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33
233화.
“제 인생 계획을 미리 세우신 겁니까?”
겨우 정신이 돌아왔는지, 간신히 평정심을 되찾은 재희의 물음에 대진이 소리를 내어 웃었다.
“실례였습니까? 워낙 탐나는 인재라 오래 전부터 제가 찍어서 키워 보고 싶었습니다.”
재희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 대진이 다시 정언과 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서 피디님이나 김 피디님 같은 경우에는 홍보실 일 좀 하시다 대변인 올라오시면 어떨까 싶은데요. 두 분도 정계 생각 있으시다면 아쉽지 않게 해 드리겠습니다.”
물론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다. 재희 역시 마찬가지일 터였다. 수많은 회유 시도에는 이미 익숙해져 있었지만, 코앞에서 정계 진출시켜 주겠다고 수작을 거는 건 처음이었다.
살다 보니 별꼴을 다 보네, 하고 속으로 중얼거린 정언은 입을 다물었다. 세 사람이 망설인다고 생각한 건지, 대진이 숫제 설득하는 투로 말을 이었다.
“당에서 인재 영입 TF 가동하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결정권자들이 옛날 사람이다 보니 신선한 인재들 받아들이는 데 거부감이 상당해요. 좋은 인재들도 저희 당이라면 혹시 젊은 사람들에게 이미지 나빠질까 걱정하는 부분이 크고요. 제가 세 분 피디님 모시면서 포문 열면 새 피 수혈하기 어렵지 않을 겁니다. 보수 개혁하는 거 피디님들 지향점하고 일치하지 않습니까?”
세 사람 중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침묵에 대진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혀를 찼다.
“상황도 그렇고, 고민하실 문제 아닙니다. 페이 문제라면 YBS 연봉 테이블 대충 알고 있습니다. 강 피디님 정도라면 인센티브 포함해서 아쉽지 않게 맞춰 드리죠. 청와대 홍보실 들어가시면 공무원이라 페이는 조금 줄어들겠지만 경력 쌓는 동안만 참는다 생각하십시오. 서 피디님하고 김 피디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건 저희한테 고려 대상 아닙니다.”
더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재희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그러면 뭐가 문제입니까? 어차피 더 유지하기 힘드실 텐데요.”
그러나 받아친 대진의 말은 불난 집에 휘발유 뿌리는 격이었다. 일부러 조롱하려는 의도가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으나, 아무 의식 없이 에서 이 이상 버티지 못할 거라고 단정하는 거라면 더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잠깐 숨을 고른 재희가 대답했다.
“제안은 감사하지만 당장 대답할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피디가 세상 바꾸기 쉽겠습니까, 정치인이 세상 바꾸기 쉽겠습니까? 피디님 같은 분들이 괜히 낮은 데서 애쓰시는 거 보면 마음이 참 그래요. 능력 있으면 높은 자리에서 쓰는 게 현명한 겁니다.”
수많은 물방울 하나하나가 모여 물을 넘치게 하는 순간. 정언은 문득 윤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세상을 바꾸는 건 한 사람의 피디도, 한 사람의 정치인도 아니었다. 스스로의 힘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은 늘 재희가 가장 경계하는 것이었다. 대진이 그것을 알 리 없었다.
“생각해 보고 연락 주십시오.”
“청와대 입성은 기정사실로 생각하고 계시는군요.”
재희의 말에 대진이 하하, 하고 크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얘기가 그렇게 되나요? 선거라는 게 투표함 까 보기 전에는 모른다고는 합니다만, 민심이 움직이는 건 누가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민심이 의원님에게 움직인다고 보십니까?”
“아직은 아니라고 생각할 이유도 없는 것 같은데요.”
그 자신만만함이 거슬렸다. 엄대진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러나 이 공간에서의 모든 대화는 자신들 외의 누구도 증명할 수 없었다.
여론조사에서도 민주영 의원에게 바짝 추격당하고 있었고, 어떤 악재가 더 겹쳐질지 예측할 수 없는 판이었다. 대진이 그렇게까지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는 이유가 뭘까 생각하자 어쩐지 불길한 느낌이 엄습했다.
잠시 대진을 응시하던 재희가 물었다.
“만약 저희가 이 제안 거절한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사실 거절할 만한 제안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래도 거절하신다면…….”
대진이 말을 끊었다. 그 얼굴에서 순간적으로 웃음기가 걷혔다.
“제가 굉장히 아쉽겠죠.”
여상한 단어들이었으나, 조금 전까지와 확연한 온도차가 느껴졌다. 적을 내 편으로 만들 수 없다면, 엄대진은 어떤 방식을 취하려 할까. 지금까지 그 뒤를 추적해 온 바로는 단 하나의 방법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갑자기 에어컨을 틀어 놓은 것처럼 싸늘한 감각이 등줄기로 스며들었다. 침묵하던 재희가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하실 말씀 없다면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언과 윤도 재희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대진이 바깥에 대고 안 보좌관, 하고 부르자 앞에서 계속 대기하고 있던 영균이 바로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온 영균은 한쪽에 놓아두었던 핸드폰을 가져와 세 사람에게 건넸다. 핸드폰을 받아 든 정언이 막 방을 나가려던 찰나, 앉아 있던 대진이 갑자기 정언을 불렀다.
“서정언 피디님.”
“네?”
정언은 뒤를 돌아보았다. 대진의 검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 건 그때였다. 잠깐 정언에게 물끄러미 눈을 주던 대진이 입을 열었다.
“바를 정에 말씀 언 자 쓰십니까?”
순간 심장이 덜컥 움직였다. 까닭 없이 본능적으로 경계심에 날이 섰다. 별것 아닌 질문인데, 왜 이런 감각을 느끼는지 스스로에게 설명할 수가 없었다.
“네, 그런데요.”
“누가 지어 주신 겁니까?”
정언이라는 이름은 아버지가 직접 지은 것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임신한 걸 알자마자 아들이든 딸이든 어울리는 이름이라며, 바를 정에 말씀 언 자를 쓰는 정언이라는 이름을 정해 놓았다고 했다.
어머니는 누가 기자 아니랄까 봐 그러냐며 질색했고, 정언이 방송국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이름을 잘못 지었다며 투덜거렸다.
「정언이 이름은 아빠가 지었지. 거짓말하고 남 속이는 사람 되지 말라고. 우리 딸은 아무리 무섭고 힘들어도 바른말 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는데.」
언젠가 취한 아버지는 어린 정언을 무릎에 앉히고 몇 번이나 그 말을 되풀이했다. 오랫동안 묻어 두고 잊었던 장면이었다. 퍼뜩 되살아난 기억 속의 젊은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며 웃고 있었다.
그러나 안경 너머의 눈은 어쩐지 슬퍼 보였다고 정언은 문득 생각했다. 그건 시간이 윤색한 장면일까. 확신할 수 없었다.
정언은 대답 대신 대진을 마주 보았다. 그런 질문을 한 의도를 가늠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종류의 두려움이 불현듯 깊숙이 스며들었다. 공기가 당겨졌다. 만지기만 해도 베일 것 같은 그 감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무의식중에 입 안이 말랐다. 그 긴장을 깬 건 대진 쪽이었다.
“이름이 아주 좋아서 여쭤봤습니다.”
의중 따위 없다는 듯 웃은 대진이 고개를 까딱였다.
“다음에 또 뵙죠.”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언은 그의 시선을 비껴 피하며 말했다. 그러나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직감했는지, 윤이 서둘러 정언의 어깨를 감싸듯 끌며 그 자리를 떴다.
윤에게 떠밀리다시피 해서 건물을 나온 정언은 입구의 돌계단을 내려오고 나서야 막혔던 숨을 토했다. 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선배, 괜찮으세요? 얼굴 안 좋아 보이시는데…….”
“아무것도 아냐.”
서둘러 손을 저은 정언은 잠깐 숨을 고르며 윤의 차 보닛에 기대섰다. 마음속에 있던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선거 캠프 좋아하네, 개새끼.”
돌계단 위에 환하게 불을 밝힌 건물 쪽을 한 번 올려다 본 재희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여튼 대단해. 어떻게 거기서 자기 캠프 영입할 생각을 하지?”
정언은 엉망이 된 기분을 감추기 위해 부러 재희에게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엄대진이 인정한 인재 강재희라고 광고라도 내야 되는 거 아니에요?”
정언의 말을 듣기 무섭게 재희가 펄쩍 뛰며 정색을 했다.
“그런 소리 하지도 마. 누가 들을까 봐 무서워 죽겠으니까. 지금까지 뼈 빠지게 일했더니 왜 엉뚱한 놈이 인정하고 난리야, 난리가. 사장님이 인정하시면 연봉이나 오르지. 이 소리 들으려고 정장 꺼내 입었나 싶어서 나 지금 회의감 장난 아냐.”
재희는 신경질적으로 넥타이를 잡아당겨 풀며 목까지 채워 놓은 셔츠 단추를 두어 개 끌렀다. 정언은 코끝으로 웃는 소리를 냈다.
“사람들 이거 들으면 배를 잡고 넘어갈 거 같은데.”
“아, 제발 비밀로 해 줘. 진짜 부탁이야.”
재희가 두 손을 모아 비는 시늉을 했다. 팀원들에게 얘기했다가는 두고두고 놀림감이 될 게 뻔한 탓이었다. 특히나 현진과 민혜가 당장 사무실에 ‘경축! 강재희 정계 입성’이라고 쓰인 현수막을 걸고 재희를 볼 때마다 정치 언제 시작할 거냐고 놀리는 광경은 안 보고도 이미 본 것처럼 눈에 선했다.
그러나 잠깐의 농담으로도 기분은 그리 나아지지 않았다. 정언은 입가를 매만지며 얼굴을 찌푸렸다.
“아니, 솔직히 난 진짜 우리가 올 거라고 생각하고 영입 얘기 던진 건가 싶어서 그게 더 기분 더러워요. 우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이 새끼들은?”
재희가 열없이 웃고는 대답했다.
“반반 아니겠어? 밑져야 본전.”
“하긴, 천승욱 때 생각해 보면…….”
정언은 말끝을 흐렸다. 는 절대 타협 없기로 유명한 프로그램이었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방송국에 직접 찾아와서까지 뇌물을 건네려 하던 천승욱의 태도를 떠올리자 한숨이 나왔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고, 안 넘어간다면 도끼를 바꿔 보겠다는 건가.
정언은 자신들이 만약 지금보다 조금만 덜 강경한 부류였다면 언제든 넘어갈 수도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위에서 제작비를 끊어 숨통을 말리는 사이 뒤로는 회당 삼천만 원의 제작비와 한도 없는 카드를 내밀고, 아무 힘없는 평피디라 방법 없이 당하게 만들어 놓고 억울하면 권력 한 번 쥐어 보라고 유혹하는 이들에 대항한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재희가 눈썹 부근을 긁적였다.
“돈으로 안 됐으니까 권력으로 낚아 보자 했을 수도 있지.”
“그럼 다음은 미인계라도 쓸 건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내뱉자 윤이 곁에서 멈칫하며 되물었다.
“미인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