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34
234화.
정언은 눈을 동그랗게 뜬 윤을 흘끔 보고는 팔짱을 끼었다.
“5공 시절에 그걸로 기자들 길들였잖아. 그 시절에 돈하고 여자 맛본 젊은 놈들이 지금 윗대가리에 앉아 권력까지 쥐니까 지금 언론 이 꼴 난 거지. 그런 놈들이 후배들한테 뭘 가르쳐. 자기가 하던 짓 똑같이 시키는 것밖에 더 해?”
재희가 그 말을 거들었다.
“지금 편성국장 하는 심석건도 정치부 기자 시절에 접대 무지하게 받은 걸로 유명했어. 접대 받으면 앉아서 밥만 먹었겠어? 백선경 국장님 현역 때 진짜 장난 아니었다고. 여자라 접대 안 받는다고 못 잡아먹어 안달인 놈들이 별별 소문 다 내고 다녀서. 그런 거 보면 시보국에 여자들 더 많아야 된다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쉬는 재희에게 정언은 짐짓 의심스럽다는 표정을 했다.
“혹시 넘어가는 거 아니죠?”
재희가 무슨 그런 소리를 하느냐는 듯 대번에 얼굴을 구기며 손가락을 하나 흔들어 보였다.
“내 인생에 더 이상의 여자 사양이야. 지금도 너무 많아서 번호표 뽑는데.”
“선배는 다 좋은데 1절만 할 줄 모르는 게 탈이야.”
혀를 차는 정언을 본 재희가 자기 턱을 만지작거리며 진지하게 물었다.
“그것도 매력 아니냐?”
“젓가락도 안 들고 뭐 잘못 먹었어요?”
“야, 나 선배야.”
정언이 가차 없이 되물은 말에 재희는 눈을 부릅뜨며 항의했다. 물론 정언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턱 끝으로 차에나 타라는 제스처를 취하자, 하여튼 선배 알기를 아주, 하고 투덜거리던 재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런데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네.”
“뭐가요?”
“우리 여기까지 부른 것치고 너무 사근사근하지 않아? 거절하면 무슨 짓 하려고 저러지?”
― 제가 굉장히 아쉽겠죠.
그렇게 대답하던 대진의 목소리가 순간 환각처럼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정언은 돌계단 위로 다시 시선을 주었다. 화려하게 쏟아지는 먼 불빛들이 깜빡이는 눈꺼풀 안에서 점멸했다. 빛, 어둠, 빛, 다시 어둠. 문득 조금 전 공기가 당겨지던 그 감각이 선연해, 정언은 애써 농담처럼 대꾸했다.
“죽기밖에 더 하겠어요.”
재희가 막 뭐라고 말하려던 순간, 재희의 손에 들린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바로 액정을 확인한 재희가 전화를 받았다.
“네. 아냐, 아무 일 없었어요. 괜찮아. 신경 안 써도 돼요.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밥 먹자고 불러 놓고 진짜 목이라도 땄을까 봐 그래요? 아, 알았어. 알았다고. 셋 다 잘 살아서 나왔으니까 걱정 말아요. 지금 사무실 다시 들어갈 거니까, 들어가서 얘기해요.”
현진인 모양이었다. 재희가 전화를 받으며 운전석 문을 열더니 세워 둔 윤의 차를 가리켰다. 타라는 뜻이었다. 정언은 서둘러 조수석 문을 열었다.
운전석에 앉은 윤은 주차장을 먼저 빠져나가는 재희의 차 뒤를 따랐다. 윤의 옆모습은 평소와는 달리 표정이 없었다. 뭔가 불안한 듯한 느낌이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정언은 윤에게 물었다.
“김 피디, 괜찮아?”
윤이 시선을 앞에 둔 채 사이를 두었다가 대답했다.
“아까는 죄송했어요. 끼어들 생각 아니었는데 너무 화가 나서…….”
규형의 이야기를 꺼냈던 것 때문인 듯했다. 퍼뜩 내내 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엄대진 앞에서는 무서운 것 하나 없는 사람처럼 굴어 놓고, 정작 이렇게 마음 약하게 구는 그 모습에 픽 웃는 소리가 샜다.
“됐어, 잘했어.”
정언이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하자 입술 끝을 잘근거리던 윤이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지 긴 한숨을 뱉었다. 빨간 신호에 걸려 차를 세운 윤이 신호등에 시선을 둔 채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자기는 절대 모른다고 말할 수가 있죠?”
“그 정도로 뻔뻔하니까 저러고 사는 거 아니겠어?”
“아무리 뻔뻔해도 그렇지, 그 많은 사람 죽여 놓고 죄책감 같은 거 하나도 없는 거예요?”
“죄책감 느낄 사람이라면 언제든 그만뒀어. 그런 게 없으니까 여기까지 온 거지.”
윤이 미간을 좁혔다. 속 시원한 답은 아닌 모양이었다. 하기야 정언이라고 그런 종류의 인간들을 이해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무슨 생각인가에 잠시 빠져 있던 윤은 다시 바뀐 신호에 액셀을 밟으며 입을 열었다.
“마지막에 나오기 전에 선배 이름 왜 얘기한 거예요? 혹시 뭐 짐작 가는 거 있으세요?”
정언은 순간 멈칫했다. 대진이 자신의 이름에 대해 물었을 때, 자신 역시 불안감을 느낀 탓이었다. 물론 정말 그냥 우연한 호기심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만약 의도가 있는 질문이었다면…… 그렇다 한들 정언으로서는 그 의도가 전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글쎄. 그냥 이름이 좀 특이하다고 생각해서 그랬을 수도 있지.”
“그래도요.”
“뭐가 그래도야.”
그렇지 않아도 예민한 윤이었다. 굳이 그 불안감에 대해 얘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애써 아무것도 아니라는 양 그 말을 넘긴 정언은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아, 최창묵 안 될 것 같으면 그냥 포기해. 그 정도로 매달릴 필요 없어.”
윤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금만 더 해보고요. 사흘째 해 보니까 오기 생기던데요.”
“오기 안 부려도 돼.”
“주말까지만요.”
윤이 그렇게 고집을 부릴 때는 말려도 안 듣는다는 걸 이미 경험상 충분히 알고 있었다. 윤에게 시선을 주었던 정언은 창가에 턱을 괴며 그럼 그러든지, 하고 대답했다.
차가 곧 한강 다리 위로 접어들었다. 윤이 운전석의 창을 조금 내렸다. 한 뼘쯤 열린 창 너머로 어둠이 내린 대교 위의 바람이 비집고 들어와 윤의 차 안을 한 바퀴 휘돌았다. 옅은 물 냄새가 어린 바람에 머리칼이 흩어졌다.
정언은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창 너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새까만 수면 위로 반사되는 야경의 불빛이 수없이 점멸했다. 빛, 어둠, 빛, 다시 어둠…… 돌계단 위의 휘황한 조명들이 되살아나 정언은 눈을 감았다.
그 방 안에서 당겨지던 공기의 감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감은 눈 안으로 파충류 같은 대진의 검은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 검은 눈동자는 곧 오래된 기억 속 아버지의 눈으로 바뀌었다. 안경 너머로 어쩐지 슬픈 듯 자신을 내려다보던 그 눈. 이해할 수 없이 뒤엉키는 생각들을 정리하려 노력하며, 정언은 창으로 불어드는 바람에 잠시 의식을 맡겼다.
42.
보안 따위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한 오래된 오피스텔의 비상구 계단은 며칠 사이 익숙해진 장소였다. 계단참 통로에 낸 세로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던 저녁 햇살도 어느새 사라지고, 푸르스름한 어둠이 비상구 안을 채웠다.
윤은 긴 팔을 한 번 휘적였다. 센서 등이 켜지며 어둡고 서늘한 비상구가 밝아졌다. 곁에 둔 비닐봉지를 뒤적이자, 새벽같이 근처 편의점에서 사 온 빵 봉지가 손에 집혔다. 아침나절 마신 우유 한 팩 이후 처음 하는 식사였다.
빵 봉지를 뜯으며 생수병을 딴 윤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내내 침묵 중인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아침부터 최창묵에게 기다리고 있다, 5분이라도 좋으니 잠깐만 얘기하게 해 달라는 문자를 이미 너덧 번은 보낸 뒤였다.
물론 지금까지 답은 전혀 없었다. 한숨을 뱉은 윤은 의무감에 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거의 하루 종일 굶었는데도 허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퍽퍽한 카스텔라가 물기 없이 씹히며, 입 안에서 엷은 계란 맛과 설탕의 단맛이 뒤섞였다.
윤은 빵을 먹으며 옆에 놓아 둔 백팩을 뒤져 보조 배터리를 핸드폰에 연결했다. 남의 집 앞 계단에 앉아 하릴없이 핸드폰으로 포털 사이트 메인에 걸린 뉴스를 보며 토요일 하루를 거의 다 보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 아직 거기야?
그때 메시지 창이 반짝이며 핸드폰이 진동했다. 정언이었다. 먹던 빵을 황급히 내려놓은 윤은 메시지를 확인했다. 네, 하고 답을 보내자 곧 수신 확인이 됐는지 메시지 옆의 숫자가 지워졌다. 윤은 다음 메시지를 기다렸으나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뭘까 생각하며 남은 빵을 꾸역꾸역 입 안으로 밀어 넣은 윤은 부스러기를 털어 냈다. 계단 오르내리기 운동이라도 할까 막 생각하던 참이었다.
열려 있는 비상구 문 밖으로 멀리서 엘리베이터가 멈추는 소리가 났다. 발소리가 복도를 지나 가까워졌다. 이 라인에 사는 사람인가 무심코 생각하던 윤은 곧 열린 비상구 안으로 머리를 들이민 사람을 보고는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김 피디님!”
형원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얼굴에 당황한 윤은 황급히 바닥의 비닐봉지를 백팩 안으로 구겨 넣었다.
“여긴 어떻게…….”
급하게 달려왔는지 형원의 얼굴은 조금 상기된 채였다. 형원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고는 윤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혀를 끌끌 찼다.
“아이고, 젊은 분이 주말에 이게 뭡니까.”
남의 집 앞에서 스토커처럼 죽치고 있는 꼴을 들킨 게 어쩐지 민망해져 얼굴이 화끈거렸다. 형원이 윤에게 손짓을 했다.
“나가서 얘기하시죠.”
“저, 여기서 기다리면서 얘기하면 안 될까요?”
그 말에 더 당황한 윤이 쩔쩔매며 묻자 형원이 다 안다는 표정으로 윤을 잡아끌었다.
“최 주필 나오기만 기다리는 거 아닙니까. 이 사람 안 나와요. 일단 나가서 얘기합시다. 멀쩡한 분이 청승맞게…… 누가 보면 여자한테 차인 줄 알겠어요.”
성화를 부린 형원은 윤을 끌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오피스텔 앞의 작은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은 형원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시키고는 연신 손부채질을 하더니 씩 웃었다.
“서 피디님한테 얘기 들었습니다. 며칠째 여기로 출근 중이시라면서요?”
뜻밖의 말에 멈칫한 윤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선배하고 연락하셨어요?”
“네, 아까 먼저 전화하셨더라고요.”
계속 그만해도 된다고 하더니 아무래도 걱정이 됐던 모양이었다. 남 일에 그다지 관심 없는 정언이 직접 형원에게 전화를 했다고 생각하자, 그렇지 않아도 빨개진 얼굴이 더 뜨거워졌다. 공연히 귓가만 만지작거리는 윤을 본 형원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이, 이거 제가 정말 죄송합니다. 최 주필 계속 설득하고는 있는데 아무래도 자기가 딱 확신이 안 서는 것 같아요. 원래 신중한 사람입니다. 정계 들어갈 때도 생각 많이 하고 들어갔었는데, 자기 판단 틀린 게 처음이라 그 뒤로 자기 자신도 불신하게 된 거죠.”
윤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설득 불가능할까요? 지금 아무것도 얘기 안 하시려는 이유 엄대진이 대통령 된다고 확신하셔서 그런 거 아닙니까? 하고 저희, 쪽에서 보도 터지면 엄대진 확실히 끌어내릴 수 있는 상황인데 왜…….”
윤의 말을 듣고 있던 형원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윤을 빤히 바라보았다.
“피디님, 그런 확신 가지고 하셨어요?”
“네?”
움찔한 윤이 되묻자 형원이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뒀다.
“확신 가지면 위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