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24
224화.
정언이 그 사진을 가리키며 구영을 보았다.
“이분이 어르신을 그 사무실로 데려가신 것 맞습니까?”
보현의 사진을 보더니 기억이 되살아난 듯, 구영이 조금 빨라진 투로 말했다.
“예, 맞아요. 그게, 그랬죠. 아마 나 말고도 몇 명 더 그렇게, 그때 아마…… 잘은 모르겠네, 지금은. 내가 기억이, 이렇게 막 선명하지가 못해서.”
“어르신 말고 다른 분들도 그 사무실에 가서 통장 만들고 그랬었다는 거죠?”
그 횡설수설하는 말을 용케도 알아듣고 재차 묻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구영이 콜록거리며 가슴 부근을 몇 번 쳤다. 찬호가 얼른 곁에 놓여 있던 물병에서 물을 조금 따라 내밀었다. 물을 마신 구영이 겨우 대답했다.
“예. 그런데, 내가 지금 그게 누구였나, 그런 건 기억을 못 해요.”
그때 윤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이현교의 프로필 사진을 첨부해 보낸 철진의 메시지였다. 윤은 얼른 이현교의 사진을 띄워 정언에게 핸드폰을 건넸다.
“선배, 사진 왔어요.”
윤의 핸드폰을 받아 든 정언이 구영에게 그 사진을 내밀었다.
“어르신, 여기 한 번 보시겠어요? 이분 기억나세요?”
이현교의 얼굴을 보기 무섭게 구영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팼다.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구영이 앓는 소리를 내었다.
“아이구, 예…… 아이구.”
“이 사람이 그 빌딩 청소시켰던 대표 맞나요?”
구영이 앙상한 몸을 옹송그리며 부르르 떨었다.
“예. 아주 사람을, 얼마나 막 악다구니를 쓰면서 그랬는지, 그게…….”
구영이 다시 심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찬호가 다시 물을 마시게 했으나, 이번 기침은 쉽게 멎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참 콜록거리던 구영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한쪽으로 쓰러졌다. 찬호가 황급히 구영을 부축해 자리에 눕혔다.
정언이 윤에게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촬영하는 건 불가능할 것 같다고 판단한 듯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인사를 건넨 정언은 몸을 일으켰다. 찬호가 얼른 따라나서자, 정언이 만류하고는 감사합니다, 하고 고개를 숙여 보였다. 건물 밖으로 나온 정언은 차에 바로 시동을 거는 대신 잠시 운전석 쪽 문에 기대 팔짱을 끼었다.
“정보현이 사람들 모아 데려가서 통장 개설시키고, 이현교는 거기서 명의 얻어 그걸로 한선당에서 돈 받고 한 거 확실하네. 본인도 아닌데 민증 발급받고 계좌 개설하는 거 규정상 절대 안 된다고. 이게 가능했으면 한선당, 뭐 엄대진이든 누구든 정보현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미리 세팅 넣었다는 얘기지.”
“이거 고발하면 주민 센터 직원이나 행원들이 처벌되는 거 아니에요?”
윤이 가장 걱정되는 부분은 그 지점이었다. 정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무자 선에서 처리하려고 하겠지. 그런데 실무자가 혼자 뒤집어쓰긴 일이 너무 크고, 한두 건도 아니라서 방송 내보내면 분명히 내부 고발자 나와.”
정언이 운전석 문을 열며 타, 하고 내뱉었다. 윤이 서둘러 조수석에 앉자, 정언이 문을 닫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다음 주면 끝이라니까 기분 이상하네.”
시동을 건 정언은 차를 출발시켰다. 신도시 건설 현장 앞을 가로지르다 말고, 정언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교양국에 자리 있냐고 물어봤어?”
윤은 생각지도 못한 말에 정언을 마주 보았다. 농담인가 생각했으나 절대 그런 얼굴은 아니었다. 이제 정언이 농담을 하는 건지 아닌 건지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다. 정언이 진심으로 그런 말을 한다는 게 더 놀라워,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뜬 윤은 정언에게 되물었다.
“아직도 그거 생각하고 계셨어요?”
정언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정언이 그 일을 지금까지 마음에 담아 두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한 적이 없었다. 잠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던 윤은 하하, 하고 웃는 소리를 냈다.
“선배가 그렇게 신경 쓰실 줄 알았으면 교양국 있을 때 완전 깽판 좀 칠 걸 그랬나 봐요. 최진수 부장님이 저 얘기만 들어도 아주 치를 떨면서 그 새끼 절대 못 오게 하라고 그러시게.”
그 말에 정언이 어이없다는 투로 되물었다.
“깽판 칠 줄은 알고?”
“저 사고 한 번 치면 크게 치는데요. 궁금하세요?”
“아니, 아니. 안 궁금해.”
정언이 황급히 내뱉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무슨 사고를 쳐 왔는지 가장 잘 아는 정언이었다. 굳이 김윤의 사고 리스트를 이 자리에서 업데이트하고 싶지 않을 건 당연했다. 정언의 귀 끝이 빨개진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머릿속으로 어떤 생각이 지나갔는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정언이 서둘러 라디오를 켰다. 어색할 때면 그러는 버릇이 있구나, 하고 윤은 속으로 생각했다. 낯익은 멜로디가 차 안에 떠돌았다. 유재하의 노래였다. 윤은 정언이 앞을 보며 소리 없이 입술만 움직여 그 가사를 따라 부르는 것을 문득 알아차렸다. 이런 취향이었나 싶어 윤은 별생각 없이 정언에게 물었다.
“유재하 좋아하세요?”
“아빠가 좋아했지.”
정언의 대답은 무심했다. 그러나 윤은 그 무심함이 어떤 감정들을 감추는 가면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흘리던 그 밤의 정언이 떠올랐다. 아주 평범하고, 누군가가 곁에 있어야만 할 것 같았던 그 소녀.
“선배 아버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불현듯 물은 말에 정언이 별소리 다 듣겠다는 표정을 했다.
“갑자기 뭐야.”
“그냥 궁금해서요. 어머님은 지난번에 한 번 뵈었으니까.”
“내가 김 피디는 항상 궁금한 게 너무 많다고 얘기하지 않았나?”
절대 대답하지 않을 것처럼 되물은 정언이 침묵했다. 유재하의 노래가 모두 끝날 때까지 그 침묵은 지속됐다. 그 뒤로도 두어 곡의 다른 노래가 끝날 때까지 정언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정언이 라디오를 껐다. 창을 걸러 스미는 둔탁하고 작은 소음만이 순식간에 차 안을 채웠다. 그 흔들리는 침묵 사이로 나지막하게 정언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술 잘 마셨고, 항상 바빴고. 지금 생각해 보면 일 열심히 하면서 좋은 남편, 좋은 아빠 노릇 하려고 되게 애썼구나 싶어. 그거 쉬운 거 아니잖아. 내가 해 보니까 좋은 피디는 될 수 있어도 좋은 딸 되기는 힘든데.”
마지막 말은 약간 떨렸다. 사이를 둔 정언은 곧 열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뭐, 평범한 분이었어. 딱히 말할 게 없네.”
윤은 정언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앞을 보면서도 그 시선이 느껴진 모양이었다.
“왜 그렇게 봐.”
“말하고 싶은 거 많아 보이시는데요.”
정언이 어이없다는 듯 하하, 하고 웃는 소리를 냈다.
“무당이야?”
“가끔 그럴 때 있잖아요. 내 마음에는 있는데, 그게 뭔지 아는데 말로 못 할 때. 지금 선배 얼굴이 딱 그래서요.”
깊은 호수에 누군가가 작은 돌을 던졌을 때처럼, 정언의 무표정 위로 순간 희미한 파문이 번졌다.
“다른 사람이 저보고 선배 어떤 사람이냐고 물어보면 저도 그럴걸요.”
한마디를 덧붙이자 정언이 대답 대신 앞을 보았다. 빈틈없는 옆모습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선뜻 짐작하기 어려웠다. 윤은 넌지시 정언에게 물었다.
“누가 저 어떤 사람이냐고 선배한테 물어보면 뭐라고 하실 거예요?”
“걔 취향 진짜 이상하다고.”
“농담이시죠?”
즉각 돌아온 말에 비 맞은 강아지처럼 눈꼬리가 내려갔다. 슬쩍 윤 쪽을 본 정언은 선글라스를 꺼내 쓰며 대답했다.
“그것 말고는 얘기할 게 없는데.”
얇은 입매가 언뜻 호를 그렸다. 그 표정은 한동안 머물러 있었다. 햇살이 정언의 얼굴 위로 길게 스며들었다. 명암이 강하게 진 창백한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윤은 시선을 돌렸다.
그건 정언의 언어였다.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는.
가슴의 어딘가가 조금 따뜻하게 차올랐다.
40.
정언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파티션 너머에서 넘어오는 윤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윤은 아까부터 핸드폰을 붙들고 아예 절이라도 할 기세로 애걸복걸하는 중이었다.
듣고 있자니 슬슬 짜증이 나서 핸드폰을 강제로 빼앗아 끄고 싶은 기분이었으나, 정언은 그러는 대신 컵 안에서 달칵거리는 얼음을 전투적으로 헤집었다.
윤이 그렇게 애가 닳아 매달리는 상대는 최창묵이었다. 벌써 몇 번째 전화를 끊으면 다시 걸고, 끊으면 다시 걸고를 반복하는 중이었다. 윤의 그 인내심도 대단하기는 했지만, 놀리는 것도 아니고 그 전화를 계속 받는 최창묵은 또 뭔가 싶은 생각이 안 드는 것도 아니었다.
슬쩍 옆을 넘겨다보자, 보기 드물게도 돌아 버리겠다는 표정을 한 윤이 한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핸드폰을 반대쪽으로 고쳐 쥐고 있었다.
“주필님, 저희가 방송 앞두고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네, 아뇨. 정말 아닙니다. 강요하는 거라고 생각하시면, 아뇨, 그게 아니라요. 주필님, 정말 부담 안 드리겠습니다. 5분이라도 좋으니까 그냥 딱 한 번만 만나 주시면, 네. 네.”
불현듯 윤이 생전 저렇게 남한테 매달려 본 적이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은 정언은 그런 윤을 빤히 보았다. 핸드폰 너머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윤은 곧 풀이 죽은 얼굴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쉰 윤이 핸드폰을 떼고는 깜빡이는 액정을 들여다보았다. 얼마나 전화를 해 댔는지, 양쪽 뺨이 핸드폰 열로 빨개진 채였다. 코끝으로 웃는 소리가 나는 걸 겨우 참은 정언이 윤에게 넌지시 물었다.
“왜, 절대 안 되겠대?”
잔뜩 풀이 죽은 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는 말할 게 없다고 계속 그러네요. 임 기자님이 저희한테 자료 주신 거다, 딱 한 가지만 물어보겠다고 해도 자기는 그냥 사람 만나는 것도 싫고 누구 통해서 그런 식으로 연락 넣는 것도 불쾌하다고 그러고요.”
“내가 해 봐?”
정언의 말에 윤이 펄쩍 뛰었다.
“그나마 저니까 연락이라도 받아 주는 거지, 다른 사람이 해 봐야 소용없을 거라고 돌아가면서 전화하지 말라던데요. 전화 받지도 않고 끊을 거니까 시간 낭비하지 말라고요.”
어차피 안 받아 줄 거 사람은 왜 가려, 하고 속으로 투덜거린 정언은 미간을 좁혔다.
“도대체 이 마당에 뭐가 그렇게 무섭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