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23
223화.
잘 닦인 도로를 지나 아직 포장이 덜 된 길로 접어들자, 다닥다닥 붙어 선 낡은 집들이 을씨년스럽게 두 사람을 반겼다. 집들은 대부분 비어 있는 것 같았다. 녹이 슨 대문은 반쯤 열려 삐걱거렸고, 깨진 창은 수리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었다.
정언은 길 끝의 오래된 건물 앞에 차를 세웠다. 3층짜리 건물 입구에는 ‘반석교회’라고 쓴 조그마한 나무 현판 하나만이 걸려 있었다.
먼저 차에서 내린 정언은 테이프를 덕지덕지 붙인 유리문을 밀며 안으로 들어섰다. 어린아이의 글씨로 ‘목사실’이라고 적어 꽃이며 나비 따위를 그려 놓은 종이가 1층 사무실 문 앞에 붙어 있었다.
정언이 그 문을 두 번 노크하자, 안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내민 사람은 중년의 남자였다. 두꺼운 뿔테 안경에, 최소한 이틀 정도는 면도를 못한 게 분명한 얼굴은 피로에 찌들어 있었다. 남자가 정언과 윤을 보더니 의아한 표정을 했다.
정언이 명함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서정언입니다. 신찬호 목사님 되십니까?”
“아, 네!”
라는 말을 듣자마자 찬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찬호는 한쪽으로 비켜서며 문을 활짝 열어 두 사람을 안으로 안내했다.
“최유림 변호사님이 아까 전화하셨더라고요. 일단 이쪽으로 들어오시죠.”
말이 목사실이지, 안은 책장 세 개와 책상 하나, 탁자만으로도 꽉 찰 정도의 좁은 공간이었다. 천장에 달린 낡은 선풍기는 탈탈거리는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언뜻 봐도 대략 이십 년쯤은 그 자리에 있었을 것 같은 물건이었다.
찬호가 자리를 권하며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죄송합니다. 건물이 워낙 낡아서…… 관리를 한다고 하는데 쉽지가 않네요. 뭐 마실 거라도 좀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정언이 정중하게 사양하자 찬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맞은편에 앉았다. 촬영 좀, 하고 양해를 구하는 말에 찬호가 얼마든지 괜찮다는 뜻으로 손짓을 해 보였다. 윤이 카메라를 세팅하자 신기한지 이쪽을 흘끔거리던 찬호가 정언에게 물었다.
“변호사님이 홈리스 명의 도용 관련해서, 뭐 그런 거 얘기하셨는데 맞나요?”
“네. 저희가 듣기로는 여기서 실제 피해 입은 분 보호하고 계신다고 하던데요. 혹시 자세한 상황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찬호가 관자놀이 부근을 누르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성함이 홍구영 씨라고, 올해 환갑 되신 분이에요. 이분이 작년에 그 어디죠, 교회 좀 큰 데 있는데. 아, 은혜영신교회. 은혜영신교회 쪽에서 하는 무료 급식소에 나가시다가 자활 프로그램 권유를 받으셨다는 겁니다.”
은혜영신교회. 윤은 정언과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정언이 다이어리를 펼쳐 메모를 시작하며 찬호를 마주 보았다.
“혹시 단체 이름 같은 것도 기억하고 계신가요?”
“그게 제가 이름은 정확히 기억이 안 나는데, 은혜영신교회에서 항상 홈리스 급식 봉사 이런 거 같이하는 사단법인이다, 이렇게 들었습니다.”
“어게인라이프 맞습니까?”
“그것까지는…….”
찬호가 기억이 확실하지 않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정언이 괜찮다는 제스처를 취하자 찬호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무튼 자기들 사무실에 한 번 방문해라, 그러면서 그 급식 봉사하시는 여자분이 교회에서 목욕도 시켜 주고 새 옷도 주고 했었답니다. 그 여자분 차를 타고 강남 사무실에 갔는데, 인적사항 적으라고 하고 사진 찍고 그랬대요. 주소는 뭐 대충 급식소 주소로 썼던 모양입니다.”
그 여자가 누구인지는 굳이 물을 필요도 없었다. 정보현이 분명했다. 정언은 급식 봉사, 여자, 강남 사무실 따위의 단어들을 휘갈겨 적으며 재차 찬호에게 확인했다.
“본인이 아닌데 주민등록증 발급을 받아 왔다는 거죠?”
“그렇죠. 그때 20만 원인가를 받았대요. 나중에 경찰인지 변호사님인지 누가 찾아보니까 이분 이름으로 계좌 개설한 증명서, 뭐 그런 게 있었답니다.”
“그게 전부였나요?”
찬호가 영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잠깐 주저하다 대답했다.
“빌딩 청소를 시켜 주겠다고 해서 며칠 출근했다는데, 사실 노숙 오래 하신 분들은 자활이 굉장히 힘들긴 합니다. 그 생활에 인이 박여서 성실하게 출근하고, 이걸 거의 못 해요. 그래서 솔직히 제가 어디까지 이게 사실이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이분 말로는 자기는 며칠 잘 나갔는데, 정작 그 사무실에서 대표라는 사람이 계속 이것저것 트집을 잡다가 해고 통보를 했다고 하더라고요.”
“근로계약서 같은 건 당연히 작성 안 하셨겠죠?”
찬호는 그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그렇죠. 그러고 나서 이분은 그 일에 대해서 잊어버리고 있었죠. 그 뒤로 우리 교회에서 봉사하시는 신도님 만나서 이쪽으로 오시게 됐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여기로 경찰이 온 겁니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체포를 한 거죠.”
“경찰이요?”
“이분 명의로 법인 통장이 개설됐고, 거기로 한 달 사이에 몇 억이 왔다 갔다 했다는데, 저는 자세한 사항은 모르겠는데 아마 통장 발급한 해당 지점 신입 행원이 대포통장 의심 사례로 신고를 한 모양입니다. 경찰에서 추적했더니 말소된 주민등록 살려서 남이 계좌를 개설해 버렸다는 겁니다. 인적사항을 급식소 주소로 썼으니까, 거기서 탐문하다 여기까지 오게 됐고요. CCTV 확인하고 조사하니 자기는 20만 원 받은 게 다라고 한 모양이에요. 그러니까 대포통장 매매가 돼 버린 거죠.”
머릿속으로 빠르게 상황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타인의 명의로 쉽게 계좌를 개설할 수 있고, 신입 행원이 직접 신고할 정도로 의심되는 거래 내역이 있는데도 침묵하는 은행 지점.
그때까지 이 일이 수면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다는 건 해당 지점 윗선과 기존 직원들은 이미 말을 맞춰 뒀다는 뜻이었다. 정언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서요?”
“그 회사가 유령회사면 폐업 처리를 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주민등록을 살려 버린 바람에 과징금이 가족들한테 청구된다고 그래서, 제가 상생변 쪽에 법률 자문 요청했었죠.”
“해결은 잘 됐나요? CCTV 확인했으면 타인 명의로 계좌 개설한 사람 누군지 알 수 있었을 텐데요.”
“변호사님 쪽에서 어떻게 해 주신 것 같더라고요. 경찰 조사는 중단됐다고 들었어요.”
찬호는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그러나 윤은 그 즉시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머릿속에 쉽게 그릴 수 있었다. 경찰 조사가 중단된 까닭은 정보현 때문일 게 분명했다. 경찰 조사가 막혔으니 상생변에서도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더는 없었다. 아마 법적으로 가족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조치하는 게 전부였을 터였다.
찬호가 말을 이었다.
“당시에 진송신도시 현장 과장으로 계시던 분이 도움을 많이 주셨죠. 그분도 거기 발령받은 지 얼마 안 됐고, 우리도 데모 막 시작했을 때였는데…….”
멈칫한 정언이 설마 하는 얼굴로 찬호에게 물었다.
“혹시 박규형 과장님 말씀하시는 건가요?”
규형의 이름을 듣자마자 찬호가 반색을 하며 딱 소리가 나게 손뼉을 마주쳤다.
“아, 네! 맞습니다. 박 과장님하고 얘기를 하다가 제가 원주민들만 보호하는 게 아니라 홈리스나, 이런 분들도 보호하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 사정도 좀 봐 달라, 그런 적이 있거든요. 박 과장님이 그러면 자기가 현장에 채용해 주겠다, 한 번 와 보시라고 해라, 그래서 홍구영 씨가 현장에서 몇 달 일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현장에서 일한 분들이 좀 있었어요. 박 과장님이 굉장히 잘 해 주셨다고 하더라고요.”
정언이 들고 있던 펜 끝으로 아랫입술 위를 지그시 눌렀다. 그 손끝이 가늘게 떨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윤은 얼른 시선을 피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규형의 이야기와 마주치는 것은 묘한 기분이었다. 정언이 서둘러 그 짧은 동요를 감췄다.
“박 과장님은 사측 사람이고 교회는 원주민 데모 돕는 입장 아니었습니까?”
“그렇죠. 그러니까 사실 저는 되게 마음에 걸렸는데, 박 과장님이 워낙 사람이 좋았어요. 회사가 나쁜 거다, 그렇게 얘기하면서 일단 아쉬운 대로 생계는 유지해야 되지 않느냐. 자기들도 늘 일손 딸리니까 괜찮다고 했죠. 그런데 갑자기 돌아가셨잖아요, 그분이. 그러고 나서 현장 분위기가 이상해져서 홍구영 씨가 일 그만두고, 건강 나빠져서 쉬시게 된 거죠.”
그간의 사정을 알 리 없는 찬호는 순순히 대답했다. 잠깐 생각에 잠겨 있던 정언이 말을 돌렸다.
“그럼 저희가 홍구영 씨한테 몇 가지만 여쭤봐도 될까요?”
찬호가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관자놀이 부근을 긁적였다.
“대답을 제대로 하실지 모르겠네요. 귀도 좀 어두우시고 그래요. 이쪽으로 오시죠.”
자리에서 일어난 찬호는 목사실을 나서 위층으로 올라갔다. 가장 첫 번째로 눈에 들어온 유리문을 열자, 열댓 평쯤 되어 보이는 공간을 군대 내무실처럼 작은 사물함과 침상을 놓아 채운 것이 눈에 들어왔다. 서너 명 정도의 사람들이 두꺼운 담요를 둘둘 만 채 누워 있었다. 찬호가 가장 안쪽으로 향하더니 누워 있던 남자를 흔들어 깨웠다.
“어르신, 접니다. 손님 오셨는데 잠깐만 일어나 보세요.”
찬호가 말한 홍구영인 모양이었다. 구영이 뭐라고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으나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구영이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검은 머리카락이 드물 정도로 하얗게 센 머리칼은 그나마도 숱이 없어 휑했다.
올해 환갑이라고 했으나 어떻게 봐도 여든은 되어 보일 만큼 늙은 얼굴에는 고생의 흔적이 역력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뭐라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냄새가 날카롭게 코끝을 찔렀다. 윤은 저도 모르게 미간이 구겨지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그러나 정언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듯 구영의 곁에 걸터앉았다. 정언이 윤에게 손에 든 카메라를 가리켜 보였다. 윤이 서둘러 촬영을 시작하자, 정언이 목소리를 크게 해 구영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저희 방송국에서 왔습니다. 몇 가지만 여쭤보려고 하는데 괜찮으세요?”
구영이 눈을 끔뻑이며 정언을 쳐다보았다. 정언은 윤이 든 카메라를 가리키며 방송국이요, 텔레비전, 하고 다시 한 번 말했다. 구영이 그 말을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언은 그에게 천천히 물었다.
“몇 년 전에 통장 개설하라고 하면서 빌딩 청소 시켰던 데 혹시 기억나십니까?”
구영이 마른기침을 몇 번 뱉고는 입술을 달싹였다.
“잘 몰라요, 그거는, 그런 건.”
주름지고 핏기 없는 입술 사이로 보인 입 안에는 성한 치아가 드물었다. 듬성듬성 빠진 이 탓인지 발음이 새어 알아듣기 쉽지 않았으나, 정언은 다이어리를 꺼내 ‘어게인라이프’라고 적어 놓은 단어를 가리켰다.
“거기 이름이 어게인라이프 아니었나요?”
“글쎄, 영 가물거려서…….”
구영이 고개를 젓자 정언은 윤에게 나지막하게 말했다.
“김 피디, 철진 선배한테 이현교 사진 같은 거 있으면 아무거나 빨리 메신저로 보내 달라고 연락 좀 해 봐.”
고개를 끄덕인 윤은 얼른 핸드폰을 꺼내 철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사이 자기 핸드폰으로 정보현의 사진을 찾은 정언은 그 사진을 확대해 구영에게 보여 주었다.
“어르신, 그러면 혹시 이 여자분은 알아보시겠어요?”
눈을 가늘게 떴다가 크게 떴다가를 몇 번 반복하며 보현의 사진을 한참이나 보던 구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으로 핸드폰 액정 위를 짚었다.
“어, 어어…… 예. 천사, 아주 천사라고. 하늘에서 막 이렇게 내려오는…….”
느릿느릿한 말투였으나 천사라는 단어만은 확실하게 들렸다. 천사. 그 말을 입 안으로 다시 한 번 뇌자 어쩐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