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31
231화.
정언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신다고 하셨는데, 굉장히 돌아서 가시려는 것 같은데요.”
대진이 뭐라고 말하려는 듯 피디님, 하고 운을 떼었으나 정언은 그 말을 잘랐다.
“저희 방송 왜 막으려고 하시는 겁니까?”
“서 피디님.”
짙은 눈썹을 약간 움직인 대진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조명 탓인지 그 검은 눈동자가 한순간 번뜩였다. 어딘지 모르게 파충류를 떠올리게 하는 눈이었다. 대진은 쿡쿡 웃는 소리를 내더니 되물었다.
“제가 방송을 막는다고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정언은 입을 다문 채 대진을 보았다. 서로 눈 한 번 깜빡이지 않는 짧은 대치가 이어졌다. 대진이 과장된 동작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제가 방송 막는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대진은 곁에 서 있던 영균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영균이 몸을 숙이며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술병을 들어 대진의 잔을 채웠다.
대진은 정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조그만 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선명한 과일 향 끝에 남은 싸한 알코올 냄새가 공기 중으로 희미하게 흩어졌다. 대진이 잔을 내려놓았다.
“이게 참, 요즘 공영방송 직원분들이 이런 피해의식이 있으셔서 제가 좀 힘듭니다. 무조건 제 탓이다, 그렇게 말씀을 하시니까.”
난처하다는 투로 내뱉는 그 얼굴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정언의 성격에 오기가 발동한 건 당연했다.
“방통위 인원 교체하고 YBS 바언진 이사진 싹 보수 인사로 갈아 치운 건 누구 뜻입니까?”
“보수든 진보든 옳은 건 옳고 그른 건 그르다는 게 피디님들 입장 아닙니까?”
조금 전 재희의 말을 그대로 되돌려 준 대진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면 이사진들 정치 성향이 보수인 게 큰 문제라고는 생각이 안 되는데요.”
“그 자체가 문제라는 게 아니라 결과물이 문제라는 겁니다.”
“글쎄요, 편향적으로 방송 내보내던 분들이 균형 맞추라고 하니까 반발 있을 수 있다는 건 이해합니다만.”
“의원님께서 균형에 대해 말씀하실 자격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머릿속에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았다. 그 말을 뱉은 즉시 곁에서 재희가 정언을 제지했다.
“서 피디.”
지나치게 나갔다고 생각한 듯했다. 마음 같아서는 더한 말도 할 수 있었으나, 정언은 마지못해 대진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대진이 하하, 하고 소리를 내어 웃었다.
“아닙니다. 서 피디님 얘기 많이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언뜻 조소하는 것처럼도 들리는 말투였다. 그러나 대진은 곧 수완 좋게 칭찬으로 넘어갔다.
“이런 분도 필요하죠. 정치인이다, 기업가다 하는 사람들 앞에서도 눈 똑바로 뜨고 할 말 다 하는 사람들 멋있잖아요. 제가 균형에 대해 얘기할 자격 없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방통위나 이사진 교체에 제가 직접적으로 관여한 부분은 없습니다. 저를 무작정 악의 축으로 몰아가실 게 아니라, 그런 증거가 있다면 제시하시면 되죠.”
증거는 있지, 하고 속으로 생각한 정언은 대진을 빤히 보았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조창식이 남긴 동영상에 대해서는 새까맣게 모르고 있는 듯했다.
“증거가 없다는 건 나는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다, 이런 말씀이시죠?”
대진이 왜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듯 되물었다.
“한 적 없는 일에 증거가 있을 리 있습니까?”
“알겠습니다.”
대진이 증거가 있다는 사실을 아직 알지 못하는 이상, 이 문제로 더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었다. 그 자만심이 반드시 엄대진의 발목을 잡을 게 분명했다. 정언은 화제를 돌렸다.
“의원님 귀한 시간 뺏은 김에 질문 몇 가지만 받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서면으로 보내려다 먼저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실례인 줄 알지만 직접 답변을 듣고 싶어서요.”
“그러시죠.”
대진이 선뜻 고개를 주억거렸다. 정언은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리스 소재 SO 컴퍼니라는 회사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대진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단호하게 부정했다.
“아뇨.”
“전혀 모르시겠다고요?”
“네.”
자신이 아무것도 몰랐다면 의심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확고한 태도였다. 옆에 앉은 윤이 도저히 표정 관리가 안 되는지 찬물을 들이켰다. 정언은 정말 처음 듣는 소리라는 얼굴을 하는 대진에게 말을 덧붙였다.
“서온건설 남제선 회장 부인의 조카 채기원 씨가 대표로 있는 회사입니다. 대체에너지 개발 사업을 하는 회사고요, 연간 매출액은 한화로 10억 정도. 작은 회사죠. 실제 매출액인지도 확인이 안 됩니다. 저희는 사실상 페이퍼컴퍼니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잘나가는 인터넷 쇼핑몰 매출도 못 따라잡는 이 회사에 한국에서 상당한 금액이 투자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투자하는 회사들 대부분이 실체가 없어요. 페이퍼컴퍼니에 페이퍼컴퍼니가 투자를 한다는 겁니다. 상장도 안 된 소규모 외국 소재 회사에 한선당 의원님들 몇 분이 지방 예산 이용해 투자를 했다는 말도 있던데요.”
정언은 말하는 내내 대진을 주시했다. 미묘하게 동요하는 듯한 느낌은 있었으나, 확실하게 그가 흔들린다고 생각하기는 힘들었다. 하기야 지금까지 대진이 해 온 방식을 생각한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만일 이쪽에서 SO 컴퍼니에 돈을 넣은 한선당 의원 명단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대진의 입장에서는 가차 없이 꼬리를 잘라 내면 그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대진이 눈을 크게 뜨며 정언에게 물었다.
“저는 오늘 처음 듣는 회사고,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도 전혀 몰랐습니다. 그 회사에 투자했다는 의원들 명단 알 수 있겠습니까?”
“당 내부에 알아보시죠. 저희가 들은 얘기보다는 그게 더 정확하지 않을까요?”
대진의 말을 자른 정언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어쨌든 의원님께서는 이 회사에 대해 일절 모르신다는 거죠?”
“네.”
“알겠습니다. 그러면 경일용역이라는 회사는 혹시 알고 계십니까?”
“경일용역이요?”
대진이 잠시 생각하는 듯 턱을 만지작거렸다. 기억을 되짚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한동안 고개를 갸웃하던 대진이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뇨, 모르겠습니다.”
“손경일이라는 사람도 모르시고요?”
“처음 듣는데요.”
지금 당장이라도 핸드폰 속의 영상을 켜서 들이밀고 그 얼굴이 어떻게 변하는지 보고 싶을 정도였다.
“서온건설이 남정건설이던 시절에 포항 조폭 출신이었던 손경일이라는 사람이 남제선 회장을 도와 경영권 승계에 방해가 되는 간부들을 제거했고, 경일용역이라는 용역 회사를 차려 몇 십 년 동안 서온건설 뒤치다꺼리를 해 왔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도 전혀 들은 바가 없으시다는 거죠?”
정언의 말에 대진이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뱉었다.
“제가 그런 지방 깡패 이름까지 알아야 하는 겁니까?”
“조창식이라는 사람도 당연히 모르시겠네요.”
“그런 이름은 전혀 기억이 없습니다.”
배신을 막는 가장 쉬운 방법은 살인이었다. 죽은 사람이 관에서 걸어 나와 법정에 서지 않는 이상 그보다 더 안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 터였다. 조창식 역시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기에, 우선 무조건 잡아떼기로 마음을 먹은 모양이었다. 대진의 태도를 보니 손경일 역시 얼마 못 가 살해된 채 발견될 확률이 높다는 생각이 스쳤다.
“다음 질문을 드리죠. 서온건설 이훈주 과장, 윤대석 부장, 고정민 과장, 박규형 과장에 대해 아십니까?”
“모르겠습니다.”
그 대답은 즉각 돌아왔다. 순간 머리로 열이 올랐다.
“한 사람도요.”
“네.”
“윤대석 부장은 서온건설 게이트 당시 검찰 측 증인으로 소환됐던 분입니다. 그런데도 기억이 없으시다는 거죠?”
대진이 그 말에 멈칫했다. 찰나였으나 정언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대진이 입가를 만졌다. 곁에 무표정하게 서 있던 영균의 시선이 잠깐 대진에게 향했다. 대진이 조금 전보다는 약간 누그러진 어투로 말했다.
“법정에 나오지 않았을 텐데요.”
이쪽을 떠보는 듯한 태도였다. 곁에서 윤이 다시 물 한 잔을 따라 마셨다. 컵을 잡은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억지로 화를 참고 있는 모양이었다. 정언은 대진에게 물었다.
“방금 전에 한 사람도 모르겠다고 말씀하셨는데 법정 출석 여부는 어떻게 아셨습니까?”
“나왔다면 제가 기억할 테니까요.”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모른다, 알겠습니다.”
그때 윤이 들고 있던 컵을 내려놓았다. 드물게도 굳은 표정이었다. 흰 얼굴은 거의 창백해 보일 정도로 핏기 없이 질려 있었다.
“박규형 씨에 대해서 정말 전혀 모르시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죠.”
윤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정언은 윤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다는 걸 직감했다. 대진은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대꾸했다.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서온건설 같은 대기업 사원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제가 어떻게 다 알겠습니까. 그 회사 간부들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데요. 제가 알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그럴 이유는 없죠.”
그 목소리는 조금 잠겨 있었다. 정언은 저도 모르게 윤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윤이 대진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진송신도시에 대해서는 잘 아시죠? 의원님께서 신도시 사업에 무척 힘쓰셨다고 들었는데요.”
“그런데요.”
진송신도시 이야기가 나오자 대진이 방어적인 태도로 말을 받았다. 본인 지역구였으니 지금까지처럼 무조건 잡아뗄 수는 없는 탓이었다. 윤은 대진의 태도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박규형 씨는 진송신도시 현장에서 일하던 현장 과장이었습니다. 현장에서 어느 날 갑자기 추락사한 시체로 발견됐죠. 유서도 없었고, 주변 사람들은 절대 박규형 씨가 자살할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현장 사람들에게 평판이 아주 좋았고, 현장에서 보상 문제로 데모하는 원주민들을 도와주기도 했던 분이었습니다. 동료들 말로는 접대를 잘 못해서 승진이 안 됐다고 했습니다.”
최대한 침착하려 애를 쓰는 건 분명했으나, 그 말끝의 떨림까지 감춰지지는 않았다. 윤이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수아와 리아를 가까이서 본 윤이 규형의 이야기를 하면서 냉정을 지킬 수 없는 건 당연했다. 윤은 무릎 위에 놓인 손을 꽉 움켜쥐었다.
“박규형 씨한테는 딸이 둘 있습니다. 여섯 살, 네 살짜리 아이들입니다. 부인 되시는 분은 초등학교 방과 후 교사로 일하고 계시죠. 아주 단란한 가정이었습니다. 박규형 씨가 의문사를 당하기 전까지는요.”
무표정하게 윤을 주시하던 대진이 코끝으로 웃는 듯한 소리를 냈다.
“지금 그 얘기를 왜 저한테 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