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30
230화.
자리에 앉은 대진이 재킷을 벗자, 영균이 서둘러 그것을 받아 들어 옷걸이에 걸었다. 대진이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보였다.
“금요일 저녁에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요즘 워낙 정신이 없어서, 오늘밖에 시간이 안 될 것 같아서요.”
재희는 대진을 빤히 마주 보다 그 말을 받았다.
“굉장히 바쁘실 텐데 굳이 직접 만나고 싶다고 하셔서 좀 놀랐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꼭 한 번 뵈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이유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재희는 여기서 대진과 시간 낭비를 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건 정언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로 시간을 길게 끌 이유는 없었다.
대진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낯선 표정이 스쳤다. 당황했다고 해야 할지, 혹은 경계한다고 해야 할지 정확히 말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눈을 의심할 정도의 찰나였다. 곧 다시 본래의 가면으로 돌아간 대진이 웃으며 물었다.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할까요?”
“그러시죠.”
재희가 고개를 까딱였다. 그때 문이 열리며 종업원들이 음식을 하나하나 늘어놓기 시작했다. 정갈한 차림이었으나 누구도 수저를 들 생각은 하지 않았다.
대진은 다른 사람들이야 어떻든 상관없다는 듯, 먼저 숟가락을 집어 앞에 놓인 죽을 먹었다. 조그만 그릇 안에 담긴 죽은 서너 숟갈 뜨기 무섭게 바닥을 보였다.
냅킨으로 입가를 닦은 대진이 천천히 세 사람의 눈을 번갈아 보았다. 정언은 일순간 마주친 그의 눈에 퍼뜩 서늘한 감각을 느꼈다. 대진의 눈꼬리가 약간 내려갔다.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한 대진이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저희 안 보좌관하고 오랫동안 같이 일해 왔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여의도 바닥이라는 게 참 쉽지가 않습니다. 믿을 만한 사람 하나 찾기도 힘들고, 내 마음 나처럼 알아주는 사람 찾기도 힘들고요. 안 보좌관이 저 정치 신인 시절부터 물심양면 보상 하나 안 바라고 곁에 있어 준 사람입니다. 제가 안 보좌관 같은 사람이 참 드물다, 그래서 좋은 짝 될 만한 사람도 소개해 줬습니다.”
영균은 곁에 선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밥을 먹는 자리인데도 겸상 같은 건 애초에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다는 듯, 영균의 태도는 자연스러웠다. 자신에 대해 말하는데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그의 얼굴에 정언은 불현듯 시선을 붙들렸다. 대진 역시 영균이 어떻든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다행히 서로 좋은 사람 알아보고 부부가 돼서 지금까지 큰 소리 한 번 안 내고 잘 살아 왔습니다. 안 보좌관 와이프도 굉장히, 정말 세상에 그런 여자 또 없죠. 천사라고 해도 믿을 겁니다. 여기 두 분이 직접 만나 보셨다니까 아시겠지만 아주 여성스럽고, 내조도 잘 하고, 그저 사회에 봉사하는 그 생각으로만 가득한 사람입니다.”
정언은 윤이 탁자 위에 놓였던 손을 말아 쥐는 것을 보았다. 카페에 마주 앉았던 정보현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를 아는 모든 사람이 천사라는 말로 그녀를 수식했다.
세상에 그런 여자 또 없죠, 하는 대진의 말을 입 안으로 곱씹어 본 정언은 숨을 들이쉬었다. 자신의 앞에 앉은 대진과 보현의 모습이 겹쳐진 까닭이었다.
아주 잘 만들어진 가면, 누구도 깰 수 없을 것 같은 그 견고함. 그 사이에도 가면 속의 추악함을 드러내는 틈이 있을까. 잠시 생각에 빠졌던 정언은 대진의 목소리에 퍼뜩 현실로 돌아왔다.
“안 보좌관 무슨 욕심이 있고,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안 보좌관이 굉장히 당황해서 저한테 얘기를 하더군요. 피디님들께서 안 보좌관 와이프를 만나러 왔었다고요. 듣기로는 무슨 기획 프로그램을 찍는다고 하셨다는데, 안 보좌관이 명함에 적힌 이름 알아봤더니 피디님이시더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혹시 자기 와이프가 무슨 잘못을 했는가 싶어 아주 놀란 거죠.”
대진의 시선이 정언에게 머물렀다. 정언은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사람을 응시하는 그 눈은 입매와 달리 웃고 있지 않았다. 정언은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대진에게 물었다.
“저희가 꼭 잘못한 일이 있어야 찾아간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런 질문을 받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대진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짧게 웃던 대진이 젓가락을 들어 앞에 놓인 탕평채를 먹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태연하게 음식이 입으로 들어간다는 건 존경스러울 지경이었다. 제법 맛이 있는지 몇 번을 연신 집어 입으로 가져가던 대진이 젓가락을 멈췄다.
“그렇다는 얘기는 아닙니다만, 그게 아니라면 굳이 찾아오실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대진이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몸을 조금 앞으로 내밀었다.
“그래서 제가 알아보니까 명함 주신 서정언 피디님이 예전에 저희 당하고 또 인연이 있으시더라고요. 홍현남 전 의원님 일도 있었고, 그 전에도 몇 번. 그렇죠?”
정언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진도 굳이 정언의 답변을 기다린 것은 아닌 듯했다.
“아무래도 무슨 오해가 있으신가 보다 싶어서, 그렇다면 차라리 직접 만나 해명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겁니다.”
“저희가 만난 건 안 보좌관님 아내 되시는 분인데, 왜 의원님이 그 일에 대해 해명하려고 하십니까?”
정언이 되묻자 대진이 쿡쿡거리는 소리를 냈다.
“안 보좌관 와이프 왜 만나셨겠습니까? 제 뒤를 캐다가 뭐가 의심스러우니까 그러셨겠죠.”
이렇게 정공법으로 치고 들어올 줄은 몰랐기에 순간적으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강심장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나,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다. 대진이 그 순간적인 동요를 알아차린 듯 정언을 빤히 보며 재차 다그쳤다.
“그렇죠?”
정언은 침묵했다. 그 정적이 긍정이라는 걸 대진 역시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대진이 뭐 좋습니다, 하고 어깨를 으쓱하더니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저도 YBS에 아는 분들이 몇 있습니다. 대단한 건 아니고, 뭐 국회의원 일 하다 보니까 조금.”
겸손이 지나치시네요, 하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다. 정언은 그 말을 참기 위해 탁자 아래로 허벅지를 꽉 눌렀다. 회사 전체를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은 사람이, 말 한마디로 언제든 모든 프로그램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니었다.
그건 설령 농담이라 하더라도 지나치게 질이 나빴다. 정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대진이 입매를 조금 더 말아 올렸다.
“그쪽에서 몇 달 전부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에서 엄 의원 뒤 캐는 것 같다, 조심해라, 그 소리 몇 번 들었습니다. 저야 뭐 저만 깨끗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하고 그냥 넘겼는데 요즘 들어 좀 심상치 않은 소리가 자꾸 들려서요.”
“그래서 저희 보자고 하신 겁니까?”
“그렇죠.”
“의원님 본인만 깨끗하면 된다고 방금 말씀하신 것 같은데요.”
견뎌 보려 했으나 속이 뒤틀렸다. 누군가가 사포로 문질러 대는 듯한 느낌이었다. 정언의 말투에 날이 섰다는 걸 대진이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었다. 탁자 아래로 재희가 정언의 무릎 위를 살짝 두드렸다. 참으라는 뜻이었다.
대진이 턱을 만지작거리다 입을 열었다.
“언론, 방송, 이게 참 재밌어요. 그렇죠? 똑같은 일 가지고도 사람들한테 이미지 주는 거 쉽지 않습니까. 서온건설 게이트 얘기 한 번 해 볼까요?”
대진의 입에서 나온 서온건설이라는 단어에 나란히 앉은 세 사람 모두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이쪽에서 언제 물어야 할까 타이밍을 재고 있던 참에, 자기 입으로 먼저 말을 꺼낼 거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대진의 태도에는 여유가 넘쳤다.
“저 그때 무혐의 받았습니다. 저희 당 의원님들도 다 무혐의 받았죠. 언론에서 전부 정치 공작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딱 한 군데서만 무혐의가 무죄라는 뜻이 아니다, 이렇게 때렸죠. 에서. 그러니까 아직도 젊은 사람들은 제 기사 뜨면 뇌물 받아먹은 놈이다, 증거 숨긴 놈이다, 이렇게 인식을 합니다. 대한민국 검찰을 말 한마디로 아주 물 먹인 거죠.”
재희의 눈빛이 그 말에 날카로워졌다.
“한선당하고 의원님, 대한민국 검찰은 정직한데 언론이 장난을 친다는 말씀이십니까?”
대진이 아주 재미있는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럼 제가 실제로 범죄를 저질렀는데 검찰이 저를 봐줬다고 생각하세요? 왜 그래야 할까요? 저 아직 대통령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국회의원이에요.”
그냥 국회의원이라. 헛웃음이 나왔다. 정언은 표정을 숨기기 위해 가벼운 헛기침을 했다. 대진은 정언의 태도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국회의원이 무슨 무소불위의 권력자라고 생각하십니까? 요즘 같은 세상에요? 그렇지 않죠. YBS에 계신 분들이 저희하고는 정치 성향이 좀 다르시니까, 아무래도 저에 대해 시선이 곱지 않으신 건 이해합니다.”
재희가 가벼운 한숨을 뱉고는 미간을 문질렀다.
“프레이밍으로 재미 많이 보신 분은 다르네요.”
툭 내뱉은 말에 정언은 즉시 재희에게 시선을 돌렸다. 방금 전에 자기에게 참으라고 해 놓고, 재희 역시 제어가 안 되는 상황이라는 걸 알아차린 탓이었다. 재희가 미묘하게 입가를 비틀었다.
“종북, 간첩, 공산주의자 낙인, 이런 게 통하는 시대가 백 년이고 이백 년이고 지속되진 않을 겁니다. 물론 의원님 입장에서는 그렇게 먼 미래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으시겠죠. 그런 시대 한 삼사십 년만 유지돼도 전두환처럼 천수 누릴 만큼 누리고 사실 테니까요.”
누가 들어도 비꼬는 말이라는 건 명백했기에 대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걷혔다.
“강재희 피디님.”
그의 가면이 얼핏 흔들렸다고 느낀 건 착각이었을까. 재희의 말이 빨라졌다.
“정치 성향 빌미 삼아 저희가 의원님한테 무조건 부정적인 프레임 씌운다고 말씀하지 마십시오. 저는 입사할 때부터 맞는 건 맞다고 하고 아닌 건 아니라고 하라고 배웠습니다. 후배들한테도 그렇게 가르쳤고요. 저희는 살인하고 강간하고 도둑질하는 사람 가지고 너는 보수니까 유죄, 너는 진보니까 무죄, 이렇게 내보내지 않습니다.”
“제가 살인범, 강간범, 절도범 수준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무서운 농담을 하시네요.”
물론 대진의 말이 농담이 아님은 양쪽 모두 뻔히 알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적의 속을 긁어 대는 건 재희의 특기 아닌 특기였다. 재희는 대진을 응시했다.
“그간 YBS 논조에 서운하셨을 수는 있겠지만, 그게 저희 정치 성향과는 아무 관련도 없다는 점은 분명히 말씀드리죠. 회사 내부에서도 한선당 지지하는 분들 많이 계십니다. 그분들도 충분히 정치적인 사안에서 자기 목소리 내실 수 있고요. 지금은 더 그렇죠. 잘 아시지 않습니까?”
몇 초 정도의 정적이 이어졌다. 대진이 그 침묵을 깨고 되물었다.
“그렇습니까?”
의중을 쉽게 짐작할 수 없는 말투였다. 정언은 대진의 얼굴을 뚫어지게 마주 보았다. 다시 본래의 웃는 표정으로 돌아간 얼굴에는 묘한 냉기가 감돌았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그 가면을 벗겨 내팽개치고 싶은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