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20
220화.
“저희가 가져가서 영상 확인해 봐도 되겠습니까?”
“방송 언제 하실 수 있어요?”
수향이 즉각 되물었다. 잠시 생각하던 재희는 이마 부근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내용 확인해 봐야 확답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썩 만족스러운 대답은 아니었는지, 수향이 턱을 치켜들며 팔짱을 끼었다.
“방송 못 한다고 할 거면 지금 돌려주시고요. 인터넷에 올리든지 어떻게 하든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사본 가지고 계십니까?”
“당연한 거 아니에요?”
방송을 못 하게 된다면 정말 본인이 스스로 인터넷에 뿌릴 것 같은 기세였다. 다행이라면 다행일 수도 있었다.
수향의 말대로라면 이 영상이 공개됐을 때 이규완 역시 불이익을 받을 소지가 다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엄포를 놓은 대로 절대 혼자서는 안 죽겠다는 의지가 더 강한 모양이었다. 재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저희가 만약에 방송 못 하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면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수향이 선글라스를 도로 끼고는 고개를 까딱였다. 그러더니 재희가 뭐라고 말 한마디 더 붙이기도 전에 먼저 미팅룸을 나가 버렸다. 재희가 사모님, 하며 얼른 문을 열었으나 수향의 뒷모습은 이미 저만치 멀어진 뒤였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재희는 한동을 돌아보았다.
“사모님 장난 아닌데요.”
“엄대진한테 죽기 전에 이규완 사모한테 먼저 죽는 거 아닌가 몰라.”
헛웃음을 뱉은 한동이 USB 메모리를 재희에게 내밀었다.
“어떻게 할래? 너희 팀에서 먼저 확인하고 알려 줄래?”
재희는 그것을 받아 들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렇게 하죠. 로 갈지 로 갈지 내용 보고 결정하면 될 것 같은데요.”
“그러자고.”
미팅룸을 나서서 한동과 함께 시사보도국으로 올라온 재희는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새 저녁을 먹고 온 건지, 팀원들이 각자 커피 한 잔씩을 들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재희에게 눈을 준 정언이 벽에 걸린 시계를 흘끗 보고는 의아한 표정을 했다.
“뭐 연락 기다리는 거 있다더니 밥 먹고 왔어요?”
“아니. 폭탄 하나 받아 왔지.”
재희가 USB 메모리를 들어 보이자 정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뭔데?”
“이규완이 엄대진 협박했다는 자료.”
“진짜예요?”
그 순간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재희에게 쏠렸다. 찬수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야, 갑자기 그런 게 어디서 났어?”
“이규완 와이프가 방금 전에 직접 와서 주고 간 거예요. 메이에서 찍은 영상이라는데.”
정언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CCTV가 아니라요? 거기 CCTV 확보도 간신히 했는데, 룸 안을 촬영했다고? 어떻게?”
“와이프 말로는 그래. 보안요원한테 돈 주고 찍었대.”
재희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자 윤이 갑자기 뭔가 생각났다는 듯 곁에서 끼어들었다.
“아, 저 메이 갔을 때 거기 보안팀에서 그 얘기 했었어요. 예전 직원이 어떤 사모님한테 부탁받고 삼천인가 사천 받아서 몰카 촬영한 적 있었다고 하던데요. 불륜 잡으려고.”
“그런 얘기를 했었어?”
재희의 물음에 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계준 의원의 도움을 받아 CCTV 영상을 받아 온 사람이 윤이었으니, 윤이 보안팀에서 그런 말을 들었다면 수향의 이야기가 거짓일 리 없었다.
“그러면 진짜인가 보네. 이규완 바람피우는 거 증거 확보하려고 찍었다던데?”
그 말에 호형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미쳤다, 삼천? 그거 찍으려고 그 돈을 줘요?”
“어머, 얼마나 분했으면 그랬겠어? 나 같아도 내 남편이 그 짓하면 가진 돈 다 털어서라도 꼬리 잡아서 아주 복날의 개 패듯 팰 건데. 우리 팝콘 없니? 뭐 좀 씹으면서 봐야 되는 거 아냐?”
막장 일일 드라마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기대감에 찬 민혜를 본 재희가 피식 웃고는 회의실 문을 가리켰다.
“팝콘은 일단 보고 먹어, 아직 자세한 거 모르니까. 다들 들어와 봐.”
자리에서 노트북을 챙긴 재희는 회의실로 들어갔다. 하나둘씩 재희의 뒤를 따라 들어온 팀원들이 자리를 잡았다. 스크린에 케이블을 연결한 재희가 USB 메모리를 꽂는 사이, 민혜가 궁금해 죽겠다는 투로 물었다.
“내용이 대체 뭐래? 뭔데 그래?”
“엄대진이 미디어그룹 자기 앞으로 다 돌릴 거라는 내용이라던데.”
“어머, 그걸 자기 입으로 불었다고?”
민혜가 눈을 반짝였다. 화면에 곧 메모리 내용을 보여 주는 창이 떴다. 안에 든 것은 ‘제목 없음’이라고 쓰인 영상 파일 하나뿐이었다. 대답 대신 파일을 클릭해 재생한 재희는 테이블 위에 걸터앉아 팔짱을 끼었다.
영상은 메이의 VIP룸 안을 촬영한 것인 듯했다. 기본 세팅만 된 방은 비어 있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섰다. 이규완이다, 하고 호형이 중얼거렸다.
바로 이규완의 뒤를 따라 들어온 건 이십 대 초반이나 됐을까 싶은 젊은 여자였다. 언뜻 보기에도 연예인 지망생인가 싶을 정도로 화려한 미모에, 몸에 꼭 붙는 미니 원피스 차림이었다. 현진이 황당해하며 물었다.
“저게 누구야?”
“이규완이 끼고 다니던 서초동 텐프로라던데요. 이규완이 안 데리고 다니는 데가 없어서 와이프한테 기자들이 연락할 정도였대요.”
재희가 화면에 눈을 둔 채 대답하자 현진이 대번에 미간을 찌푸렸다. 화면 안에서 이규완이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 손짓으로 여자를 자기 옆에 앉혔다. 여자의 허리를 감아 안은 이규완은 곧 짧은 스커트 안으로 손을 넣고 허벅지를 만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이런 일이 일상인 듯했다. 그 꼴을 보던 민혜가 진저리를 쳤다.
“웬일이야, 웬일이야. 미쳤어 진짜! 이걸 삼천 주고 봤는데 천불 안 나서 죽은 게 용하네.”
“본론부터 봐야겠네.”
아무래도 거북하기로는 재희도 마찬가지였다. 여자의 몸을 무슨 장난감 만지듯 주물러 대는 이규완의 꼴을 그리 길게 보고 싶지 않았기에, 재희는 서둘러 키보드를 두드리며 영상을 앞으로 돌렸다.
십여 분을 돌리고 나서야 다시 룸 문이 열리며 다른 사람이 들어왔다. 역시 두 사람이었다. 이미 수향에게 들은 것이 있어 그리 놀랍지는 않았으나, 재희와 달리 미리 들은 게 없는 팀원들은 이번에도 여자를 끼고 나타난 엄대진을 보자마자 쓰고 버린 휴지처럼 얼굴을 구겼다.
“아니, 저건 또 뭐야?”
예준이 못 볼꼴을 봤다는 얼굴로 질겁했다. 대진의 팔짱을 낀 채 찰싹 달라붙어 있던 여자가 규완에게 고개만 까딱여 인사를 했다. 맞은편에 앉은 대진이 규완에게 먼저 사과를 건넸다.
『의원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먼저 식사하자고 얘기한 분이 이렇게 늦어도 되나?』
입이 댓 발은 나와 투덜거리는 사이에도 여자의 스커트 안을 더듬는 규완의 손은 멈출 기색이 없었다. 대진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양 대답했다.
『청담동에서 길이 좀 막혔습니다.』
대진 곁에 앉아 있던 여자가 새침하게 말을 보탰다.
『죄송해요. 오빠가 빨리 가야 된다고 했는데 제가 숍에서 케어가 덜 끝나서요.』
혀를 찬 규완이 내뱉었다.
『시간 약속 빠릿빠릿한 애 끼고 다녀, 엄 의원. 거 나랏일 하는데 시간이 돈 아냐.』
『그럴까요? 일단 아가씨들은 아가씨들끼리 얘기하라고 하고, 저희는 저희끼리 식사 좀 하죠.』
입을 삐죽거리는 여자에게 뭐라고 나지막하게 말한 대진이 두 여자를 룸에서 내보냈다. 아쉬운 듯 손을 흔들던 규완은 문이 닫히자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종업원이 음식을 가지고 들어왔다. 대진은 정종 병을 들어 규완의 앞에 놓인 잔을 채우며 입을 열었다.
『의원님, 방통위 건 협조 좀 해 주십시오. 안 그래도 민권당 2중대냐고 당내에서 말 나오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방송통신위원회 위원들과 위원장을 한선당 라인으로 교체했을 시점인 모양이었다. 회의실 안이 곧 조용해졌다. 규완이 잔을 받아 한 모금 마시고는 내려놓았다.
『지금도 공영방송에 윗선에서 다이렉트로 말 넣는다고 기자들이 아주 기분 나빠 한다며. 기자들 다루기 까다로운 거 알잖아. 괜히 건드려 봐야 벌집 쑤시는 꼴밖에 더 되겠어? 여론도 너무 나빠. 민권당에서도 가만히 안 있을 테고.』
『여론은 생기는 게 아니라 만드는 겁니다.』
대진이 태연하게 말하며 자기 잔에 술을 따랐다. 재희는 그 옆얼굴을 뚫어지게 보았다. 규완이 젓가락으로 앞에 놓인 회 몇 점을 뒤적이며 대꾸했다.
『그걸 누가 모르나? 그런데 지금 상황이 그렇다고. 젊은 놈들 그 뭐야, SNS. 그런 걸로 말 나오는 것도 심각하고.』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디지털대응본부 만들지 않았습니까. 돈 좀 쓰면 댓글하고 SNS 여론 잡는 거 몇 달이면 됩니다. 그 정도 기다릴 각오도 없이 정치 어떻게 하려고 하십니까?』
이 새끼들이, 하고 정언이 이를 악물며 중얼거렸다. 당연히 엄대진이 저지른 짓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걸 본인들 입으로 인정하는 모습을 보는 건 얘기가 달랐다.
방금 엄대진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그 말 한마디가 나라 전체를 움직이는 중이었다. 이 자리의 누구도 그런 걸 믿고 싶어 할 리 없었다. 규완이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대진을 마주 보았다.
『공영방송 제대로 먹을 자신 있어?』
『YBS가 제일 강성이라 골치긴 한데, 거긴 일단 올해 말이나 내년 초에 바언진 이사들 싹 물갈이하면서 윗선 갈아치우면 한 반 년이면 끝날 겁니다. 바언진 보수 이사들 말로 하고 두 개만 잡아 주면 나머지는 문제없답니다. 평기자, 평피디들 할 수 있는 일 생각보다 그렇게 많지가 않습니다. 지금까지야 정권이 손 못 대니까 내버려 둔 거지만 언제까지 걔들 말에 끌려다닐 수 없지 않습니까. 방통위 물갈이만 한 번 하면 그건 일도 아닙니다.』
공기가 삽시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싸하게 가라앉았다. 처음부터 모든 일이 이런 식으로 기획되어 있었던 걸까. 고작 윗선의 몇 명을 갈아치우는 것만으로도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이 쌓아 온 역사와 자부심 따위를 무너뜨리는 건 너무 쉬웠다.
반년. 엄대진이 여상하게 발음한 그 반년은 자신들이 피를 말리며 보내 온 시간들이었다. 재희는 손끝을 말아 쥐었다. 잠시 대진을 빤히 바라보던 규완이 넌지시 물었다.
『안 끌려다니면 뭐 뾰족한 수 있나?』
『그러니까 젊은 사람들 여론, 민권당 반항, 이런 거 생각하지 마시고 일단 방통위 이사진 교체 건 무조건 협조 좀 해 주십시오. 총선 내준 것도 모자라서 지선, 대선 다 뺏기실 겁니까? 그 전에 작업 못 하면 우리 다 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