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3
23화.
― 선배 마음에 들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농담처럼 뱉었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진심이었다는 건 윤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젠 오기가 생기려는 참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정언의 마음에 들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건 맹세코 살면서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그러니 자신이 왜 이런 오기를 부리는지 이해가 안 가는 건 당연했다. 처음에는 그저 호기심이었다. 서정언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고, 어떻게 일하는지 궁금했고, 왜 이런 일에 매달리는지 궁금했다.
곧 윤은 자신이 정언과 함께 있는 매 순간마다 계속 뭔가를 좀 더 알고 싶어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윤에게도 이런 감정은 낯설었다. 그냥 오기라기엔 조금 더 말랑말랑했고, 호기심이라기엔 약간 선을 넘는 것 같았다. 이걸 뭐라고 정의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윤의 마음이야 어쨌거나, 정언은 마치 그런 말을 들은 적도 없다는 사람처럼 굴었다. 때문에 정언이 자리에 앉아 자신이 가져온 자료를 보는 동안, 윤은 파티션 너머에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냥 입 닥치고 얌전히 커피나 쪽쪽 빨 걸 그랬다고 후회하고 있었다.
정언에게만 이런 식인 게 더 미치고 환장할 일이었다. 평소처럼 그냥 생글생글 웃으면서 상냥하게 굴고, 괜히 쓸데없는 소리를 안 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걸 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정언 앞에만 있으면 생각보다 말이 먼저 튀어 나가는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칼같이 선을 긋는 게 눈에 보이는데, 이럴 때마다 정언이 ‘이 새끼를 어쩌면 좋지.’라고 써 붙인 얼굴로 자신을 응시하면 그 자리에서 정말 증발해 사라지고 싶을 지경이었다.
“정신 차리고, 이거 어떻게 생각하냐고.”
눈앞에서 딱 소리가 나게 손가락을 튕긴 정언이 태블릿 위를 손끝으로 툭툭 쳤다. 윤은 황급히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사레가 들려 콜록거렸다. 정언이 팔짱을 끼며 윤을 빤히 보았다. 윤은 겨우 기침을 수습하고는 정언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 저, 그러니까, 제가 생각하기에도 좀…… 자살로 보기엔 마음에 걸리는 게 많아요.”
더듬거린 윤은 두어 번 더 헛기침을 했다. 아침 내내 이불을 차고 싶은 기분이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정신을 놓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박규형 씨 블로그 보면 무슨 물건 하나만 사도 구입처, 가격, 구성품, 설명서, 사용 방법 이런 거 다 꼼꼼하게 적어 두더라고요. 그런 사람이 유서를 안 남겼다는 게 일단 이해가 안 돼요. 맞벌이라도 부인 수입이 큰 게 아니라서 애 둘 있는 형편에 좀 빠듯했을 거 같거든요. 애들한테 쓰는 돈은 전혀 안 아낀다고도 했고요. 진짜 죽으려고 생각했으면 뭔가 자기가 죽고 난 뒤의 대책 같은 걸 유서로 남기려고 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해요. 부인 혼자서 현재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건 분명히 알았을 텐데, 아니, 물론 사람이 죽는 마당에 남 생각까지 안 할 수도 있긴 하지만…….”
민혜와 정언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져 지은 죄도 없이 목소리가 점차 줄어들었다. 윤이 말끝을 흐리자 민혜가 엉덩이라도 뚜덕거려 줄 기세로 맞장구를 쳤다.
“어, 그렇지, 그렇지. 김 피디 말 잘하네. 그리고 이 정도로 기록 욕구가 있는 사람이 자기 일신에 문제가 생겼는데 그걸 아무한테도 말 안 할 순 없을 거 같아. 기제국에서 가져왔다는 자료 나 아직 다 못 봤는데, 거기 뭐 힌트 될 만한 건 없어요?”
“영상은 아직 확인 안 했고, 녹취 프리뷰 따놓은 게 있어서 그거 먼저 읽어 봤는데 이 부분 좀 이상하지 않아요?”
정언이 대신 대답하며 민혜 앞으로 프린트를 하나 밀어 놓았다.
“여기 23분 4초 부분 좀 봐요. ‘아이, 그게 저도, 이게 사측이 좀 여러 가지로 문제가 있다는 거 저희도 알죠. 아는데, 저는 힘이 없고. 마음이 너무 불편해서 방법을 찾고는 있는데 지금으로서는 제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부분이 있다는 거 양해 좀 해주시고. 피디님 이거는, 이거는 비방으로, 오프더레코드로.’”
태훈이 규형과 나눈 대화의 녹취록이었다. 정언이 가리킨 타임코드 부분을 빤히 들여다보던 민혜가 윤에게 다시 눈을 돌렸다.
“‘사측이 좀 여러 가지로 문제가 있다.’, 이거 더 확실하게 얘기한 건 없고? 김 피디 친구는 뭐라고 얘기 없었어요?”
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도 물어봤는데, 부지 선정하고 개발 과정에 의혹 있는 건 알았지만 자기들은 일단 주민들한테 포커스 맞춘 거여서 더 자세히 얘기하진 않았대요. 자기 생각에는 그거 관련 얘기 아니었을까 하는 거 같던데요.”
“서온건설 뇌물 의혹 있잖아요. 그때 한선당 리스트도 나오고 했는데 다 무혐의 받았고.”
정언이 말을 덧붙였다. 민혜가 뚜껑을 닫아 놓은 만년필 끝으로 미간을 긁었다.
“음, 맞아. 그때 엄대진계 의원들 다 걸렸었나?”
엄대진은 현재 한국선진당 소속 의원으로, 차기 유력 대권 주자로 손꼽히는 인물 중 하나였다. 그는 대표 보수 일간지 를 비롯한 여러 미디어를 소유한 언론 재벌 JMG 그룹 변순철 회장의 둘째 사위이기도 했다.
정언이 언급한 것은 속칭 ‘서온건설 게이트’였다. 서온건설이 신도시 개발 공사 수주를 위해 엄대진을 비롯한 친 엄대진계 의원들과 일부 관계 부처 인사들에게 뇌물을 줬다는 한 제보자의 폭로에서 시작된 뇌물 수수 사건이었다.
현 여당인 한국선진당과 제1야당인 민권당 사이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매일 공세가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신도시 부지 개발 선정에 엄대진이 직접 개입해 토지 매매로 엄청난 차익을 남겼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검찰 수사에서 엄대진과 관련 인사들은 거의 무혐의 판정을 받았다. 결국 처벌된 건 당시 한선당 비례대표였던 모 초선 의원과 국토교통부의 차관급 인사 두 사람밖에 없었다. 게다가 서온건설 게이트를 다뤘던 언론사들은 소송은 물론이고 보복성 세무조사 등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정언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꼭 그게 아니더라도 직원이 사측 비리를 인정하는 뉘앙스를 드러낸다는 건 회사 입장에서 거슬리겠죠. 안 그래도 원주민들이 개발 과정이 불투명하고 납득할 수 없다, 보상이 턱없이 부족하다 하면서 집단행동 들어가는 판인데 사측에서 이걸 인정한다?”
민혜는 정언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있다가 몸을 뒤로 젖혔다.
“어우, 이거 완전 음모론인데. 소설 한 편 나오긴 한다.”
“사측에서 빨리 묻고 싶으니까 부인한테 보상금 수령 강요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잖아요. 보상금이 적은 편은 아닌데, 사측에서 입막음 대가라면 싸다고 봤을 가능성도 있고요.”
“그 돈을 박규형 씨한테 직접 줘서 입막음할 수가 없었나? 사람 죽이는 거 리스크가 크잖아. 왜 굳이 그렇게까지 했지?”
“살인이었을 수도 있고, 사고였을 수도 있죠. 협박만 하려고 했는데 실족사 했을 가능성도 있지.”
정언의 대답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민혜가 펜을 들고 회의실 안을 서성거리다 벽에 걸린 시계로 시선을 주었다.
“말은 돼. 말은 되는데, 이거 완전 소설이야. 강 피디 두 시에 들어온다고 했지? 두 시 다 됐는데…….”
민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때맞춰 회의실 문이 열리며 재희가 나타났다. 화들짝 놀란 민혜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여튼 양반 못 돼요. 자기 얘기 하자마자 오는 거 봐. 일단 여기 좀 앉아 보시고.”
재희를 끌어다 앉힌 민혜가 테이블 위에 이리저리 널려 있던 태블릿과 문서들을 모아 놓고는 입을 열었다.
“이거 지금 제보자 인터뷰 딴 거랑 뭐 자료 여러 가지 해서 우리가 회의를 좀 했는데, 전후 사정이 수상하긴 해. 강 피디도 이건 동의하지?”
안경을 고쳐 쓴 재희는 뭔가 탐탁지 않다는 투로 대답했다.
“오전에 메일로 정리해서 보내 준 거 읽어 보긴 했어.”
읽어 보긴 했어, 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뉘앙스는 그리 긍정적이지 않았다. 윤은 정언의 눈치를 흘끔 보았다. 정언이 펜 끝을 다이어리 위에 빠르게 톡톡 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초조한 듯한 느낌이었다. 재희가 가벼운 한숨을 뱉었다.
“나한테 말한 게 다야? 제보자 얘기하고 담당 경찰서, 국과수, 서온건설 인사과 말이 서로 다른 건 알겠어. 그리고 박규형 씨 블로그하고, 회사에서 보상금 문제 제시한 거하고. 또?”
정언이 서둘러 말을 받았다.
“아침에 김 피디가 기제국 진송신도시 취재 자료 일부 받아 온 게 있는데, 확인해 보니까 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요. 박규형 씨가 신도시 개발 과정에서 제기된 의혹을 인정한다는 식으로 얘기가 나와서…….”
다음 순간 재희가 손을 들어 정언의 말을 끊었다.
“스톱. 지금 소설 쓰고 있는 거 알지?”
그 말을 듣기 무섭게 정언이 얼굴을 확 구겼다.
“정황 증거라는 게 왜 있는데요. 어쨌든 자살로 보기 힘들다는 건 선배도 솔직히 동의하잖아요.”
“이상한 거 알아. 그런데 지금 가져온 거 다 정황 증거에 심증이야. 이 짓 하루 이틀 했어?”
“부검 결과 나오면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거 아니에요. 국과수에서도 외견상 추락사 소견으로 보인다고 한 게 다예요.”
“서 피디.”
재희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다시 한 번 정언을 불렀다. 뭐라고 한마디 더 하려던 정언이 재희의 표정을 보고는 곧 입을 다물었다. 쓰고 있던 안경을 벗으며 고개를 숙여 미간을 한참이나 누르고 있던 재희가 눈을 들지 않은 채 말했다.
“본인이 무슨 얘기 하는지 알고 해. 지금 회사가 개발 비리 알고 있는 직원 살인을 사주했다고 주장하는 건데, 그거 확신해? 죽은 사람이 신도시 개발 과정에 의혹 있다고 언급했다는 거 하나 가지고 어디까지 가는 거야?”
“선배.”
“그 인터뷰에서 박규형 씨가 뇌물이라는 단어 한 번이라도 사용했어? 내부고발자로 볼 수 있는 부분이 확실하게 있냐고. 진송신도시 관련 의혹 이미 뉴스에서도 다 보도된 내용이야. 의혹 있을 수 있고 그게 사실일 수 있지. 그런데 그룹 임원도 아니고 현장 과장이야. 현장 과장이 사측에서 살인을 사주할 만한 정보를 알고 있었다?”
“그건 아직 알 수 없는 부분이고요.”
“본인도 알 수 없는 걸 나한테 왜 가져와?”
정언의 대꾸에 재희가 싸늘하게 되물었다. 윤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첫날 말고는 재희와 직접 마주칠 일이 많지 않았기에, 지금까지는 재희에 대한 사람들의 평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막상 정색하는 재희를 눈앞에서 보니 잘못한 것도 없이 움츠러드는 기분이었다. 수학 시간에 출석 번호가 불릴까 봐 긴장하는 열등생의 마음을 이해할 정도였다. 윤이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는 사이, 정작 정언은 지지 않고 재희에게 대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