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25
225화.
“엄대진이 대선 당선될 확률 높으니까 그런 것 같아요. 만약에 지금 자기가 아는 거 다 말하고, 그게 엄대진한테 굉장히 불리한 내용인데 엄대진이 대통령 돼 버린다고 하면 최창묵도 목숨 내놔야 하는 거니까.”
만약 이 방송이 잘 돼서 엄대진의 질주를 막을 수 있다면 다행이었으나, 그러지 않을 확률도 높다는 걸 결코 간과할 수는 없었다. 한 번의 방송보다 중요한 건 그 방송을 본 사람들의 여론이었다.
무사히 방송을 한다 해도, 엄대진이 그걸 덮어 버리려 한다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갈 수도 있었다. 만일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최창묵의 입장에서는 공연히 좋은 일 한 번 해 보려다 목숨 내놓는 꼴이 될 건 뻔했다.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목숨을 걸고 있기로는 다른 증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심보가 뒤틀린 정언은 팔짱을 끼며 내뱉었다.
“입 다물고 있으면 목숨 부지할 확률은 올라가겠네.”
정언이 비꼬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윤이 한숨처럼 웃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말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잖아요. 만약에 진짜 우리한테 협조한 건으로 잘못될 수도 있는 거고…… 방송 아무리 중요해도 사람 잘못되게 하면서까지 하지는 못하는 거니까.”
그 말에 속이 약간 뜨끔해졌다. 본인이 원하지 않는다면, 더구나 목숨이 걸려 있는 문제라면 협조하지 않는다고 해서 원망할 이유가 없는 건 사실이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둔감했나, 하고 속으로 생각하던 정언은 곧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그렇지.”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린 윤이 꺼진 액정 위를 만지작거렸다. 그때 상기된 얼굴로 사무실 문을 밀고 들어온 현진이 아이고 더워, 하며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내팽개쳤다. 곧 현진의 뒤를 따라 들어온 찬수가 자리에 풀썩 소리가 나게 주저앉았다.
“더뉴원랩 갔다 온 거예요?”
정언의 물음에 현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응. 건물 좋더라고.”
“거기서 뭐라고 그래요?”
“어우, 잠깐만. 나 물 좀.”
손을 들어 보인 현진이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생수병 하나를 따서 숨도 쉬지 않고 마셨다. 손등으로 입가를 닦은 현진은 잠시 숨을 돌리더니 대답했다.
“우리가 만난 거 홍보팀 담당자인데, 심혈관 질환 신약 개발 중이라고 들었다 하니까 자기들이 내년쯤에는 3차 임상 들어간다, 지금까지 개발된 어떤 약보다 효과가 뛰어나다 이러면서 아주 자신만만해 하던데.”
“홍보팀 담당자라 본인도 뭐 자세한 사정 모르는 거 아니에요?”
현진은 그 말에 절대 아니라는 듯 손을 세차게 내저었다.
“아는데 말 안 하는 거 같아. 지금 테마주로 주가 올랐는데 영향 엄청 갈 테니까. 내가 공개된 리포트만 보면 2차 임상 결과가 굉장히 성공적인데, 왜 바로 3차 임상에 안 들어갔느냐 물어보니까 그건 뭐 만에 하나 있을 수 있는 부작용이 어쩌고 그러는 거야.”
잠깐 생각하던 정언은 얼굴을 찌푸렸다.
“매뉴얼대로 답변한 것 같기는 한데, 그게 매뉴얼이면 위에서 오더가 있기는 하겠네요.”
“그래서 환자들이 굉장히 관심이 많은 걸로 아는데, 아직 인체 임상실험 안 들어간 약을 시중에서 구해서 먹을 방법이 있냐고 떠보니까 절대 없대. 말도 안 된다고 아주 우리를 뭣도 모르는 사람처럼 보더라고.”
“말도 안 되긴 뭐가 안 돼, 변순철이 그 약을 먹었는데.”
정언은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물론 임상실험 중인 약을 합법적으로 구해서 먹을 방법이 없다는 건 당연했다. 한밤중에 제약사 연구소 유리창이라도 깨고 훔쳐 오지 않는 이상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 한해서, 있을 수 없는 일이란 존재하지 않기 마련이었다. 현진이 그러니까, 하고 맞장구를 치더니 말을 이었다.
“엄대진 테마주로 급부상 중인 이유가 뭐냐고 물어봤더니, 더뉴원랩 창립 직후에 엄대진이 국회 과학기술위원회 위원장이었대. 그때 엄대진이 여기 대단한 회사라고 엄청 밀었었다네.”
“왜 밀었는데요? 그게 중요하지.”
현진이 손가락을 딱 소리가 나게 튕기면서 손가락으로 정언을 가리켜 보였다.
“그렇지, 그게 중요하지. 더뉴원랩 대표가 엄대진 고등학교, 대학교 후배더라고. 그러면 대충 짐작 가지? 회사 복도에 엄대진이랑 찍은 사진 걸려 있더라.”
“가지가지 한다.”
혀를 찬 정언은 가벼운 한숨을 뱉었다. 엄대진이 본인 입으로 잘 아는 회사라고 했을 때부터 커넥션이 있을 건 당연히 예상했지만, 이렇게 노골적인데 지금까지 어디서도 말 한 번 나온 적 없다는 것이 더 회의적이었다.
과기위 시절부터 엄청나게 밀어 주던 회사에, 지금 엄대진 테마주로 급상승하고 있다면 당연히 메이저 언론에서 다룰 만한 일이었는데도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었다는 소리인 탓이었다.
죽겠다 죽겠어, 하고 곁에서 앓고 있던 찬수가 갑자기 뭔가 생각났다는 듯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 참, 안 그래도 우리가 들어오면서 원진솔 만났는데 진솔이가 본서울에 아는 의사하고 얘기를 했대. 그쪽에서 긴급회의 들어갔다고 하더라. 기자들 사이에서 무슨 소문 있었다며?”
소문? 하고 되묻기도 전 재희가 고개를 들어 대답했다.
“아, 현 기자가 얘기했었어요. 사망 원인이 뭐가 다른 게 있는 것 같다는 말이 있다는데 확인이 안 된다고. 그게 왜요?”
심각한 표정이 된 찬수가 이마 부근을 긁적이더니 말했다.
“그런 소리가 있긴 있었네, 그럼. 자기도 아직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서울평화병원 이송 당시에 간병인이 변순철이 투약하고 있던 약을 다 챙겨 갔었나 봐. 서울평화병원에서 그 중에 뭔가 문제될 게 있었다는 얘기가 나왔대.”
“입원할 때 외부 약 체크하니까 그때 알았나?”
정언이 묻자 찬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울평화병원 담당의가 도정원 교수인가 그 사람인데, 이송 전에 본서울병원 변순철 주치의였던 이헌주 교수한테 엄청 급하게 전화를 했었대. 만약 간병인이 신약 가져왔으면 병원에서는 임상도 안 끝난 약인 거 알았을 거 아냐. 지금 생각하면 그 건 때문에 전화한 거 아닌가 싶다고 하더라.”
“본서울에서 그래서 긴급회의 들어간 거예요?”
“원 기자 얘기 듣고 바로 상부에 보고한 것 같더라고. 언론에서 알았으면 터지는 거 시간문제라 자기들이 빨리 대책 논의하려고 그러겠지. 이거 변은화가 알면 당장 아버지 왜 죽었는지 알아내라고 난리 칠 거 아냐. 자기도 그 약 복용중일 수도 있으니까. 담당 병원이 본서울인데 거기서 주치의가 그런 위험한 신약 먹는 걸 몰랐어도 문제고, 알았어도 문제지.”
정언은 그 말에 수긍했다. 두 병원 중 어느 쪽도 함부로 외부에 발설할 문제는 아니었다. 서울평화병원에서는 변순철 같은 거물이 임상실험도 마치지 못한 신약을 먹고 있었다는 걸 알릴 수 없었을 테고, 본서울병원에서는 그 사실을 알아도 몰라도 문제가 됐을 테니 언론에서 안 이상 발등에 불이 떨어졌을 건 뻔했다.
정언이 재희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전 부장님이 김인택하고 만나 본다고 한 거 어떻게 됐대요?”
재희가 들고 있던 펜을 돌리며 대답했다.
“일단 김인택 쪽에 엄대진이 변은화 타깃으로 잡고 있다, 위험하다고 전달은 했나 봐. 부장님이 증거 가지고 있으니까 원한다면 만나서 보여 주겠다고 했대. 우리 쪽에서도 김인택 스탠스 모르는데 함부로 먼저 영상부터 보낼 순 없잖아.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우리가 다음 주 방송 확실하면 도 다음 주에 방송해야 되는데 그건? 일정 조율은 됐어요?”
“지금 그쪽에서 TF 자체도 극비라 일단 내용 아는 사람이 없나 봐. 부장님이 다음 주에 심층 취재로 회의 올린다는데, 회의에서 최대한 서온건설이랑 엄대진이라는 이름 다 빼고 시도해 보신다고.”
정언은 흠, 하고 턱 끝을 만지작거리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 회의에 올린다면 아이템 내용은 무조건 공개돼야 했다. 아주 드물게 사장급이나 국장급 허가를 얻은 특종이라면 내부 발설을 막기 위해 큐시트에만 넣어 놓고 내용을 방송 직전까지 숨기는 경우도 있을 수는 있었다. 그러나 지금 시보국의 상황에서 그런 시도가 가능하다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만약에 킬 당하면?”
“플랜 B가 있긴 한 것 같은데 모르겠어. 아무튼 자기가 어떻게든 해 보겠다고는 하시더라고.”
재희도 한동의 속내를 완전히 알지는 못하는 듯, 답지 않게 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한동이라면 물론 어떻게든 방법을 찾기야 하겠지만, 방송을 결정하는 건 한동이 아니기에 어떤 방법이 있을지 걱정되는 건 사실이었다.
그런 정언을 보고 있던 재희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아, 그 명의 도용 피해자 만나 본 건 어떻게 됐어?”
“이현교랑 정보현 얼굴 정확히 기억하더라고요. 이현교가 아주 못살게 굴었다고까지 딱 얘기를 하던데? 정보현은 아주 천사 같다고 하고, 자기 강남 사무실에 차 태워 데려다줬다고도 하고.”
“다른 건?”
“경찰에서 대포통장 건으로 이분 입건했었고, 말소된 주민등록 살린 것 때문에 가족들한테 과징금 청구될 상황이어서 상생변에 도움 요청했었대요. 그런데 위에서 수사 중지 오더 떨어져서 경찰 조사 중지됐다고 그러던데요.”
정언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있던 재희가 잠깐 철진의 자리로 눈을 돌렸다. 철진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재희가 펜 끝으로 그 빈자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거 민 피디가 얘기한 건이랑 동일한 거지? 강남서 관할로 왔다가 수사 중지된 거.”
“맞아요.”
“CCTV 조사하면 바로 정보현하고 이현교 걸려들 거고 그러면 안영균, 엄대진까지 갈 테니까 그 전에 그냥 막아 버렸나 보네. 민 피디가 담당 형사가 수사 중지하라고 지시 내려온 문자 가지고 있던 거 확보했으니까, 은행 지점 인근 CCTV 영상만 받을 수 있으면 딱일 것 같은데…… 영상 가져올 수 있는지는 내가 알아볼게. 최창묵은 아직 연결 안 돼?”
재희의 물음에 윤이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절대 안 만나 주려고 하는데요.”
“이유가 뭐야?”
“모르겠어요. 무조건 자기는 그런 거 하고 싶지가 않다고 그러니까…….”
윤이 말끝을 흐렸다. 하기야 왜 안 만나려는지 이유를 알면 뭐라고 더 설득이라도 할 텐데, 무조건 안 하겠다고만 하니 윤도 무작정 매달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기는 할 터였다. 재희가 책상 위에 펜 끝을 톡톡 두드리며 마음에 걸린다는 얼굴을 했다.
“강요할 문제는 아니긴 한데, 중요한 증인이라 또 영 찜찜해. 임형원 기자님이 얘기 안 했대?”
“아뇨, 얘기는 하셨는데 자기는 그러는 게 더 불쾌하대요.”
“어렵네. 어떻게 할 거야? 최창묵은 일단 포기할래?”
그 말에 윤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구성안 나올 동안 아예 오피스텔 앞에 죽치고 있어 볼까 생각 중인데요.”
재희가 푹 웃었다. 갑자기 웃음이 터진 재희가 이상했는지, 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재희가 재미있다는 투로 윤에게 물었다.
“뻗치기 해 봤어? 말처럼 쉬운 거 아닌데. 김 피디는 너무 곱게 자랐잖아.”
놀린다기보다는 어린애 걱정하는 말투긴 했지만, 정언은 속으로 저 인간이, 하고 중얼거렸다. 그런 소리를 듣고 윤이 가만있을 리 없다는 걸 이미 잘 아는 까닭이었다. 더구나 재희가 한 말이니, 분명히 뻗치기 할 생각이 없다가도 생겼을 게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