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22
222화.
“선배, 지금 임 기자님한테 메일 왔어요. 일본에서 접촉한 제보자가 엄대진 명의로 된 스위스 계좌 알려 준 거 우리 쪽에 보냈는데요. 에서 확인했는데 살아 있는 계좌는 확실하고, 금액은 정확히 얘기 안 했지만 최소한 수백 억 규모라는데. SO 컴퍼니에서 채기원 개인 계좌로 돈이 들어가고, 그 돈이 다시 이 엄대진 스위스 계좌로 간 내역도 다 첨부했대요. 지금 포워딩할게요.”
재희가 읽고 있던 신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응, 하고 대답했다. 잠시 후 신문을 내려놓은 재희는 메일 내용을 읽어 보더니 호형 쪽을 보았다.
“안 피디, 지금 서 피디가 포워딩한 메일 내용 확인하고 이거 주 피디랑 둘이 같이 체크 좀 해 줘. 추가로 확인해야 될 부분 있으면 바로 문계준 의원님한테 연락하고. 국세청 자료 확보하려고 우리가 시간 쓰는 것보다는 그쪽이 빠를 거야.”
“문 의원님하고 얘기는 돼 있어요?”
호형이 묻는 말에 재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황 의원님하고 통화했어. 민권당에서 최대한 협조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래.”
그때 찬수가 재희에게 프린트한 종이 몇 장을 뽑아 건넸다.
“한 작가랑 나랑 엄대진 테마주로 상승 중인 주식 다 뽑았어. 제약 벤처 세 군데더라고. 의약 신문 쪽 검색해 보니까 심혈관 질환 관련 신약 개발 중인 데는 더뉴원랩이라고, 그거 하나야. 일본 제약회사하고 합작해서 만든 회사였는데 재작년에 단독 회사로 분리했고, 대선 얘기 나오면서부터 주가 오르는 중이래. 취재 요청했는데 그쪽에서 응했어.”
재희는 찬수의 손에서 그 종이들을 받아 들고는 안경을 고쳐 썼다. 아마 방금 말한 더뉴원랩에 대한 자료인 듯했다. 재희는 거기 시선을 두며 찬수에게 물었다.
“누가 갈 건데요?”
“나랑 한 작가가. 이따 점심 먹고 오후에 만나기로 했어.”
찬수의 대답에 알겠다는 표시를 한 재희가 다시 정언을 보았다.
“서 피디, 그럼 지금 뭐 남았어?”
정언이 잠시 머릿속을 더듬는 듯 눈을 굴렸다.
“어게인라이프 관련해서 최창묵이 직접 제공했다는 계좌들 아직 살아 있어요.”
“그게 아직 살아 있다고?”
재희가 되묻자 호형이 정언에게 손을 흔들었다.
“계좌 정보는 나한테 줘, 내가 알아볼게.”
고마워, 하고 고개를 까딱인 정언은 말을 이었다.
“계좌도 계좌인데 최창묵이 걸려요. 무슨 목적으로 에 정보현을 숨겼는지 확실히 확인해야 될 것 같아요.”
“최창묵 컨택이 안 돼?”
“김 피디가 문자로 연락은 가끔 한다는데, 만나는 건 부담스러운지 전화도 잘 안 받으려고 한대요.”
정언의 말에 재희가 윤을 돌아보았다. 조금 머쓱해진 윤은 눈치를 보다 대답했다.
“임 기자님이 일단 얘기는 해 본다고 하셨는데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재희가 턱 끝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일단 알겠어. 계속 시도해 봐. 아, 이규완 영상 내용 에 공유할 거야?”
정언이 네, 하고 대답했다. 윤은 얼른 말을 덧붙였다.
“우선 내용이라도 알려 드려야 되지 않을까요? 채기원이 지금까지는 계속 피해 다녔다는데, 제보자가 그쪽에 지금 엄대진 스위스 계좌 제공했잖아요. 엄대진이 본인 위험해지면 채기원 버릴 거라는 확실한 증거 있으니까, 채기원 입장에서도 엄대진 어떤 사람인지 잘 알 텐데 차라리 목숨 부지하는 쪽 선택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좋아. 그래도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까, 그쪽에서 자료 요구하면 채기원 부분만 우선 잘라서 보내 드려.”
재희의 말을 듣고 있던 윤은 퍼뜩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이 내용 변은화 씨가 알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응, 그렇지. 전 부장님이 김인택 직접 컨택해 보겠다고 했어. 가 우리 쪽하고 워낙 사이가 그래서 좀 걱정이긴 한데, 부인하고 자기 목숨 걸린 거니까. 그리고 그 팀에서 변순철하고 변은화 투약 기록 알아본대. 원진솔 기자가 예전에 본서울병원 출입했어서 거기 아는 사람이 좀 있다네.”
정언이 턱을 괴며 눈썹을 좁혔다.
“만약에 투약 부작용인 거 증명되면 엄대진은 장인 괜히 목숨 붙여 놨다고 후회하겠는데. 차라리 빨리 죽이고 화장했으면 부검이고 뭐고 없이 묻혔을 거 아니에요.”
그 말을 들은 재희는 풍선에 바람 빠지듯 웃는 소리를 냈다.
“자업자득이지. 내가 생각해 봤는데, 신약 가지고 인체 실험한 거면 애초에 언제 죽을지 복불복이었던 거 아냐. 변순철이 차라리 더 빨리 죽든지, 아니면 대선 때까지는 살아 있든지 했어야 되는데 하필이면 지금 쓰러졌잖아. 를 자기가 완전히 먹든지, 아니면 장인이 살아서 백 유지하든지 했어야 되는데 둘 다 안 됐다고. 그러니까 엄대진이 발등에 불 떨어져서 또 숨만 겨우 붙여 놓은 거고. 자기 덫에 자기가 걸린 건데 후회하면 뭐하겠어.”
엄대진이 지금 같은 위기를 겪는 것이 처음이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주 오랜 시간을 매번 어떻게든 다른 사람을 짓밟고 제거하며 그 위기들을 모면해 왔을 터였다.
만약 엄대진이 이번 일까지 그렇게 넘길 수 있게 된다면, 지금 이후로는 다시는 그런 기회가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단 한 번의 반격,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그러자 텔레비전 속에서 사람들의 손을 잡으며 환하게 웃고 있던 엄대진의 얼굴이 뇌리를 지났다. 윤은 무의식적으로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그때 정언이 어디선가 온 전화를 보고 바로 핸드폰을 받았다.
“네, 변호사님. 서정언입니다. 네. 네? 아, 네. 저희가 지금 가도 될까요? 네. 반석교회요.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핸드폰을 한쪽 귀와 어깨 사이에 끼우고 재빨리 메모를 한 정언이 파티션 너머로 몸을 젖혀 윤에게 말했다.
“상생변 최유림 변호사님이야. 그날 노숙자 봉사 단체 관련해서 비슷한 얘기 있으면 알려 달라고 했잖아. 유사한 일 겪은 사람이 하나 있는데, 상태가 안 좋아서 시설에서 보호 중이래. 반석교회라는 개척교회 있는데 거기서 맡고 있다고.”
정언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고 있던 윤은 잠깐 생각하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반석교회가 진송신도시 원주민 데모 도와주던 데 아니에요? 담당 목사님 이름이 신찬호라고 그랬던 것 같은데요.”
정언이 곧 자기 다이어리를 뒤적이더니 ‘반석교회 신찬호 목사’라고 적힌 부분을 찾아냈다.
“어, 그러네. 맞아.”
윤과 정언의 대화를 들었는지, 맞은편의 철진이 물었다.
“그거 상생변 쪽에서 제보 온 건이지? 나하고도 통화했었는데. 서 피디가 가 보려고?”
“네, 당사자한테 확인 좀 해 보려고요. 갔다 올게요.”
자리에서 일어난 정언은 차 키를 집어 들며 윤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서둘러 카메라를 챙긴 윤은 먼저 사무실을 나서는 정언의 뒤를 쫓아갔다. 윤이 조수석 문을 닫자마자 정언이 차를 출발시켰다.
주차장을 빠져나와 도로를 진입하자,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정언의 창백한 얼굴이 더 선명했다. 그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뒤늦게 자신이 운전할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다. 정언이 너무 서둘러 사무실을 나오는 통에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도 못 하고 따라온 탓이었다.
“선배, 안 피곤하세요? 갈 때는 제가 운전하면 안 돼요?”
곁에서 정언을 흘끔거리다 조심스럽게 묻자, 정언이 앞을 보며 툭 내뱉었다.
“졸음운전해서 김 피디 세상에서 없애고 싶을 정도로 피곤하진 않은데.”
“그거 피곤하실 때는 저 없애고 싶다는 뜻으로 말씀하시는…….”
“아, 눈치챘어?”
농담처럼 꺼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돌아온 정언의 대답에 윤은 입을 다물었다. 빨간 신호에 차를 세운 정언이 그런 윤에게 잠시 시선을 주더니 혼자 피식 웃었다. 이럴 때면 아무리 봐도 귀여워해서 놀리는 건가 싶었으나, 물론 윤은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을 정도의 이성은 있었다.
정언이 손을 뻗어 라디오를 켰다. 음악 채널에 맞춰져 있었는지, 제목을 알 수 없는 팝이 흘러나왔다. 볼륨 버튼을 눌러 소리를 조금 줄인 정언은 선바이저를 내렸다. 창백한 얼굴 위로 옅은 그늘이 졌다. 언제나 같은 무표정 아래로 정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윤은 문득 궁금해졌다.
창밖으로 익숙한 도시의 풍경이 흘러갔다. 모양도 높이도 제각기인 수많은 건물 사이를 한참 지나쳐 자동차 전용 도로로 접어들자, 도시의 풍경 대신 높은 소음 차단막이 창을 가렸다. 어느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팝송은 클래식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미 여러 번 오간 길인데도 어쩐지 낯설게 느껴지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윤은 머뭇거리다 물었다.
“다음 주에 진짜 방송 나가는 거겠죠?”
그 말을 들은 정언이 짧게 웃는 소리를 냈다.
“선배 말하는 거 들었잖아.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불 올리라는 소리야, 그거.”
그렇다면 결국 뭐가 될지는 알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자신에게는 처음이었지만, 정언은 이미 수도 없이 이런 두려움을 넘어왔을 터였다.
매번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는 싸움에 뛰어드는 일을 반복한다는 건, 하나의 두려움을 넘으면 또 다른 두려움에 직면하는 일을 끝없이 이겨 낸다는 건 뭘까.
윤이 침묵하자 정언이 윤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만하고 싶어?”
“아, 아뇨.”
“그럼 불안해하지 마. 더 생각할 필요 없으니까. 사람은 뒤돌아보면 약해지게 돼 있어.”
나지막한 목소리는 여상했다. 그렇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정언에게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지 불현듯 궁금해졌다. 정언의 옆모습에 시선을 준 윤은 웃는 소리를 냈다. 그러자 정언이 한쪽 눈썹을 약간 찌푸렸다.
“왜 웃어?”
윤은 햇살이 들어오는 창가에 턱을 괴며 짐짓 입을 삐죽 내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선배는 제가 멋있어 보일 기회를 너무 안 주시는 것 같아요.”
정언이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윤을 흘끗 보고는 되물었다.
“기회를 얼마나 더 줘야 되는데?”
“제가 고민을 좀 해 봤는데요. 제가 멋있어야 될 타이밍에 항상 선배가 더 멋있더라고요.”
“그래서 뭐가 불만이야?”
“그럴 때마다 더 좋아지는 게…….”
윤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으나, 정언은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팔을 뻗어 윤의 입을 틀어막았다. 입조심 안 하지, 하고 내뱉은 정언은 애써 웃음을 참는 얼굴로 서둘러 글로브박스 안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윤은 선글라스로 반쯤 가려진 정언의 얼굴을 응시하다 곧 눈을 돌렸다. 기묘한 슬픔 같은 감각이 예고 없이 쏟아진 비처럼 젖어 든 탓이었다. 늘 무심코 발음하는 장난 반, 진심 반의 가벼운 단어들. 그게 지금의 정언에게 유일한 아주 잠깐의 위로라고 생각하자, 심장 부근을 누르는 듯 묵직한 감각이 번졌다.
그런 윤의 속을 알 리 없는 정언은 계속해서 도로를 달렸다. 정언이 자신의 생각을 읽지 못한다는 건 차라리 다행이었다.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하는 걸 안다면, 정언은 즉시 아무것도 아니라는 양 다시 벽을 칠 것이 뻔했다. 의식적이든 아니든, 정언이 자신에게 조금이나마 의지하는 순간까지 빼앗고 싶지는 않았다.
진송신도시 현장이 멀리서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 왔을 때보다 확연히 아파트 단지의 모습을 갖춰 가는 꼴이 눈에 들어왔다. 기껏해야 앞으로 두세 달 정도면 공사가 완료되고 사람들이 입주하기 시작할 곳이었다. 윤은 ‘서온건설 스타일하우스 현장’이라고 쓰인 게이트에서 애써 눈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