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35
235화.
형원이 주변을 슬쩍 살폈다. 작은 카페 안에는 손님이 거의 없었다. 스툴에 걸터앉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아르바이트생에게 잠깐 시선을 주었던 형원은 목소리를 낮췄다.
“엄대진 어떻게든 살아남는 인간이에요. 서온 게이트 취재할 때 그거 파던 기자들 전부 지금 김 피디님처럼 생각했습니다. 사회부 전한동 부장님, 그분도 굉장히 준비 많이 하신 걸로 아는데 결국 어떻게 됐습니까?”
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한동이 서온건설 게이트와 관련해 취재한 내용을 결국 거의 보도조차 못 했다는 건 이미 들어서 잘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형원이 눈썹을 약간 좁혔다.
“이번 보도, 아마 언론에서 엄대진에 대해 다룰 수 있는 거의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셔야 돼요. 필살의 일격? 그런 거 아닙니다. 최후의 발악이다, 그렇게 봐야죠. 운이 좋으면 발목 잡아 넘어뜨리는 거고, 운이 나쁘면…… 뭐 굳이 얘기 안 해도 아시겠지만.”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형원이 하려는 말이 뭔지는 뻔했다.
잠깐 침묵하던 윤이 되물었다.
“그래서 더 이상 최창묵 주필님 컨택하려는 시도 하지 말라는 말씀이세요?”
형원이 그 말에 얼른 손을 내저었다.
“그런 건 아니에요. 저도 계속 연락은 하고 있습니다. 들어 보니까 방송 다음 주에 내보내신다던데, 그러면 방송 전까지는 일단 시간 있는 거잖아요. 그렇죠? 저희는 방영 다음 날 조간으로 기사 내보낼 거니까. 저희도 최 주필 증언 있으면 좋죠. 그러니까 제가 최대한 협조하겠다는 겁니다.”
형원이 적극적으로 나서 준다면 자기 혼자서 앞에서 기약 없이 무작정 기다리는 것보다는 훨씬 낫기는 할 터였다. 윤이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아예 뚜껑을 열고 얼음 한 조각을 입에 넣은 형원이 얼음을 씹다가 생각났다는 듯 윤을 마주 보았다.
“혹시 그날 그러고 난 뒤로 정보현 직접 만나 보셨습니까?”
“네.”
“어떠셨어요?”
윤은 형원에게 정보현을 만난 날의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심각한 표정으로 윤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있던 형원이 흠,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래요. 확실히 서 피디님이 여자분이라 그런 걸 더 민감하게 캐치하셨을 수도 있겠네요. 제가 만났을 때는 솔직히 그런 쪽으로는 전혀 생각을 못 했습니다. 보좌관 와이프가 갑질하는 케이스는 꽤 있긴 한데, 정보현 같은 사람은 드물거든요. 아니지, 없다고 해야겠네요. 일단 저는 기자 일 하는 동안 그런 사람 본 적이 없었습니다.”
형원이 가방에서 자기 수첩을 꺼내 뭐라고 메모하며 말을 이었다.
“가끔 뭐 의원 부인들이 정계 생각 갖는 경우가 있긴 있어요. 실제로 당선된 사례도 좀 있고요. 그런데 보좌관 부인이 그런 그림 그린다, 그런 건 솔직히 전혀 생각을 안 했거든요. 저희가 만났을 때는 굉장히, 자기는 사회봉사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 안 한다, 남편도 엄대진 모시는 것밖에 모른다 이런 식으로 얘기를 했으니까요.”
“아직 차기 대선 생각하기엔 먼 시점이라 그랬던 거 아닐까요?”
“지금 생각하면 그래서였을 수도 있겠네요. 정치라는 게 진짜 알 수가 없잖아요. 확실히 된다, 유력 후보다 이러던 사람도 하루아침에 작살나고 아무도 생각 안 하던 사람이 갑자기 태풍 몰아치면서 당선되고 그러니까. 엄대진한테 무슨 일 생길까 봐 말 아꼈나 싶기도 하고…….”
형원이 펜 끝으로 이마를 긁적이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 윤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영균이나, 더 가서 아예 정보현 본인이 정계 진출할 가능성이 얼마나 된다고 보세요?”
눈썹을 약간 찌푸린 형원이 대답했다.
“본인들 의지만 있다면 그건 문제 안 될 겁니다. 안영균이 진짜 정계 진출 노린다면 한 4, 5년 안에 충분히 가능하죠. 엄대진이 청와대 입성만 하면 그건 완전 고속도로 탄 겁니다. 아니면 아예 안영균이 십상시(十常侍)
포지션 잡고 엄대진 컨트롤하는 것도 생각할 수 있고.”
“안영균이요?”
확신할 수 없다는 투로 들렸는지, 형원이 수첩을 넘겨 빈 페이지를 펼쳤다.
“경우의 수를 좀 계산해 볼까요? 보도 터지고 생각보다 파장이 커진다, 그러면 엄대진이 결국 이 모든 일 뒤집어씌울 사람은 안영균입니다. 서온건설 남제선 회장이나 채기원 같은 애들은 지금 보도하는 부분 다 커버 칠 수가 없어요. 결국 안영균이 알아서 한 짓으로 결론이 나야 된다는 거죠. 안영균도 어느 정도는 그거 각오하고 있을 겁니다.”
형원이 수첩 위에 빠르게 안영균, 남제선, 채기원, 엄대진 같은 이름들을 적어 나가며 말했다. 형원은 안영균의 이름 위로 원을 그렸다. 윤은 원 안의 이름을 응시하며 물었다.
“엄대진이 검찰 활용해서 빼 줄 수 있으니까요?”
“그렇죠, 그런 것도 있죠. 그런데 일이 그렇게 잘 풀리면 다행인데, 지금까지 해 온 엄대진 패턴으로 보면 안영균 그냥 아예 버릴 가능성도 없진 않거든요.”
윤은 눈을 들었다. 확실히 형원의 말 대로였다. 뻔뻔하게 모른다는 말로 일관하던 엄대진을 떠올리자 다시 속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자신의 죄를 부정하기 위해서는 그런 일에 얼마나 익숙해져야 하는 것일까.
윤은 손끝으로 마른 입술 위를 문질렀다.
“만약에 전부 안영균이 한 걸로 뒤집어씌우고 유죄 판결 나 버리면 안영균은 거의 사회 복귀 자체가 불가능할 텐데요.”
“그렇죠. 그리고 엄대진이 그걸 더 원할 수도 있단 말입니다. 자기 치부 다 아는 게 안영균이니까. 비밀은 원래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은 거잖아요. 엄대진 여태까지 그런 식으로 자기 죄 안 드러나게 숨겨 왔어요. 포섭되는 놈은 자기 밑에 두고 부리고, 안 되는 놈은 죽이고.”
「저희 캠프 들어오시죠.」
그 목소리가 떠오른 건 다음 순간이었다. 정말 그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말을 한 건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없었다.
자신은 몰라도 재희나 정언에게 그런 제안은 절대 먹힐 리 없다는 걸 엄대진이 진짜 몰랐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형원이 쯧, 하고 혀 차는 소리를 냈다.
“포섭한 놈도 쓸모없어지면 버리고, 배신할 것 같으면 없앴죠. 엄대진 정계 입성한 뒤로 주변에서 사고든 자살이든 죽어 나간 사람 지금 계산도 안 돼요.”
“그럼 안영균도 그런 부분 대비하지 않을까요?”
윤의 물음에 형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안영균도 자기 살길은 남겨 뒀을 겁니다. 만에 하나 안영균이 그런 생각 못 하고 엄대진 신뢰한다 쳐도 안영균이 버림받으면 정보현이 그거 이용할 수도 있겠다 싶네요. 안영균이 버림받고 폭로전 간다, 그러면 본인이 엄대진 비리에 깊숙이 관여된 건 사실이니 정계 입성 안 되죠. 대신 정보현이 엄대진하고 자기 남편 보내 버리고 자기가 직접 정계 들어가는 방향도 생각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교회 규모나 평판도 그렇고, 본인 집안에서 백업한다면 뭐.”
형원이 재미있다는 투로 말했다. 잠시 생각하던 윤은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정보현 말로 자기 아버지가 작은 하청업체 하나 했었다고 하던데 맞습니까?”
“본인이 그래요?”
소리를 내어 웃은 형원이 작은 하청업체라,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대답했다.
“아버지가 천안 사람인데, 당시에 충청도 지역 하청 싹 도맡아서 하던 업체입니다. 작은 하청이라고 하면 진짜 작은 하청들 서러운 소린데. 대대로 지역 유지예요. 정보현이 마음만 먹으면 비례 자리가 아니라 지역구 공천 받는 것도 가능할 겁니다. 서 피디님 말대로 정보현이 정말 야심 있다면 드라마 원할 수도 있죠. 폭군과 배신당한 신하의 부인, 미디어에서 얼마나 물고 뜯고 하면서 좋아하겠어요.”
정보현이 철저히 남편과 거리를 두며 이미지 관리를 해 온 건 그런 상황을 대비해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건 그때였다.
“엄대진이 보도 터지고 안영균 버린다면 저희한테 유리할 수도 있겠네요.”
“차라리 안영균한테 의리 안 지킨다면 그게 낫죠. 안영균도 사람인데, 남들 줄줄이 나가떨어지는 엄대진 수발 십수 년을 넘게 들면서 바라는 게 왜 없겠습니까.”
씩 웃은 형원이 목소리를 조금 더 낮췄다.
“한 번 터지면 내부 고발자 줄줄이 나올 겁니다. 지금은 무서워서 못 움직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최 주필도 마찬가지고요.”
배가 침몰하기 전 가장 먼저 위험을 감지하는 건 쥐들이라고 했던가. 지금도 제보가 줄을 잇는 판이라는데, 아직도 엄대진이 두려워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면 숨겨진 일들은 얼마나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퍼뜩 스쳤다. 머릿속이 서늘해졌다. 수첩을 넘겨보던 형원이 손을 멈췄다.
“참, 엄대진이 채기원도 언제든지 제거할 수 있다고 한 영상 있다고 얘기하셨잖아요. 그 부분만이라도 편집해서 보내 주실 수 있습니까? 저희 기자들이 채기원 측근한테 그 얘기 전달했더니 채기원 쪽에서 좀 관심이 생긴 모양이에요.”
“아, 네. 그럼요. 알겠습니다.”
윤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형원이 웃고는 남은 커피를 단숨에 마셨다. 얼음이 반인 컵은 순식간에 바닥을 보였다. 형원이 다 마신 컵을 내려놓았다.
“아무튼 최 주필하고는 내가 더 얘기해 볼 테니까 김 피디님은 그만 들어가세요. 서 피디님 말 들어 보니까 주말까지만 버텨 보겠다고 그랬다면서요? 최 주필 버틴다고 마음 돌릴 사람 아닙니다. 한 이삼 일만 더 주시면, 다음 주 중으로 어떻게든 설득해 볼 테니까 그때 오세요.”
“그래도…….”
윤이 말끝을 흐리자 형원이 별 고집을 다 보겠다는 투로 손을 휘적거렸다.
“아이고, 내가 최 주필이랑 일한 게 얼만데요. 내가 최 주필 잘 알겠습니까, 김 피디님이 잘 알겠습니까? 그래도 김 피디님 연락은 받아 준다면서요. 그러면 아마 될 겁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웃는 소리를 낸 형원이 말을 덧붙였다.
“안 그래도 아까 서 피디님하고 통화하는데, 김 피디님이 말 안 들을 거라고 자기가 데리러 올 테니까 그 전까지 설득 좀 해 달라고 하시던데요.”
“선배가요?”
윤이 되묻기 무섭게 탁자 위에 놓여 있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정언이었다. 형원이 턱 끝으로 핸드폰을 가리켰다.
“받아 보세요.”
어디서 보고 있었나 싶을 정도로 귀신같은 타이밍이라, 윤은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네, 선배.”
『아직도 설득 안 됐어?』
정언답게 서론 따위 없이 바로 본론이 돌아왔다. 윤이 머뭇거리자 정언은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만하고 나와. 구성안 초안 잡아 놓은 거 체크해야 돼.』
“아, 네.”
주말에 구성안 작업 들어간다고 했는데 이 시간에 나온 걸 보면 민혜도 하루 종일 달린 모양이었다. 구성안도 안 보고 버틴다고 할 수는 없었기에 순순히 대답하자, 핸드폰 너머에서 피곤한 듯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거의 다 왔으니까 앞에 나와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