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19
219화.
“니들이 내 것까지 다 먹어라. 나 강재희랑 커피 한잔하고 올게.”
진솔과 도하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부장, 하고 불렀으나 한동은 본 척도 하지 않고 재희를 떠밀며 사무실을 나섰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초조하게 바닥을 발끝으로 치던 한동이 거의 속삭이듯 물었다.
“연락 왔냐?”
고개를 끄덕인 재희는 열린 엘리베이터에 탔다. 한동은 답지 않게 긴장한 듯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층수 표시등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엘리베이터가 지하 주차장에 도착하기 무섭게 한동이 먼저 뛰어나갔다.
재희는 등 뒤에서 B-11이요, 하고 목소리를 높이며 한동을 쫓아갔다. B-11 구역의 여성 전용 주차 칸에는 선팅이 짙게 된 외제 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시동은 아직 켜진 채였다.
가까이 다가간 재희는 조심스럽게 운전석 창을 두드렸다. 반 뼘이나 될까 말까 할 정도로 약간 창이 내려갔다. 검은 선글라스를 낀 여자가 그 사이로 재희를 보았다. 수향인 모양이었다.
“사모님 되십니까?”
“생각보다 너무 젊으시네?”
재희가 묻자 대답 대신 툭 내뱉은 말이 되돌아왔다. 수향이 창을 조금 더 내리더니 운전석에 바짝 붙어 선 재희에게 비키라는 손짓을 했다. 재희가 얼른 한쪽으로 물러나자 수향이 차 문을 열고 내렸다.
새까만 선글라스 탓에 눈은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고집스러운 입매나 냉랭한 표정이 그 성격을 말보다 더 선명하게 드러냈다. 눈치를 살피던 한동이 얼른 지하 미팅룸으로 통하는 통로를 가리켰다.
“이쪽으로 들어가시죠.”
한동이 앞장서 복도 끝의 빈 미팅룸 문을 열었다. 재희는 수향을 먼저 안으로 안내하고는 문을 닫으며 맞은편에 앉았다. 재희가 핸드폰의 녹음 기능을 켜 탁자 위에 올려놓은 사이, 수향이 지겨워 정말,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들고 온 핸드백을 열어 안을 휘적거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다 귀찮다는 듯 작은 핸드백 안의 내용물을 모조리 탁자 위로 쏟아 버렸다. 안에서 지갑이며 차 키, 립스틱, 조그만 약병과 처방받은 약 봉지 등이 아무렇게나 흩어졌다.
재희는 그 약병이 안정제인 것을 즉시 알아보았다. 자신 역시 연수의 죽음 직후 같은 약을 처방받은 적이 있어서였다. 예민한 사람이라고 느낀 건 기분 탓만은 아닌 듯했다. 재희는 짐짓 그것을 못 본 척하며 시선을 돌렸다.
수향이 그 안에서 손가락 한 마디만 한 USB 메모리 하나를 찾아 한동과 재희 앞으로 밀어 놓았다.
“이겁니까?”
재희가 묻자 수향이 대답 대신 팔짱을 끼었다. 재희는 그 USB 메모리를 집어 들어 돌려 보았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제품이었다. 재희가 수향의 표정을 살피며 다시 한 번 물었다.
“내용이 뭔지 아십니까?”
“그럼 모르고 들고 왔겠어요?”
수향이 별 걸 다 묻는다는 얼굴로 눈썹을 좁혔다. 까다로운 분이네, 하고 속으로 생각한 재희는 최대한 웃는 얼굴로 수향을 마주 보았다.
“정확히 저희한테 설명하실 수 있습니까?”
수향이 흩어진 물건들을 다시 핸드백 안으로 쓸어 넣고는 가방을 한쪽으로 치웠다. 선글라스를 벗은 수향이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본래 성격인 것인지, 아니면 며칠 사이 심하게 시달린 탓인지 몰라도 그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우리 남편이 작년에 엄대진하고 비밀리에 회동한 적이 있어요. 그때 엄대진이 미디어그룹 자기하고 와이프 앞으로 완전히 돌려놓겠다고, 그거 얘기한 영상이에요.”
립스틱을 짙게 바른 입술을 연신 안으로 말아 깨물었다 놓기를 반복하던 수향이 두 사람을 마주 보았다.
“황 의원이 제일 믿을 만한 분들이라고 그랬다는데, 맞아요?”
“방송해 줄 곳 찾으신다고 들었는데요. 지금 저희 아니면 그런 데 찾기 쉽지 않으실 겁니다.”
아무래도 의심스럽다는 그녀의 표정에 웃는 낯으로 단호하게 대답한 재희는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
“사모님께서 이 영상 직접 보셨습니까?”
그 말에 수향이 코웃음을 쳤다.
“내가 의뢰해서 촬영했는데 당연하죠.”
순간 한동이 재희에게 슬쩍 시선을 주었다. 재희 역시 생각하지 못한 대답이라 내심 멈칫한 건 사실이었다. 그런 내용이 담긴 영상을 어떻게 수향이 의뢰해서 촬영했다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모님께서요?”
재희가 다시 한 번 확인하듯 묻자 수향이 턱 끝으로 USB 메모리를 가리키며 내뱉었다.
“남편이 젊은 년 끼고 바람피우고 다니는 거 잡으려고 돈 주고 찍었어요.”
별별 일을 다 겪어 보긴 했지만, 이런 경우는 재희의 기억에도 그리 흔한 상황은 아니었다. 잠시 말문이 막힌 재희가 이럴 땐 뭐라고 해야 적절할지 부지런히 머리를 굴리는 사이, 수향이 재미있다는 듯 웃는 소리를 냈다. 그러나 그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왜요, 집안 망신이라? 꼴이 이렇게 됐는데 내가 지금 더 망신당할 게 뭐가 있어요?”
수향이 잘 세팅된 머리를 쓸어 올렸다. 빨간 매니큐어를 빈틈없이 바른 손톱이 짙은 갈색으로 염색된 머리칼 사이를 스치고 지났다. 수향은 아주 우스운 얘기를 하는 사람처럼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때 무슨 서초동 텐프로라나 뭐라나 하는 년한테 미쳐 가지고, 오죽했으면 기자들이 나한테 몇 번 연락 왔었다니까요. 창피한 줄도 모르고 아주 오만 데를 다 끼고 다녀서 내가 사람 사서 미행 붙이고, 여기 보안요원이 안 된다는 거 돈 엄청 주고 몰카 설치해서 찍었다고.”
무슨 상황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재희는 수향에게 물었다.
“장소가 어디죠?”
“신논현 메이. 그때는 그렇게 쓸 줄 모르고, 엄대진도 계집애 하나 끼고 왔길래 내가 부부 동반 모임 할 때 넌지시 떠보니까 변정화 걔는 아주 통이 크더라고요. 남자가 바깥일 하는데 여자 몇 있는 거 흠 아니라고, 나를 아주 속 좁은 년 만드는 거야. 왜 그거 이해 못 해주냐고, 남자가 그러면 답답해서 못 산대요. 기가 막혀서 진짜.”
변정화의 이야기를 할 때 수향의 눈매에 날이 섰다. 뭐라고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 그 얼굴 위를 스쳤다. 분노, 질투, 혹은…….
유명한 정치인의 아내로서 사는 삶 이전에, 그들에게는 한 인간으로서의 삶이 있었다. 어떤 이유로 결혼을 했든, 제도 안의 부부로 묶였을 때는 서로에게 기대하는 도덕적 기준은 분명히 존재할 터였다.
수향이 눈썹을 찡그리며 미간에 진 주름을 손끝으로 지그시 눌렀다.
“이거 남편한테 들이미니까 싹싹 빌면서 그 젊은 년 당장 정리하겠다고 그러더라고요. 각서 쓰고 이건 내가 가지고 있었어요.”
“의원님께서 이 영상 가지고 엄대진 의원한테 협상 요구하신 것 맞습니까?”
재희는 가장 궁금했던 부분을 넌지시 떠보았다. 수향이 손톱 위로 희미하게 묻어난 파우더를 문질러 닦으며 거기 시선을 둔 채 대답했다.
“경선 나간다고 해서 내가 말렸어요. 여론조사에서 심하게 밀린다고 뉴스 계속 나왔으니까. 그런데 일단 남편 쪽 의원들이 계속 바람을 넣으니까, 자기는 어떻게 이길까 하다가 이게 생각났던 모양이에요. 엄대진한테 이 영상 얘기하면서 경선 양보하라고 그랬다는데 엄대진이 미쳤어요? 내 남편이지만 진짜 갑갑해서…… 엄대진 어떤 사람인지 나도 아는데, 자기는 같은 배지 달고 있으니까 못 건드릴 줄 알았나?”
“엄대진이 어떤 사람인지 아신다고요?”
“엄대진 여의도 입성하고 주변에서 사람 죽어 나간 것만 얼만데요. 다 알잖아요. 알면서 입 다물고 있는 거지.”
수향이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재희는 그녀를 물끄러미 마주 보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자신에게 이득이 될 때는 하나같이 침묵하던 사람들이, 이런 순간에는 주저 없이 입을 여는 건 왜일까.
피해자와 가해자, 방관자의 경계가 사라지는 어떤 세계의 존재를 재희는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수향이 다시 한 번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서온건설이 돈 갖다 바치면서 아주, 솔직히 얘기할게요. 내가 뭐 더 잃을 것도 없고, 이혼하려던 거 애들 봐서 참았던 사람이니까.”
수향은 재희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서온 게이트 터지기 전에, 우리도 엄대진한테 애들 명의로 경기도 신도시 쪽에 서온 스타일하우스 신축 분양하는 거 두 채 분양권 받았어요. 내가 그때도 받지 말랬는데 이 인간이 공짜라니까 눈이 뒤집혀서. 아니나 달라? 게이트 터지니까 우리 남편 쪽에 그거 뒤집어씌우려고 했다고요. 애초에 그러려고 준 거지. 그러니까 서로 너 죽고 나 죽자 하고 머리채 잡다가 최창묵 걔 하나 날린 걸로 막았단 말이에요.”
“이규완계 의원님들도 관련이 있었다는 겁니까?”
재희가 다시 한 번 확인을 받으려 묻자, 수향이 쿡쿡 웃는 소리를 냈다.
“말씀 재밌게 하시네. 한선당에 엄대진한테 뭐 하나 안 받아 처먹은 의원들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요. 지들끼리는 맨날 치고받고 싸우는 척하다가 나오면 국회 사우나 가서 형님 동생 하는 게 여의도 남자들 아니에요? 아, 분양권은 그 뒤에 팔았어요.”
수향이 마지막으로 덧붙인 말은 이규완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과 아이들을 위해서임이 분명했다. 입이 마르는 듯 잠깐 말을 멈췄던 수향이 짧은 한숨을 뱉었다.
“아무튼 그때 엄대진이 우리 쪽 사람들한테 주둥이 잘못 놀리면 배지 떨어진다 그 소리 했었다고요. 안, 뭐지. 엄대진 보좌관, 유명한 애. 걔가 저한테 직접 전화를 해서 딱 그래요. 사모님, 아침에 부군 부고 보기 싫으시면 입조심하셔야 됩니다.”
“협박을 한 겁니까?”
재희의 물음에 수향의 얼굴이 구겨졌다.
“같은 의원도 아니고 보좌관이, 감히 나한테 그럴 급이 되냐고요. 엄대진이 그래, 뭐 잘나간다고 쳐요. 그런데 우리 남편도 다선이고 나이도 몇 살이 많은데, 본인도 아니고 보좌관이 그러는 게 아주 기가 막혀. 그리고 남편이 엄대진 하는 일에 딴지 몇 번 걸었더니 청와대에서 다이렉트로 연락이 왔다니까요. 나대지 말고 얌전히 있으라고. 애초에 엄대진 키운 게 우리 남편이라고요. 이 등신 같은 인간이 그 안목으로 무슨 정치를 해요, 하기를.”
부인의 평이 이 정도로 가차 없는데도 이규완이 계속해서 나쁜 패만을 쓰는 건, 수향의 말대로 안목이 없기 때문이라고 봐도 좋을 듯했다. 이런 사람이 왜 이규완 같은 남자와 결혼했을까 문득 궁금해진 재희는 가벼운 헛기침을 뱉었다. 남의 속을 알 리 만무한 수향이 말을 이었다.
“내가 지금 이것도, 그냥 묻고 없던 걸로 하자고 했어요. 쪽팔리는 게 뭐 대수냐? 여의도라면 내가 아주 신물이 난다고. 경선 당선될 확률도 없잖아요. 정치한다고 친정 돈까지 다 긁어다 써서, 내가 남은 게 상가 건물 몇 개가 다라고요.”
상가 건물 몇 개. 수향이 발음하는 그 단어들은 마치 만 원짜리 몇 장처럼 사소하게 들렸다. 그 사소함을 평범한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일해도 가져 보지 못한다는 걸 떠올린 재희는 속으로 차는 한숨을 눌렀다.
수향이 눈을 들어 재희를 마주 보았다.
“다 집어치우고 거기 가서 임대료나 받고 살자 그러다가, 엄대진 그게 아주 이판사판으로 남의 남편 고발을 하네, 감옥에 처넣겠네, 지랄을 하니까 들고 온 거예요. 죽어도 혼자서는 안 죽죠. 엄대진 걔도 알아야 돼요. 세상일 다 자기 마음대로 안 된다는 거.”
재희는 그녀의 시선을 어슷하게 비껴 피하며 USB 메모리로 다시 눈을 주었다. 이 작은 물건 안에 과연 얼마나 대단한 것이 들어 있는지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