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2
22화.
정언은 타인에게 쉽게 정을 주거나 경계를 낮추는 타입은 아니었다. 더구나 일할 때는 더 그랬다. 아주 사소한 실수라도 에는 치명적이었다. 때문에 관대한 선배와 까다로운 선배 중 정언은 항상 고민할 필요도 없이 후자를 택하곤 했다.
후배들이 정언을 어려워하는 건 당연했다. 윤이라고 별반 다를 바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윤은 잠시 기가 죽은 것 같다가도 돌아서면 또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굴었다. 그게 무척이나 이상하고 낯설었다. 길가에서 처음 본 강아지가 자꾸만 쫓아오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정언은 말없이 먼저 사무실을 나섰다. 윤이 큰 보폭으로 서둘러 뒤를 따라왔다. 로비 카페로 향한 정언은 윤에게 묻지도 않고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시켰다. 정언이 커피 한 잔을 내밀자 윤이 입매를 말아 올렸다.
그 표정을 본 정언은 눈썹을 좁혔다. 그러나 정언이 뭐라고 운을 떼기도 전 윤이 선수를 쳤다.
“빚지는 기분이라 사 주신 거 알아요. 잘 먹겠습니다.”
눈치가 너무 없으면 화가 날 텐데, 눈치가 너무 빠르니 무서울 지경이었다. 속을 읽는 것처럼 구는 게 기막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웃는 소리가 났다.
“얘기할 게 뭔데.”
숨을 들이쉬며 표정을 감춘 정언은 엘리베이터 앞에 서며 내뱉었다. 등 뒤에 선 윤이 대답했다.
“어제 기제국 있는 친구랑 잠깐 만났거든요. 그런데 그 친구가 박규형 씨랑 만난 적이 있어요.”
“뭐?”
정언은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윤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다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그 친구가 찍던 다큐가 진송신도시였대요. 그때 소개받아서 몇 번 만났다고 하더라고요. 취재 자료하고 인터뷰 파일, 영상 몇 개랑 일부 프리뷰1) 따놓은 거 있다고 해서 복사해서 받아 왔어요.”
윤은 정언의 등 뒤에서 손을 뻗어 엘리베이터 상행 버튼을 눌렀다. 정언은 그제야 버튼을 누르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문이 열리기 무섭게 엘리베이터에 탄 정언은 서둘러 사무실이 있는 7층 버튼을 꾹 눌렀다.
나란히 선 채 문을 응시하던 정언은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옆을 흘끔 보았다. 빨대를 문 채 정언을 내려다보던 윤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미소를 지었다. 정언은 더 참지 못하고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김 피디, 세상에 좋은 일 되게 많아?”
하여튼 성격 더럽지 서정언, 하고 속으로 생각했으나 이미 튀어나간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왜 그렇게 눈만 마주치면 웃어?”
딴에는 심각한 질문이었고, 대개 정언이 무표정으로 뭔가를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가 죽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윤은 그 말을 듣기 무섭게 몸을 숙이며 쿡쿡거렸다. 이게 진짜 날 놀리나 헷갈리기 시작한 정언이 김 피디, 하고 부르자 때마침 문이 열렸다.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윤이 정언을 마주 보았다.
“제가 웃으면 좀 괜찮아서요.”
귀를 의심한 정언은 걸음을 뚝 멈췄다. 윤이 갑자기 돌아 버린 건가 싶어서였다. 물론 본인 입으로 그렇게 말한다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할 수준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걸 정말 실천에 옮기는 건 경우가 달랐다.
“그리고 저 선배하고 진짜 친해지고 싶거든요.”
정언은 잠시 말을 잃은 채 윤을 쳐다보았다. 쟤는 왜 저렇게 나한테 혼자 내적 친밀감을 형성했을까, 하는 근원적인 의문이 들었다. 그러자 퍼뜩 며칠 전의 일이 떠올랐다.
― 친해지고 싶은 사람한테는 다 관심 많지 않나요?
그렇게 묻던 게 진심이었나 싶어 기가 찼다.
솔직히 말하면 윤이 에 처음 온 날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다지 살갑게 대한 적이 없었다. 어차피 얼마 버티지 못할 거라는 계산도 있었다. 나갈 거라면 차라리 빨리 나가는 게 자신을 도와주는 길이었다.
저 눈치로 그런 걸 모를 리 만무했다. 그런데도 대체 무슨 까닭으로 이렇게 스스럼없이 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정언은 윤과 복도에서 마주 보고 선 채 잠시 대치했다. 짧은 정적을 깬 건 윤이었다.
“선배 마음에 들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윤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순간 누군가가 정수리 위에 작은 얼음 조각 하나를 올려놓은 듯한 기분이 되었다. 심장 한구석이 빠르게 싸해졌다. 정언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런 정언을 가만히 응시하던 윤은 사무실 쪽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자료 가져온 것 좀 봐 주실래요?”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정언은 그 자리에 서서 한동안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선배 마음에 들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오래전, 자신이 재희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던 것이 떠올랐다.
편집실에서 밤샘 작업을 마치고 지나치게 늦은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 들어가는 길이었다. 늦가을 한밤중의 거리는 쌀쌀했다. 재희는 커피를 마시겠다며 길거리 자판기 앞에 서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재희는 돌아보지 않은 채 자판기에 동전을 집어넣었다.
「내 마음에 들어서 뭐할 건데.」
「그냥요.」
동경과 호감의 줄타기는 늘 위태로웠다. 그때의 정언은 어렸고, 마음을 숨기는 법을 몰랐다. 등을 돌린 재희의 어깨 너머로 자판기 커피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하면 되는지 가르쳐 주면 그렇게 하려고?」
「네.」
「그렇게 안 하면 내 마음에 들 자신 없어?」
정언은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재희는 자판기에서 막 나온 커피 한 잔을 정언의 손에 쥐여 주었다. 따뜻한 컵에서 전해지던 온기는 선명했다.
재희가 물었다.
「사람들이 남을 위해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가 언제인지 알아?」
「……아뇨.」
「그 사람의 선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질 때.」
속을 빤히 들여다보는 듯한 재희의 말에, 손에 든 종이컵 안의 커피보다 귀 끝이 더 뜨거워졌다. 재희는 남은 동전을 모두 집어넣고 다시 버튼을 눌렀다. 곧 종이컵이 달칵 소리를 내며 아래로 떨어졌다. 몸을 숙여 커피를 꺼낸 재희는 정언을 마주 보았다.
「그러면 불행해져.」
「선배.」
「그러니까 있는 그대로 해 봐. 변할 생각 하지 말고.」
그건 재희의 다정한 배려이자 경고였다. 자신의 선 안으로 들어오지 말라는. 정언은 그 말의 의미를 쉽게 알아차렸다. 그렇기에 이후로 한 번도 그 선을 넘으려 한 적이 없었다. 재희를 동경하고 존경하는 선배로서 남겨 두는 쪽이 정언에게도 더 좋았다.
오래전의 기억을 떠올린 정언은 긴 한숨을 뱉었다. 선배 마음에 들려면 어떻게 해야 되냐고? 지금의 자신이 그때의 재희처럼 그런 질문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선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어쩐지 스스로가 한심해졌다.
― 호의는 호의로 받아 주시면 안 되는 겁니까?
조금 화가 난 듯, 혹은 속상한 듯 묻던 그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공연히 죄 없는 바닥을 발로 툭 찬 정언은 사무실로 들어섰다.
05.
“내가 정언한테 이 주소 받고 제일 먼저 포스팅 날짜 체크했거든. 포스팅이 1,200개가 넘어. 죽기 전날 포스팅도 있고, 애들 어릴 때부터 어딜 같이 가면 꼭 사진 찍어서 다 올렸더라고. 건설사 일 했으면 야근이나 접대 엄청났을 건데, 시간 내서 계속한 거 보면 진짜 부지런했나 봐. 블로그 하는 거 시간 무지하게 잡아먹잖아. 우리 남편도 파워블로거 한 번 해보겠다고 난리치다 한 달도 안 돼서 포기했다는 거 아냐, 너무 힘들어서.”
규형의 블로그를 띄워 놓은 태블릿을 회의실 책상 위에 밀어 둔 민혜가 턱을 괴고 있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언이 태블릿을 자기 앞으로 끌어다 놓고 규형의 마지막 포스팅을 스크롤하며 입을 열었다.
“제가 부인이었어도 절대 자살할 사람 아니라고 했을 거 같아요. 아쿠아리움 티켓 얘기한 것도 그렇고, 딸들 얘기하는 포스팅만 700개 가까이 되잖아요. 일주일에 최소한 한두 번씩은 꼭 올렸고요. 진짜 가정적이고 성실한 사람이에요. 애들이 눈에 밟혀서라도 그렇게 쉽게 못 죽지. 마지막에 올린 글도 애들 장난감 사 준 얘기예요.”
규형의 마지막 포스팅 내용은 원목 소꿉놀이 장난감 조립 과정을 기록한 것이었다. 구입처와 가격 등은 물론이고 박스 안의 내용물과 설명서까지 꼼꼼히 찍어 둔 포스팅이었다. 정언이 펜 끝을 다이어리 위에 톡톡 치며 말을 이었다.
“이런 사람이 자살 생각을 할 정도면 겉으로 드러나는 게 있었을 텐데.”
“그치. 경찰이나 사측 얘기대로 회사 생활에 적응을 못했다면 심적으로 우울감이 심했을 거라고 짐작할 수가 있잖아. 근데 보통 사람이 우울하면 아무것도 하기 싫지 않아? 회사 생활 견디는 것만 해도 에너지를 어마어마하게 쓸 텐데 일부러 짬 내서 애들 봐주고, 블로그 포스팅도 꾸준히 하고. 이게 진짜 말이 안 돼. 김 피디는 어떻게 생각해요?”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윤은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민혜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자세를 고쳐 앉았다.
“네?”
누가 봐도 잠시 정신이 빠졌던 꼴로 되묻자, 민혜가 눈을 가늘게 떴다.
“김 피디는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무슨 딴생각을 그렇게 심오하게 하지?”
그 말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실은 아침부터 계속 사무실에 이불이 있다면 차고 싶은 기분이었던 것이다. 평소보다 훨씬 일찍 출근해서 태훈에게 자료를 받아 왔을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문제는 사무실에서 정언을 마주치자 괜히 싹싹하게 굴어 보겠답시고 오버한 거였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니까 나름 애를 쓰는 중이었는데, 뭐 좋은 일 있냐며 왜 볼 때마다 실실 웃느냐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서운한 마음이 든 건 사실이었다.
― 선배 마음에 들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