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26
226화.
아니나 다를까, 윤이 즉시 정색을 했다.
“저도 할 수 있습니다.”
정언이 책상 밑으로 윤을 툭 쳤으나 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문득 윤이 이렇게 나올 줄 알고 일부러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재희를 쳐다보자, 재희가 내가 뭐, 하는 표정으로 씩 웃었다. 정언은 눈을 가늘게 뜨며 재희를 노려보았다. 남의 속을 알 리 없는 혜주가 턱을 괴며 생글생글 웃었다.
“김 피디님, 밤새기 심심하시면 저희랑 같이하실래요? 저희가 같이 가 드릴 수 있는데.”
그 말을 들은 호형이 얘들 좀 보라고 손가락질하며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와, 너 아무리 요즘 여자라도 너무 적극적인 거 아냐?”
“하여튼 안 피디님은 김 피디님 질투하는 거 장난 아니라니까.”
희림이 곁에서 한마디 거들자 호형이 억울하다는 얼굴을 했으나,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 선수를 친 건 재희였다.
“내가 어디서 봤는데, 요즘 여자들이 적극적인 게 아니라 여자는 원래 잘생긴 남자한테 적극적이래.”
호형은 뒤통수를 맞은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다 울상을 지었다.
“강 선배까지 이러실 거예요?”
“난 유치원 다닐 때부터 여자들이 항상 적극적이었거든.”
재희가 절대 농담 같지 않은 얼굴로 대꾸했다. 농담이든 진담이든 납득할 만한 소리라, 뭐라고 할 말이 없게 된 호형이 편을 들어 달라는 듯 곁의 예준을 보았다. 그러나 예준은 아이고 자료가 어딨더라, 하며 짐짓 딴청을 부렸다.
호형이 서러워 죽겠다는 표정을 했다.
“와, 진짜 너무들 하네. 계속 그러면 나 울어요?”
“울어, 안 말려.”
냉정하게 손을 휘적거린 재희가 윤에게 다시 시선을 주며 당부했다.
“아무튼 지금 뻗치기 들어가면 기약 없는데 생각 잘 해. 하루 이틀 사이에 설득이 되면 다행인데, 아니면 최창묵 관련된 건 버리고 팩트 확실히 증명할 수 있는 것만 남기라고.”
“네.”
대답하는 윤을 본 정언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강재희 이겨 먹어 뭐하려고, 하는 소리가 목까지 나왔으나 윤이 그러는 데는 어느 정도 자신의 탓도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뭐라고 말을 보탤 수가 없었다.
기약 없이 남의 집 앞에서 죽치고 있다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말이 좋아 취재고 뻗치기지, 하루 이틀 하다 보면 스토커도 아니고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자괴감이 밀려오는 것도 사실이었다. 잠깐 자리를 비우는 사이 놓치면 절망감이 두 배였다.
윤이 애걸복걸하며 최창묵에게 매달리던 걸 떠올리자 꼭 그 짓을 시켜야 되나 싶어 막 심란해지려는 즈음,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정언은 무심코 핸드폰으로 눈을 주었다. 노이섭 형사의 메시지였다.
― 이원욱 상태 호전돼서 다음 주 중으로 구치소 이송합니다 손경일 안성 인근에서 본인 명의 카드 사용하려다 실패해서 추적 중입니다
멈칫하는 정언을 본 윤이 의아해하며 곁에서 물었다.
“왜요?”
정언은 방금 들어온 메시지를 윤에게 보여 주며 말했다.
“이원욱 다음 주 중으로 구치소 들어간대. 손경일은 안성 근처에서 본인 명의 카드 쓰려다 실패했다는데.”
“도주 중인데 카드를 왜 썼죠?”
윤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정언은 관자놀이 부근을 긁적이며 눈썹을 좁혔다. 확실히 도주 중에 본인 명의로 된 카드를 쓴다는 건 일반적이지 않은 일이기는 했다.
“현금이 다 떨어져서 아닐까? 손경일이 돈 문제로 조창식하고 심하게 싸웠고, 본인도 돈 쓰는 게 마음대로 안 됐다고 여러 번 얘기한 것 같은데…….”
정언은 문득 말을 멈췄다.
“추적당할 거 뻔히 알 텐데 카드 쓴 거 보면 손경일도 완전히 궁지로 몰렸겠는데. 익숙한 포항으로 돌아가서 숨을 가능성도 있겠네.”
“그런데 경찰도 거기까지 생각하지 않을까요?”
“그렇겠지. 이원욱 말로 그때 손경일이 자기 경호할 애들 데리고 해외로 도주하려고 했다고 그랬지?”
“네.”
“혹시 CCTV 같은 거 확보했으면 혼자 다니는지 아닌지 알 수 있지 않으려나?”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정언은 이섭에게 전화하기 위해 그새 꺼진 핸드폰의 화면을 다시 켰다. 그때 갑자기 핸드폰이 진동하며 처음 보는 번호로 전화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았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낯선 번호였다.
“뭐지?”
고개를 갸웃한 정언은 즉시 전화를 받았다.
“네, 서정언입니다.”
거의 반사적으로 습관이 된 첫마디를 꺼내자, 아주 짧은 침묵 뒤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안녕하십니까, 피디님. 저 한국선진당 엄대진 의원님 보좌관 안영균입니다.』
정언은 순간 귀를 의심했다. 안영균이라니, 이건 상상도 하지 못한 상대였다. 정언의 표정이 아무래도 이상했는지 윤이 입모양으로 왜요, 하고 물었다. 정언은 볼펜을 찾아 쥐며 메모지에 안영균 전화, 하고 써서 윤에게 보여 주며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다.
“네. 무슨 일로 연락 주셨습니까?”
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정언은 입가에 손가락을 댔다. 영균이 대답했다.
『저희 와이프하고 만나셨다고 들었습니다.』
차분한 목소리였다. 아무리 전화라지만 거의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지방 출신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억양 없는 완벽한 말투와 정확한 발음은 마치 프로그램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 매끄러움에 어쩐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네, 그런데요.”
『 피디님이시죠?』
순간 정보현에게 명함을 주었던 것이 떠올랐다. 시사보도국 3부라고만 쓰여 있었기에 정보현이 그 명함만으로는 소속을 알 수 없었겠지만, 인터넷에 자신의 이름 석 자만 치면 기사가 쏟아지는 판이었다. 핸드폰으로 검색만 했어도 바로 서정언이 누군지 아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정보현이 인터뷰 도중 갑자기 오지도 않은 전화를 받겠다고 자리를 뜬 건 뭔가 의심스러워서가 분명했다. 그 자리에서 남편에게 얘기했을 확률이 높았다. 게다가 이미 엄대진 쪽에서는 가 자기를 추적하고 있다는 걸 아는 상황이니, 무슨 이유로 정보현을 찾아왔는지 눈치챘을 게 뻔했다.
“용건 말씀하시겠습니까?”
머릿속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정언의 사무적인 물음에, 짧은 정적 이후 대답이 돌아왔다.
『의원님께서 뵙고 싶어 하십니다. 시간 나시는 대로 저희 의원실로 방문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정언은 눈을 가늘게 떴다. 엄대진이 직접 만나고 싶어 한다는 건 뜻밖의 제안이었다. 메모지에 안영균이 엄대진 의원실로 방문해 달라는데요, 하고 적어 윤에게 건넨 정언은 재희를 가리켰다. 눈으로 그 메모를 읽은 윤이 멈칫하더니 바로 재희에게 메모지를 건넸다.
“제가 임의로 결정할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요.”
『강재희 피디님도 함께 뵈었으면 하시는데, 그럼 제가 그쪽으로 연락하면 되겠습니까?』
시선을 들자 메모지를 손에 든 재희가 멈칫하며 정언을 마주 보았다. 정언은 재희를 가리키며 입 모양으로 선배도, 하고 말했다. 재희가 손으로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하시죠.”
정언의 대답에 영균이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네, 하고 대답하기 무섭게 전화가 끊어졌다. 정언은 끊어진 전화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눈썹을 좁혔다. 옆에서 보고 있던 민혜가 재희와 정언을 번갈아 보더니 물었다.
“왜 그래, 뭔데?”
“안영균한테 전화가 왔어요.”
안영균의 이름을 듣기 무섭게 사무실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정언에게 쏠렸다. 민혜가 안 그래도 동그란 눈을 두 배쯤은 돼 보이게 치켜떴다.
“안영균? 엄대진 보좌관? 걔가 왜?”
“엄대진이 선배랑 나 만나고 싶다고 그랬다는데.”
민혜가 그 말을 듣자마자 정언의 어깨를 찰싹찰싹 소리가 나게 때리며 팔팔 뛰었다.
“어머, 어머. 미쳤어. 절대 가지 마! 거기가 어디라고 가, 절대 안 돼! 자기가 뭔데, 무슨 짓 하려고 강 피디랑 정언을 보자고 그래? 미친 놈, 아주 간이 배 밖으로 나왔지! 가지 마, 응? 절대 가지 마!”
아야, 하고 얻어맞은 어깨를 문지르는 사이, 윤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정언에게 물었다.
“선배, 가실 거예요?”
물론 이미 안 가시면 안 되냐고 써 붙인 얼굴이었다. 정언은 대답 대신 재희에게 공을 넘겼다.
“어떻게 해야 돼요?”
잠시 생각하던 재희가 팔짱을 끼며 씩 웃었다.
“어차피 공문 요청하려고 했어. 자기가 먼저 만나자니까 재밌는데?”
눈을 휘둥그렇게 뜬 현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새끼가 어디서 목숨 가지고 재미를 찾아! 한 번 죽지 두 번 죽는 줄 알아?”
“두 번 안 죽는데 뭐가 걱정이에요.”
“야!”
현진이 고함을 쳤다. 그 순간 재희의 책상 위에서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재희는 정언 쪽으로 액정을 돌려 번호를 보여 주었다. 정언은 방금 자신에게 온 전화번호를 확인하고는 맞아요, 하고 대답했다.
“얘기나 한 번 들어 보죠, 뭐.”
핸드폰을 흔들어 보인 재희가 통화 아이콘을 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재희입니다, 하며 사무실을 나가는 재희의 뒷모습을 보던 현진이 저 새끼가 진짜, 하고 중얼거리며 이마를 짚었다. 사무실의 공기가 불안하게 움직였다.
턱을 괸 정언은 닫힌 문에 시선을 주다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빤히 보는 윤과 눈이 마주친 건 그때였다. 반사적으로 왜, 하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으나 윤이 왜 그러는지는 이미 정언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정언은 대답 대신 윤의 팔을 한 번 툭 쳤다.
“일이나 해.”
윤이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듯 두어 번 입술을 달싹이다 낮은 한숨을 쉬었다. 그 소리에 공연히 심장이 조금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걱정하게 만들고 싶지 않은데, 자꾸 이런 일이 생기는 건 정언에게도 불편했다.
한 주만 더 버티면 모든 게 조금 더 편해질 수 있을까. 속으로 생각하던 정언은 문득 윤이 살짝 자신 쪽의 파티션에 메모를 붙이는 것을 보았다.
― 저랑 약속한 거 지키셔야 돼요
이제는 익숙해진 그 단정한 글씨에 정언은 오랫동안 시선을 둔 채 움직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