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27
227화.
간단한 저녁 식사를 마친 뒤의 회의실 안은 각자가 든 커피 향으로 가득 채워졌다. 물 마시듯 습관처럼 커피 컵의 빨대를 입에 물고 앉은 팀원들은 회의실 탁자 위에 걸터앉은 재희를 쳐다보았다. 재희가 충혈된 눈가를 두어 번 문지르더니 입을 열었다.
“인근 상가 쪽 당시 은행 근처에서 정보현 나온 영상 있는지 전부 연락 돌려서 물어봤는데, 한 군데서 사설 CCTV 영상 가진 게 있더라고. 강남서 조사 나왔을 때 제출한 영상이고 혹시 몰라서 백업한 거래. 화질이 괜찮아서 분석 맡기면 특징 분석해서 얼굴 거의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아. 우리한테 정보현 사진도 있으니까.”
“법영상분석연구소 주성안 소장님한테 연락할까요?”
윤이 묻자 재희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괜찮아. 내가 오는 길에 연락했어. 엄청 급한 건이라고 하니까 영상 받는 대로 바로 분석해 준대.”
재희가 턱 끝으로 다이어리를 팔락거리며 넘기던 민혜를 가리켰다.
“송 작가는 방송 흐름 어떻게 갈 건지 아우트라인 얘기해 줘 봐.”
뚜껑까지 휘핑크림을 채운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민혜가 입을 열었다.
“박규형 씨 사건으로 시작해서 박규형 씨가 서온건설 측 배달부였다, 그 사실을 폭로하려다 죽었다는 걸로 도입 들어가야지. 녹취록하고 문서 파일 있고, 며칠만 기다려 달라고 한 최유림 변호사 증언도 있으니까.”
“메이랑 유란 CCTV도 증거로 들어가죠?”
곁에서 질문하는 윤에게 민혜는 별소리 다 한다는 얼굴로 손가락을 하나 흔들어 보였다.
“당연하죠, 그걸 어떻게 구했는데 안 넣어. 박규형 씨한테 돈 건네받은 한선당 의원들 CCTV 자료 보여 주고, 지금까지 서온건설에서 배달부로 일하다 의문사한 사람들이 여러 명 있다는 얘기로 넘어가는 거지. 이훈주 씨, 윤대석 씨, 고정민 씨, 그리고 박규형 씨가 사고로 위장돼 살해당했다는 거 얘기하고. 이원욱 증언하고 병원 기록으로 이훈주 씨하고 박규형 씨 죽음에는 조창식이 직접적으로 관여했다는 거 증명할 수 있으니까.”
민혜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있던 정언이 턱을 괴고 있다가 끼어들었다.
“허주경 사장 인터뷰는 녹화나 녹취한 내역 없잖아요. 그건 어떻게 할 거예요?”
재희가 민혜 대신 대답했다.
“상생변 박기율 변호사님이 소송 준비하면서 허 사장 나하고 인터뷰한 내용 방송에 사용해도 좋다고 동의 얻었대. 방송 나가면 우리 방송 내용 증거로 쓸 거니까 허 사장 입장에서는 불리할 거 하나도 없지.”
허주경 사장 사건에 대한 검찰의 증거 조작과 공윤승 변호사와의 담합 문제 고발이 진행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윤은 탁자 위에 손끝을 톡톡 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엄대진이 왜 갑자기 만나자고 먼저 연락을 해 왔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만약 지금 벌어진 일에 박기율 변호사를 위시한 상생변의 소송까지 더해진 걸 알았다면 마음이 급할 만도 했다.
민혜가 다이어리에 빽빽하게 적힌 메모 위로 펜 끝을 움직이며 말을 이었다.
“고정민 씨는 허주경 사장 증언이 있고, 여기서 공윤승하고 담당 판검사들 싹 신환석 라인인 거, 신환석이 파트너였던 거 언급하고. 윤대석 씨는 가족들 증언하고 약 처방받은 내역, 처방 내린 김회영 원장이 캐나다로 튀었다는 거, 캐나다에서 일하는 병원이 조석문 원장 거고 그 조석문 원장이 이훈주 씨 사망 판정 내린 의사라는 것까지 싹 넣고. 이 사람들이 죽은 이유는 전부 서온건설에 피해가 가는 일을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넘어가자고.”
“그리고 조창식은 손경일이 있는 경일용역 소속, 손경일은 서온건설이 남정건설이던 시절부터 남제선과 커넥션이 있었던 조폭이라는 거 밝히고?”
정언이 거들자 민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지. 그리고 여기서부터 남정건설 시절부터 엄대진하고 서온건설 남제선이 무슨 관계였는지 까발리는 거지. 과거에 엄대진 재단 공사 몰아주기 했던 것부터 시작해서, 엄대진이 정치 시작하고 수도권 올라올 때 남정건설도 사명 변경하고 올라온 거, 수도권에서 SOC 공사 다수 수주하면서 성장한 거, 한선당 지역구 공사 전담한 거 전부 다 포함해서. 조창식이 임 기자님한테 남긴 동영상에 엄대진이 남제선 조종한다고 자기 입으로 말한 증거도 있잖아.”
조창식의 동영상 내용을 머릿속으로 되짚어 보던 윤은 민혜에게 물었다.
“거기 박규형 씨 관련 얘기도 있지 않아요?”
“그렇죠. 배달부들 죽은 데 서온건설과 엄대진이 어떻게 관련이 있는지 가장 확실하게 보여 주는 거니까 거기 넣으면 될 것 같아.”
“자재 조작한 부분은요?”
“그건 에서 감리 조작해서 내진설계 미비한 거 통과시키고 자재 속인 거 얘기할 테니까, 방송하면 거기 자료화면 좀 가져다 쓰면 될 거예요.”
물론 방송을 한다는 전제하에, 하고 민혜가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언제나처럼 발랄한 말투였으나, 그 내용은 그다지 발랄하지 않은 통에 회의실 안의 공기가 약간 무거워졌다.
에서 한동이 어떤 방법으로 이 아이템을 통과시킬지 지금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물론 더 큰 문제는 통과되지 않을 확률이 훨씬 높다는 점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깐 말이 없던 재희가 미간을 누르며 말했다.
“역할 분담하기로 했으니까, 그 부분은 적당히 압축해. 고원종합기술공사 이종규 팀장이 보낸 내부 고발 자료 보여 주고.”
“오케이. 방송할지 못할지 그건 다음 주에 보면 나오는 거니까 일단 그때 생각하고, 이 과정에서 서온건설하고 한선당이 하청 업체들 쥐어짠 증거 제시. 서온건설 성장하면서 하청업체들이 공사 따내려고 접대하고 뇌물 주는 거 갈수록 심해진다는 증언 넣고, 노경건설 이금호 사장이 시가 10분의 1도 안 되는 금액으로 20년간 소유하던 부지를 엄대진 자식 명의로 넘긴 거 보여 주고. 엄대진 가족들이 이런 방식으로 차액 남긴 거 때리고.”
정언이 고개를 끄덕이다 호형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SO 컴퍼니는 그다음에 들어가면 되겠네. 안 피디, 거기 들어가는 돈 흐름은 지금 우리가 가진 자료로 다 증명할 수 있어?”
호형이 앞에 펼쳐 준 자료를 넘겨보며 대답했다.
“응. 생각해 봤는데, 조사가 막힌 부분은 막혔다고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방송감은 될 것 같아. 국세청에서도 감사 중단 명령 내려왔고, 강남서도 서장이 직접 수사 중지하라고 오더 내린 증거 있잖아. 일단 우리가 가진 유령회사 계좌들 정보 꽤 있으니까.”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민혜는 그렇지, 그렇지 하며 추임새를 넣었다.
“엄대진 보좌관 안영균과 부인이 자선단체 이용해 노숙자들 명의 확보하고 이걸로 유령회사 만들어 SO 컴퍼니로 집어넣으면서 돈세탁에 이용한다, 여기까지 갈 수 있지.”
“엄대진이 시켰다는 증거는 없으니까 빠져나갈 여지가 있지 않아요?”
아무래도 불안해진 윤이 민혜를 마주 보자, 민혜가 어깨를 으쓱했다.
“엄대진이 뭐 난 모른다, 다 안영균이 했다 그럴 확률 높지만 사람들이 바보는 아니니까. 공격당할 빌미는 충분히 줄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럴까요?”
윤의 얼굴을 본 민혜가 쿡쿡 웃고는 자신의 관자놀이 부근을 톡톡 두드렸다.
“김 피디, 팩트 중요하지만 우리가 경찰은 아니니까 한계가 있다는 거 생각해야지. 방송으로 보여 줄 수 있고, 우리가 팩트 증명 가능한 것만 하면 돼요. 우리는 여기서 엄대진이 했다고 말할 필요는 없어요. 무슨 말인지 알죠?”
“아, 네.”
윤이 수긍하자 민혜가 좋아요, 하며 말을 이었다.
“SO 컴퍼니가 평가에 비해 한국에서 지나치게 많은 투자를 받고 있고, 투자하는 회사들은 대부분 유령회사고. 대표는 남제선 부인의 오촌 조카 채기원. 임 기자님이 말한 사례나 홍구영 씨 사례 보여 주면서 이런 식으로 만든 유령 회사에 수십 억, 수백 억 돈이 오가고 있고 채기원 명의 빌딩에 어게인라이프랑 성재춘 의원실 있다, 임대료도 내지 않는다, 무슨 관계냐 던져 주기만 해도 될 것 같아.”
석현이 아무리 생각해도 아쉽다는 표정으로 팔짱을 끼며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최창묵이 어게인라이프 관련해서 엄대진이 그런 용도로 사용한 거다, 그거 한마디만 해 주면 되는데.”
최창묵 이야기가 나오자 팀원들의 시선이 윤에게 쏠렸다. 재희가 서둘러 손을 휘적거려 주의를 돌렸다.
“태도 애매한 사람 하나 때문에 우리가 방송 미룰 순 없잖아. 일단 그 부분은 마지막까지 남겨는 두자고. 김 피디한테 설득이 된다면 넣고, 아니면 최창묵 관련 내용은 싹 빼고.”
최창묵 증언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분위기가 조성되면 자신에게 부담이 될까 싶어 그런 모양이었다. 물론 뻗치기 힘들 거라는 재희의 말에 오기가 생겨 죽어도 최창묵 꼭 만나 보겠다고 결심하기는 했지만, 만약 실패하면 어떻게 할까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병 주고 약 주나 싶은 생각이 안 드는 건 아니었으나, 동시에 그 복잡한 심경을 귀신같이 캐치하고 바로 그렇게 말해 주는 재희의 눈치에 속으로 감탄이 나왔다. 재희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는지, 석현이 화제를 돌렸다.
“그럼 이규완이 준 영상은 마지막 하이라이트로 터트리나?”
“그게 좋겠지? 대선 앞두고 우리 방송 어떻게 막으려고 했는지 얘기하면서 조창식 영상에서 엄대진이 국장님 날리겠다고 한 거 먼저 보여 주고, 이규완 영상에서 엄대진이 어떻게 공영방송 먹을 계획을 세웠는지 다 까발리자고. 변순철 회장 얘기 핫하니까 엄대진이 장인 죽여 미디어그룹 부인 앞으로 돌리고 완전히 언론 통제하려는 플랜 짰다, 이걸로 가면 될 것 같아.”
민혜가 깔끔하다, 하고 자화자찬을 하며 손뼉을 짝짝짝 쳤다. 부러 가라앉은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더 애를 쓰고 있다는 게 눈에 빤했다. 그러나 다들 알고도 속아 준다는 얼굴로 와, 하고 호응했다.
박수를 치던 민혜가 갑자기 현실을 자각했는지 헛웃음을 뱉었다.
“설명하면 30분도 안 되는 내용인데 그 30분 얘기하려고 우리가 이 생고생을 했니?”
“엄대진은 우리가 몇 달 그 생고생하면서 취재한 짓 몇 십 년을 해 온 거잖아요.”
정언의 말에 민혜가 그건 그러네, 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몇 십 년의 비리를 몇 달에 걸쳐 취재한 결과물이 단 한 시간의 방송이라는 건 어쩐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윤이 머릿속으로 지난 몇 달을 되짚는 동안, 가벼운 한숨을 쉰 민혜가 재희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강 피디, 엄대진 만나러 갈 거야? 약속은 잡았어?”
재희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빨대를 물어 부정확해진 발음으로 대답했다.
“금요일 저녁. 장소는 그쪽에서 알려 주겠다고 하고, 나랑 서 피디랑 김 피디 딱 집어서 얘기하던데.”
“김 피디까지?”
민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윤에게 고개를 돌렸다. 재희가 안영균과 통화한 직후 얘기해 준 사항이기는 했다. 이번 건 취재하는 거 알고 부르는 거야, 하고 덧붙인 재희는 윤에게 안 가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연히 안 갈 마음은 전혀 없었다.
자신까지 부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때도 정언이 그 자리에 간다는 게 불안해 쫓아갈 생각이었다. 아예 같이 오라고 하는데 거절할 이유가 있을 리 만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