시 숨을 돌린 재희는 다시 민혜에게 시선을 주었다.
“송 작가, 한선당하고 이현교 무슨 관계인지는 확인해 봤어?”
민혜가 손가락으로 오케이 사인을 만들어 파티션 위에서 흔들거렸다.
“대구 YBS에서 자료 왔고, 현선준 기자가 알아봐 줬어. 한선당 홍보국에서 영상 제작 외주 하는 곳 중 하나라네. 영상 편집이나 그런 거 외주 형식으로 이현교 앞으로 발주 내는 것 같아.”
민혜의 말을 듣고 있던 호형이 헛웃음을 뱉었다.
“와, 대박. 걔들 영상 진짜 쌍팔년도 감각 장난 아니던데 그걸 돈 주고 하는 거였어요?”
민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펄쩍 뛰었다.
“어머, 호형. 그거 아주 정확한 타기팅이라고. 무시할 게 아냐. 강렬하잖아. 북한! 빨갱이! 공산당! 팍 오지 않아? 새마을 운동의 향수, 5공 시절, 독재의 향기. 얼마나 좋아?”
“그렇게까지 팍 올 필요가…….”
호형이 말꼬리를 흐렸으나 민혜는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이게 재밌는 게 어게인라이프가 노숙자 자활 단체잖아. 한선당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의원들이 봉사 단체라고 만들어 놓은 사조직이 있는데, 찾아보니까 여기서 홈리스 자활 명목으로 교육 지원하는 게 있어. 이현교가 어게인라이프에서 홈리스 영상 기술 교육한다고 하고서 그거 외주 수주하고 돈 받아가는 거 아닌가 싶어. 이름 가짜로 올려놓고.”
머리 좋네, 하고 중얼거린 재희는 민혜에게 말했다.
“오케이. 이현교 관련 자료 싹 상생변 박기율 변호사님 앞으로 보내 줘. 박 변호사님이 허주경 사장 강제 이감하고 검찰 증거 조작, 평진 공윤승하고 검찰 담합 걸어서 고발하겠다면서 변호인단 구성한다고 그랬어. 이현교랑 검찰이 짜고 증거 조작했다는 거 알려 줘야지.”
“허 사장 강제 이감된 거 확실하대?”
재희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변호사님이 계속 면회 신청하다 거부당하니까 계속 이러면 언론에 뿌리겠다고 했나 봐. 그렇게 협박하니까 면회 신청 받아 줘서 만나 봤는데, 허주경 사장 자기가 왜 이감됐는지 이유도 모르더라는데.”
“어머머, 미쳤어 진짜.”
민혜가 입가를 가리며 앉아 있던 지혁의 어깨를 찰싹찰싹 쳤다. 프리뷰 파일을 확인하던 지혁이 불시의 습격에 화들짝 놀라며 맞은 어깨를 문질렀다. 그때 이어폰을 꽂고 앉아 있던 현진이 턱을 괸 채 어, 하며 자기 모니터를 가리켰다.
“지금 변순철 병원 이송한 거 뉴스에 나온다.”
“뭐라고 그래요?”
재희가 묻자 현진이 잠깐만 기다려 보라는 듯, 한 손을 들고 있다가 곧 대답했다.
“에서는 건강에 문제는 없는데 노환 때문에 당분간 안정이 필요하다, 이게 오피셜인가 보네.”
옆에서 몸을 내밀고 현진의 모니터를 보던 찬수가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무슨 안정을 죽을 때까지 시켜, 얘들은.”
“이게 죽을 때까지 안정하는 거냐? 죽었는데 안정하는 거지.”
현진이 정정하는 말에 찬수가 으, 하며 자기 어깨를 감싸고는 부르르 떨었다.
“그러네. 어우, 무서워. 사위가 뭐라고 죽고 싶을 때 죽지도 못하냐.”
“그것도 자기 업이지, 뭐. 사위 대통령 만들겠다고 별짓 다 하니까 자기도 죽어서 별짓을 다 당하는 거 아냐. 끼리끼리 논다니까 그런 놈 들였지.”
구시렁댄 현진이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한선당 후보 단일화 거의 확실한 건가? 지금 이번 주 안에 단일화 발표할 것 같다고 나오는데.”
재희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내려와 현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한쪽 구석에 실시간 뉴스 스트리밍 창을 띄워 놓은 현진의 모니터에서 ‘한국선진당, 이번 주 내에 후보 단일화 가닥’이라는 헤드라인이 선명했다.
재희는 현진의 등 뒤에서 팔짱을 끼었다.
“확실하지 않더라도 언론에 계속 흘리는 거 보니까 다른 후보들 압박하는 거겠죠. 괜히 경선에 힘 빼지 말고 좋게 단일화하자고. 뭐라는데?”
현진이 한쪽 귀의 이어폰을 고쳐 끼며 대답했다.
“민주영 지지율이 계속 상승세라 엄대진 쪽에서 보수 단일화만이 살길이다, 이 프레임 짠 것 같은데. 야권이야 어차피 다른 대안 없으니 거의 단일화한다고 봐야 되고.”
“만약에 한선당에서 단일화하면 민권당도 야권 후보 단일화할 가능성 높겠네요. 엄대진이 지금 이렇게 압박 강하게 넣는 게 오늘 여론조사 때문인 것 같은데요. 보수 성향 강한 여론조사 기관인데, 민 의원님이 3퍼센트 정도 앞서더라고요.”
그 말에 찬수가 고개를 돌려 재희를 쳐다보았다.
“3퍼센트 정도면 아직 오차 범위 안이긴 한데, 그렇게 위협적인가?”
“그런데 민 의원님이 여기 여론조사에서 엄대진 이긴 게 처음이에요. 40대 이상 연령대 지지율도 점점 올라가고 있고. 엄대진 입장에서는 조바심 날 수밖에 없겠지. 자기는 지금 모든 게 악재니까.”
“악재인 김에 확 망했으면 좋겠네.”
“그게 그렇게 쉽게 되면 여태 망해도 열 번은 망했죠.”
재희는 찬수가 하여튼 부정적인 새끼, 하며 옆구리를 찌르려는 걸 재빨리 피했다. 석현이 의자 등받이를 젖히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니, 그런데 이규완은 도대체 뭐하고 있대? 이렇게 며칠씩 두문불출하면서 시간 끌어 봐야 얻을 게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