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36
236화.
“진짜 오신 거예요?”
데리러 온다는 소리는 농담일 거라고 반쯤 생각하고 있었기에, 기겁을 한 윤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다 왔다고 했잖아. 전화 끊는다.』
정언이 짧게 대답하기 무섭게 전화가 끊어졌다. 정언이 거의 다 왔다는 걸 보니 정말 코앞인 모양이었다.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윤은 형원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부탁했다.
“기자님, 저 지금 가 봐야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꼭 좀 부탁드릴게요. 만약에 안 되면 저 방송 직전까지 또 와 있으려고요.”
형원이 짐짓 질색하는 표정으로 윤을 떠밀었다.
“큰일 날 소리 하시네. 연락할게요.”
감사합니다, 하고 다시 한 번 인사를 건넨 윤은 서둘러 한 모금도 안 마신 커피를 들고 카페를 나섰다.
대로변에 서서 두리번거리고 있으려니 도로 저편에서 익숙한 검은색 SUV의 모습이 보였다. 윤이 손을 흔들자 정언이 그 앞에 차를 세웠다. 윤이 서둘러 조수석에 타기 무섭게 정언이 윤을 흘끗 보고는 툭 내뱉었다.
“얼굴 완전 반쪽이네. 뭐 제대로 먹긴 했어?”
“네, 뭐 그냥…….”
“뭐가 그냥이야? 하루 종일 빵이나 한 조각 먹고 말았겠지.”
어물거리던 윤은 마치 자신을 지켜본 것 같은 정언의 말에 움찔했다. 눈치를 보며 무의식중에 손에 들고 있던 커피를 마시자, 정언이 앞을 보며 말했다.
“빈속에 커피만 들이부으면 속 버려.”
무심한 말투였으나, 윤은 그게 정언 나름의 다정함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입가로 웃음이 번졌다.
“저 걱정하시는 거예요?”
“나도 사람인데 그럼 걱정 안 할 줄 알았어?”
정언이 눈을 돌리지 않고 대꾸했다. 윤이 정언을 빤히 보자, 시선을 느꼈는지 정언이 미간을 좁혔다.
“뭘 그렇게 봐.”
“좋아서요.”
생각할 필요도 없이 즉각 나온 대답에 정언이 짧은 한숨을 쉬었다.
“아직 덜 굶었지?”
물론 굶을 만큼 굶었기에 윤은 입을 다물었다. 방송국 주차장에 도착한 정언은 엘리베이터에 타는 대신 비상구 계단으로 향했다. 윤이 어디 가세요, 하며 서둘러 뒤를 쫓아가자 정언이 지하 1층의 구내식당으로 올라가 식권 두 장을 뽑았다.
“일단 밥 먹고 올라가자.”
“저 밥 안 먹었다고 걱정돼서 그러세요?”
“나도 안 먹었어.”
바로 돌아온 철벽에도 그러거나 말거나 생글거리자, 정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감 시간이 가까워진 구내식당은 한산했다. 샐러드와 미역국, 갈비찜 따위의 메뉴들을 식판에 담은 정언은 입구 근처의 자리에 앉았다. 윤은 자기 식판을 내려놓고는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송 작가님은요?”
수저를 든 정언이 대답했다.
“초안만 잡아 놓고 애 아프다고 급하게 갔어.”
“애가요? 얼마나 아픈데요?”
놀란 윤이 묻자 정언이 찡그린 이마를 손끝으로 문질렀다.
“열이 많이 난다는데, 애 안 괜찮아지면 일단 병원 입원이라도 시켜 놓고 밤새서라도 수정해 주겠대.”
잔말 말고 빨리 먹으라는 듯 정언이 고개를 까딱였다. 그러고 보니 정언의 얼굴에도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젯밤에 제대로 못 잔 모양이었다. 아마 밤샘을 하고 숙직실에 있었는지, 정언의 옷이 어제 입은 것과 같다는 걸 윤은 뒤늦게 깨달았다.
서둘러 오늘의 첫 식사를 마친 윤은 정언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무실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윤은 퍼뜩 생각난 물음을 던졌다.
“는 어떻게 됐대요?”
정언이 작게 하품을 하고는 기지개를 켰다.
“음, 아까 선배랑 얘기하는 거 들어 보니까 부장님이 일단 월요일 오전 회의에 올려 볼 예정이신 것 같더라고. 회의에서 부실공사 관련 TF라고 내용 공개하시겠다는데, 위에서 이미 서온건설 관련 건 전부 틀어막으려고 하는 중이라 먹힐지 모르겠어.”
“만약에 킬 당하면요?”
“데스킹 안 거치면 못 올린다고 할 테니까, 뉴스 시스템에 완전 다른 기사 올려놨다가 생방 들어가면 진짜 기사로 교체해서 가지고 들어가는 것도 생각하시는 것 같더라고.”
그런 경우는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다. 대본도 대본이거니와 당장 뉴스에 들어가는 영상이나 CG 처리를 생각하자 당사자도 아닌데 등줄기가 다 서늘해졌다.
눈을 크게 뜬 윤은 정언에게 되물었다.
“그게 가능해요?”
“불가능한 건 없지.”
정언이 그게 뭐 대수냐는 투로 대답했다. 물론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아무도 생각조차 안 하는 일일 뿐이었다.
“경위서 써야 될 것 같은데요.”
“경위서로 끝나면 다행이고.”
무서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정언이 열린 엘리베이터에 탔다. 올라간 사무실은 비어 있었다. 아마 다들 어제까지 죽어라 야근한 뒤 잠시 쉬러 돌아간 모양이었다.
정언은 잠겨 있던 회의실 문을 열며 불을 켰다. 탁자 위에 구성안 출력본이 아무렇게나 흩어진 것이 눈에 들어왔다. 자리에 앉은 정언은 출력본을 대충 모아 확인하고는 한 부를 윤 쪽으로 밀어 놓았다.
윤은 구성안 표지에 눈을 주었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정언을 보았다. 충혈된 눈가를 누르는 정언은 평소보다 더 지친 듯한 느낌이었다.
“아무 일 없으신 거죠?”
문득 불안해진 윤이 묻자 정언이 시선을 맞춰 왔다.
“왜?”
“그냥요.”
“요새 김 피디 신경과민이야.”
걱정한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농담처럼 넘긴 정언이 화제를 돌렸다.
“시사 프로 구성안 본 적 있어?”
“처음 들어왔을 때 공부하면서 읽었어요.”
윤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언이 구성안의 첫 페이지를 넘기며 말했다.
“오케이. 작가님이 급하게 쓰느라 디테일한 부분은 비워 놨으니까 흐름만 봐 달래. 읽어 보고 뭐 더 넣거나 빼야 할 것 같은 부분 얘기해. 잘 모르겠으면 물어보고.”
곁에 앉은 윤은 구성안을 서둘러 읽기 시작했다. 정언의 구성안은 이미 한 번 확인한 것인지 형광펜으로 군데군데 칠해 둔 부분과 메모 몇 개가 눈에 띄었다. 그러나 정언은 묵묵히 구성안을 넘기며 연신 뭐라고 적어 나갔다.
윤 역시 머릿속으로 방송 화면을 그려 보며 구성안을 읽었다. 때와는 전혀 다른 방식이라 낯설었으나, 그간 본 를 생각하자 어느 정도 감을 잡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한참 메모를 하던 윤은 거의 마지막 장에 민혜가 ‘최창묵 INT, 미정’이라고 적어 놓고 밑줄을 그어 둔 데서 손을 멈췄다.
“최창묵 인터뷰 부분은 공백인데 아예 비워 두신 거예요? 이러면 방영 시간이…….”
구성안에 눈을 두고 있던 정언이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대답했다.
“플러스마이너스 10분 정도는 유동적이야. 위에서는 광고 때문에 방영 시간 긴 거 더 좋아하기도 하고. 얘기 잘 돼서 쓸 만한 내용 있다면 넣을 자리 남겨 둔 거지.”
“나머지 흐름 자체는 별 무리 없는 것 같은데요. 디테일만 잘 채워 넣으면 될 것 같아요.”
“그 디테일 채우는 게 일이니까.”
정언의 말끝이 나른했다. 드물게도 긴장이 풀린 듯한 모습이라, 윤은 잠깐 그 창백한 얼굴을 흘끔 보았다.
“어제 못 주무셨어요?”
“잠깐 잤어.”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그건 거의 못 잤다는 소리였다.
“커피 좀 사다 드릴까요?”
“됐어.”
윤이 조심스럽게 묻자 정언은 바로 손을 내저었다. 그러나 윤은 정언이 뭐라고 하기 전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마시고 싶어서 그래요. 갔다 올게요.”
서둘러 회의실을 나선 윤은 로비로 내려와 카페에서 커피 두 잔을 샀다. 정언이 늘 마시는 트리플 샷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과 휘핑크림을 듬뿍 올린 모카초코를 사서 돌아온 윤은 회의실 문을 열다 말고 멈칫했다. 정언이 테이블 위에 엎드려 있었다.
그새 잠이 든 건가 싶어 소리를 내지 않고 문을 닫은 윤은 커피 두 잔을 살짝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한쪽 팔에 뺨을 댄 채 죽은 듯 눈을 감고 있는 정언의 얼굴은 어쩐지 낯설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희미한 숨이 새었다.
윤은 테이블 위로 엎드리며 가만히 그 잠든 얼굴을 응시했다. 조금 길어진 머리칼이 흘러내려 정언의 창백한 얼굴을 가렸다. 가장 무방비한 순간의 정언은 어쩐지 손을 대는 순간 깨질 수도 있을 것처럼 보였다. 혼자 있을 때는, 늘 이런 얼굴을 하고 있는 걸까.
한쪽 뺨을 팔에 더 깊숙이 파묻은 윤은 정언을 물끄러미 마주 보았다. 가느다란 속눈썹이 형광등의 빛에 옅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눈으로 그 그림자의 궤적을 가만히 덧그린 윤은 숨을 죽였다. 그 잠깐의 휴식을 방해하는 건 싫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정언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던 정언이 자신과 시선을 맞춘 채 이쪽을 마주 보는 윤을 알아차린 듯 멈칫했다. 윤은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정언의 머리칼을 뒤로 넘겨주었다.
뭐라고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던 정언이 눈꺼풀의 무게를 이기지 못했는지 다시 스르르 눈을 감았다. 힘이 없는 정언의 손끝이 머리칼을 만지는 윤의 손에 닿았다. 가는 손가락은 언제나처럼 차가웠다. 그 손을 가만히 감싼 윤은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달고 씁쓸한 초콜릿과 커피 향이 희미하게 텅 빈 회의실 안을 떠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