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32
232화.
“제가 왜 그런다고 생각하세요?”
“사연은 안됐지만 저하고는 관련 없는 일입니다. 이미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씀드렸고요.”
“그렇습니까? 대통령이 되시려는 분이면 그 정도 공감 능력은 있으실 줄 알았는데요. 의원님이 모르는 국민이라면 공감 받을 자격도, 구제받을 자격도 없습니까?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이라도 이런 상황이라면 위로하는 말이 먼저 나와야 하지 않나요?”
윤의 단정한 입매가 얼핏 비틀렸다. 대진이 그 말에 눈썹을 좁혔다. 대통령으로서의 자격이 있느냐는 공격이었다. 방금 본인 입으로 규형의 일은 자기와는 관련 없다고 선을 그었기에, 이제 와서 뱉은 말을 돌리는 건 불가능할 터였다.
윤은 자신을 뚫어지게 보는 대진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세상엔 다른 사람의 삶을 아주 쉽게 망가뜨릴 수 있는 사람들도 있고, 그런 일에 아무 죄책감도 못 느끼는 사람들도 있죠.”
순간 대진의 얼굴에 처음으로 불쾌한 기색이 엷게 드러났다.
“의원님.”
윤이 부르자 대진이 대답하는 대신 앞에 놓인 빈 잔을 들었다. 영균이 곁에서 기계처럼 몸을 숙여 다시 잔을 채웠다. 대진이 천천히 잔을 비우는 사이, 윤이 감정을 최대한 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삶을 자기 물건처럼 다뤄도 되는 겁니까?”
짧은 정적이 지났다. 대진이 들고 있던 잔을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글쎄요. 굉장히 철학적이시네요. 질문 또 있으십니까?”
이 이야기를 더 이상 끌고 가기 싫다는 노골적인 심경이 그대로 드러나는 행동이었다. 정언은 대진이 이 자리를 만든 걸 분명 후회하게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그쪽도 마찬가지라는 확신이 들었다. 잡느냐, 잡히느냐. 둘 중 하나였다.
정언은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어게인라이프라는 단체에 대해 아십니까?”
“글쎄요.”
인정할 거라는 생각 따위는 애초부터 없었다. 이제 대진의 대답은 중요하지 않았다.
“노숙자 자활을 지원하는 자선 단체입니다.”
“좋은 일 하시네요. 저도 최근 그쪽에 관심이 좀 생겨서…….”
대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 자원 마련 운운하는 공약 이야기인 듯했다. 지킬 생각도 없는 공약에 대해 늘어놓는 소리를 들어 줄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정언은 바로 대진의 말을 끊었다.
“서온건설 게이트 때 처벌받았던 최창묵 전 의원님께서 발기인으로 참여하셨던 단체입니다.”
최창묵의 이름을 언급하자 대진이 의아한 표정을 했다.
“입당 전 일 아닙니까?”
“그건 어떻게 아셨죠?”
“입당 후라면 제가 알았을 텐데요.”
“최창묵 전 의원님하고는 상당히 긴밀하셨다고 들었는데 그 얘기가 맞나 보네요.”
정언이 넌지시 떠본 말에 대진이 펄쩍 뛰었다.
“긴밀하다고요? 제가?”
최창묵은 서온건설 게이트에서 걸려 나간 유일한 의원이었기에, 대진이 순순히 관계를 인정할 리 만무했다. 대진은 정색을 하며 손을 저었다.
“어디서 무슨 말씀을 듣고 오셨는지 모르겠네요. 당시에 저희 인재 영입 TF에서 모셔 온 분이긴 하지만, 저하고 개인적인 관련이 있고, 그런 분은 아니었습니다.”
“따로 만남을 갖거나 하신 적은 없었다는 거죠?”
정언이 다시 확인하듯 묻자 대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적인 자리 외에는 부부 동반 모임도 한 번 같이한 적이 없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때 일은 참, 이제 막 정치 입문하신 분이 안됐죠. 나쁜 물이 들었어요.”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투였다. 화가 치밀었으나, 그건 방향이 조금 다른 분노였다. 윤 때문이었다. 윤은 이번 주 들어 벌써 사흘을 최창묵의 오피스텔로 출근하고 있었다. 핸드폰 보조배터리를 두 개씩 가지고 다니며 최창묵에게 한 번만 만나 달라고 애원하는 게 일과였다.
최창묵이 고작 이런 인간 때문에 입을 다물고 있다고 생각하자 안 그래도 없던 정조차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엄대진에게 신의를 지켜봐야 돌아오는 건 결국 이런 식의 부정이었다. 지키려는 건 신의보다는 목숨이겠지 생각했으나, 그렇다 한들 화가 가라앉는 건 아니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정언이 내뱉자, 곁에서 그때까지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재희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아, 변 회장님 이야기 들었습니다. 걱정이 많으시겠습니다. 어서 완쾌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대진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물론 재희가 인사치레나 하려고 그 말을 꺼낸 건 아니었다.
“그런데 만약에 회장님께서 못 일어나시게 되면 는 장녀이신 변은화 씨가 운영하게 되시는 겁니까?”
재희는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하여튼 작정하면 사람 속 긁는 거 잘해, 하고 속으로 생각한 정언은 재희를 지켜보았다. 대진이 잠깐 대답할 말을 고르는 듯 사이를 두자, 선수를 친 재희가 어깨를 으쓱했다.
“별 뜻이 있어서 여쭤보는 건 아닙니다. 지분은 변은화 씨가 가지고 있다고 하셔서요.”
“장인어른께서 미디어그룹은 처형이 운영하는 게 좋겠다고 여러 차례 말씀하셨죠.”
“그런데 변은화 씨도 건강이 상당히 좋지 않으신 걸로 아는데요. 실질적인 운영은 남편이신 김인택 씨가 하실 확률이 높겠군요.”
“글쎄요, 형님께서 경영에는 그다지 소질이 없는 분이라…….”
김인택의 이름이 나오기 무섭게 대진이 말끝을 흐렸다. 김인택이 정말 어지간히 싫기는 한 모양이었다. 대진은 걱정스럽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CEO 체제도 고려해야겠죠. 제가 이쪽에 있다 보니 함부로 얘기할 문제가 되지 못해서,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어려운 얘기 꺼내서 죄송합니다. 그냥 생각이 나서요.”
갑자기 그런 소리가 튀어나왔을 리 없었다. 정언은 재희를 잘 알고 있었다. 여기 오기 전부터 그 소리를 꼭 할 마음이었을 게 뻔했다. 대진이 짐짓 짧은 한숨을 쉬었다.
“오늘 보니 아예 절 공격할 마음을 먹고 오셨군요. 이거 좀 서운합니다. 저는 피디님들 정말 좋게 생각했고, 그래서 큰맘 먹고 어려운 부탁 하려고 모신 건데요.”
어려운 부탁. 정언은 그 말을 머릿속으로 곱씹어 보았다. 속셈이 있으니 불렀으리라고는 생각했으나, 무슨 소리를 하려고 서두를 그렇게 거창하게 까는지 궁금해졌다.
대진이 손짓으로 영균을 불러 뭐라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고개를 숙인 영균이 방을 나가며 문을 닫았다. 영균이 없는 자리에서 해야 하는 이야기가 뭘까 막 생각하던 참에, 대진이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죠. 피디님들한테 YBS 상황 더 좋아지지는 않을 겁니다.”
대진은 담담했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순간, 정언은 머리 위에서부터 누군가가 얼음물을 쏟아부은 듯한 기분이 되었다. 회사 하나를 완전히 망가뜨리고 그곳의 모든 사람을 자신의 노예로 만들려는 인간이 어째서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잠시 현실감이 사라졌다. 재희와 윤 역시 자신과 그다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지는 않을 게 뻔했다. 세 사람에게 번갈아 눈을 준 대진이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제가 개입하고,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 건 먼저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다만 진보적인…… 아, 정치 성향으로 말씀하시는 걸 안 좋아하시는 것 같으니까. 언론 균형 맞추는 과정에서 지금까지 목소리 내셨던 것처럼 하기는 아무래도 어렵다고 봐야겠죠.”
“저희 걱정까지 해 주실 줄은 몰랐는데요.”
재희가 내뱉었다. 얼굴에는 아직 웃음기가 머물러 있었으나 말투는 냉랭했다.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정도껏이지, 이 꼴을 만들어 놓은 주동자가 이제 와서 동정한다는 건 당연히 기분 더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대진은 그런 눈치를 채지 못한 건지, 알고도 모른 척하는 건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능력 있는 분들이 작은 물에 갇히는 건 안타까운 일 아닙니까.”
정언은 그 말에 이 끝으로 입술 안쪽을 눌러 물었다. 는 이미 자신의 세계였다. 그 세계가 고작 대진에게는 작은 물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자 속이 쥐어 짜이는 기분이었다.
“제가 제안 하나 하겠습니다.”
대진의 말이 귓바퀴 바깥에서 떠도는 소리처럼 지나쳤다.
“저희 캠프 들어오시죠.”
그러나 다음 순간 갑자기 단어들이 명료해졌다.
캠프라면 엄대진의 대선 캠프를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방금 한 말이 자신들을 영입하겠다는 소리인가 싶어 청력이 의심될 지경이었다.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정언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재희에게 시선을 주었다. 재희 역시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당혹스러운 얼굴이었다. 대진이 이쪽을 빤히 보더니 씩 웃었다.
“굉장히 놀라시네요.”
재희가 잠시 침묵하다 대답했다.
“뜻밖이긴 한데요.”
뜻밖이라는 건 지금 심경에 비해서는 대단히 절제된 표현이었다. 성질대로라면 지금 무슨 개수작이냐고 테이블을 엎어도 시원찮을 판이었다. 대진이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겠죠. 그런데 특히 강재희 피디님은 제가 오래 전부터 눈여겨봤던 인재라서요. 이 자리에서 이런 말씀 드리는 걸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희 당에 꼭 필요한 분이다, 제가 오래 전부터 당에 이렇게 어필을 해 왔습니다. 보수 이미지 쇄신하기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할 인재라고 여러 차례 얘기를 했죠. TF 쪽에도 영입 시도해 보라고 했고요.”
한선당에서 재희를 영입하려 했다는 건 코미디 프로그램보다 더한 상황이었다. 너무 어이가 없으니 웃음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민권당에서 영입하려 한다 해도 거절할 판에 한선당이라니, 강재희를 아는 누가 들어도 기가 막힐 소리였다. 재희도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며 되물었다.
“제가 한선당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요?”
“보수 싫어하시는 이유가 부패하고 타락했다고 생각하시니까 그런 거 아닙니까. 직접 들어와서 당 한 번 바꿔 보시라는 겁니다.”
천하의 강재희라도 정언이 아는 한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다. 답지 않게 뭐라고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는 재희에게 대진이 말했다.
“세 분 저희 캠프 미디어전략팀으로 모시고, 대선 후에 청와대 홍보실 들어가시는 조건이면 어떻겠습니까? 강 피디님은 청와대 타이틀 달고 한 2, 3년 일하시다 정계 들어가시면 좋을 것 같은데요. 나이도 그렇고, 경력도 딱 좋지 않습니까? 비례 자리 가시겠다면 우선순위 드리고, 원하시는 지역구 있다면 그쪽으로 공천 넣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