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37
237화.
43.
좁은 편집실은 두 사람만 앉아도 거의 수용 한계치였다. 에어컨이 내내 돌아가도 기기가 내뿜는 열기 탓에 빈말로라도 시원하다고는 할 수 없는 편집실 안의 공기가 답답했다.
그러나 뜬눈으로 밤을 샌 탓에 감각이 무뎌져서인지, 정언에게는 그 더위를 느끼는 것 자체가 사치였다. 애를 입원시켜 놓고도 병실에서 내내 노트북을 두드려 수정안을 보내 준 민혜 덕분에 정언은 윤과 어젯밤부터 편집실을 전세 내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지혁이 먼저 OK 컷만 남기는 1차 작업을 해서 넘겨주는 게 보통이었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턱을 괸 채 듀얼 모니터를 번갈아 보며 마우스를 쉴 새 없이 움직이던 정언은 곁에서 구성안을 확인하는 윤에게 말했다.
“여기, 58초부터 1분 14초까지 끊어서. 슈퍼
들어갈 거 확실히 체크해 놓고.”
네, 하고 대답하며 산뜻한 하늘색 린넨 셔츠의 소매를 걷어 올린 윤이 색색의 마커 테이프를 붙여 놓은 파일들을 뒤적였다. 흰 이마에는 엷게 땀이 배어 나온 채였다. 머리칼을 쓸어 올린 윤이 그새 얼음이 거의 다 녹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입을 열었다.
“선배, 그렇게 하면 여기 내레이션이 VCR 나가는 것보다 길지 않아요? 더빙 딸 때 좀 정리해서 3, 4초 정도 줄여야 할 것 같은데요. 그리고 뒤에 스케치 들어가는 걸로 돼 있는데, 여기서 스케치 딴 게 별로 없어서…….”
“거긴 체크해 놔. 스케치는 뒤쪽에서 잘라서 붙이지, 뭐. 프리뷰 확인해 봐. 끝에 스케치 있을 거야.”
정언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 그리고 내일 오후에 더빙실 스케줄 잡아 놨는지 우 피디한테 확인 좀 해 줘.”
“알겠습니다.”
핸드폰을 든 윤이 자리에서 막 일어나려던 참이었다.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문이 열렸다. 재희였다. 놀란 윤이 그 자리에 선 채 눈을 깜빡였다. 답지 않게 잔뜩 상기된 얼굴을 한 재희가 숨을 고르며 물었다.
“진행 얼마나 됐어?”
정언은 미간을 찌푸리며 재희를 돌아보았다. 아무리 급해도 이제 겨우 편집 들어간 걸 뻔히 알면서 이렇게 편집실까지 쳐들어와 재촉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구성안 수정하고 어젯밤부터 간신히 편집 들어갔는데 뭐가 얼마나 돼요? 촬영 분량이 얼만데 벌써 쳐들어오는 거 너무 인간미 없지 않나? 바빠 죽겠는데 왜…….”
안 그래도 피곤한 탓에 말끝이 날카로워졌다. 그러나 재희는 정언의 말을 끝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사장님하고 국장님 지금 검찰에 고발당했어.”
낮은 목소리 끝이 거칠었다. 윤과 정언은 거의 동시에 재희에게 되물었다.
“네?”
“지금 뭐라고 했어요?”
재희가 문가에 손을 짚으며 다시 잠깐 호흡을 골랐다. 윤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재희를 마주 보았다.
“유동욱 사장님하고 백선경 국장님 말씀하시는 거예요? 갑자기요?”
“이사진들이 고발 준비하고 있다고는 했어. 그런데 타이밍이 나빠.”
“뉴스 들어온 겁니까?”
윤의 물음에 재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언은 편집도 잠시 잊은 채 재희를 다그쳤다.
“어디서 한 거예요? 이사진들이 직접?”
재희가 그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한국언론지형 바로잡기라는 시민단체인데 알아보니까 한선당 쪽 단체야. 여기서 사장님하고 국장님 횡령하고 배임으로 걸었더라고. 자기들이 자료 있다고 제출했다는데 보나마나 이사진 쪽에서 준 거겠지.”
갑작스러운 두통이 밀려들었다. 밤샘과 과도한 집중 탓만은 아니었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 부근을 꾹 누른 정언은 눈썹을 좁혔다.
“지금 국장님 어디 계세요?”
“국장실에. 검찰 쪽에서 오늘 고발 들어올 거라고 미리 얘기는 들으셨대. 지금 사장님하고 변호인단 면담 중이야.”
“설마 뭐 유죄 만들려고 작업 치지는 않겠지?”
정언의 불안한 얼굴에 재희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사장님하고 국장님 어떤 분들인지 알잖아. 절대 유죄 안 나와. 걔들도 알 거라고. 그냥 사람 괴롭히려고 하는 거야. 안 그래도 저번 주 이사회에서 사장님 불러다 놓고 퇴진 요구했다는데, 사장님이 그렇게는 못 하겠다고 하셨대.”
“명분이 없으니까 명분을 만들겠다?”
정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재희는 가벼운 한숨을 뱉었다.
“그렇지. 바언진 이사들이 전부 퇴진 결정한대도 지금은 명분이 없어서 못 내보내. 부당 해임으로 두 분이 역고소 들어가면 이사진이 백 퍼센트 패소한다고. 그러니까 일단 검찰 고발 걸어 놓고, 법정 공방 들어가면 프레임 짜겠지. 죄가 있든 없든 계속 때리면 여론 넘어간다고 생각하니까. 의혹이라면서 실컷 물고 뜯다가 나중에 아니면 말고, 이래 버리면 그만이잖아. 지금 민 의원님한테 하는 것도 계속 그런 식이고.”
“아, 이 개새끼들 진짜…….”
이가 갈릴 정도로 분한 마음에 대뜸 욕이 먼저 튀어나왔다. 그런 자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고작 60분짜리 방송 한 편이라는 걸 새삼스럽게 자각하자 머릿속이 서늘해졌다.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 도사린 불안이 고개를 들었다. 이 모든 시간이 무의미해진다면…… 그러나 정언은 서둘러 그 불안감을 지워 버렸다. 어차피 다른 수가 없었다.
“아무튼 국장님이 면담 끝나고 전 부장님하고 오후에 잠깐 보자고 말씀하시더라고.”
재희가 화제를 돌렸다. 정언은 의식하지 못한 사이 얇게 땀이 배어 나온 이마를 손등으로 대충 문질러 닦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 오전 회의 진행한대요?”
재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11시에 회의하기로 했었는데 지금 국장님 검찰 고발 건 때문에 시보국 다 뒤집혔어. 점심 먹고 회의 들어간다고 부장님이 말씀하시더라. 일단 그렇게 알고 있어.”
“알았어요.”
재희가 정언의 어깨를 툭 치고는 수고해, 하며 다시 편집실 문을 닫았다. 정언은 닫힌 문에 난 작은 창 너머로 빠르게 사라지는 재희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잠깐 얼굴을 감쌌다.
“미치겠네, 정말.”
“그럼 어떻게 되는 거예요?”
지혁에게 전화를 걸려던 것조차 잊은 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언은 얼굴을 감싼 손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중간에 국장님 면담할 때 이사진이 검찰 고발 계획한다는 거 이미 알고 계시긴 했어. 그때도 시간 없으니까 서둘러 달라고 하셨거든. 그 자리에서 혹시 모르니까 기획안 바로 결제하고 넘기신 것도 그것 때문에 그랬던 거고.”
잠시 사이를 둔 윤이 설마, 하는 얼굴로 정언을 마주 보았다.
“혹시 우리가 엄대진 만나고 와서 그런 거 아니에요?”
엄대진의 이름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건 직후였다. 정언은 엄대진을 만나고 돌아온 이후로 내내 그 예상 밖의 영입 제의가 실은 최후의 통첩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항복하지 않으면 전쟁을 시작할 수밖에 없을 거라는.
정언은 최대한 동요를 숨기며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지. 아니라도 기막힌 타이밍인 건 부정 못 하고. 포섭 안 될 거라는 생각 했을 테니까 그쪽에서도 대비책은 마련하지 않았겠어? 일단 지금 시스템상 이미 이거 결재 올라갔고 우리가 제작까지 한 상황이라 위에서 방송 보지도 않고 못 내보낸다고 할 수는 없어. 는 보도본부장 컨펌 받는다고 해도 우리는 지금 사실상 국장님하고 사장님 직속이잖아.”
말을 하는 동안 머릿속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YBS의 시스템은 수십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투쟁과 논의를 거쳐 쌓아 온 것이었다.
역시 긴 시간 동안 여러 시행착오를 거쳤고, 황금기의 중심을 지나 회사를 지휘하게 된 유동욱 사장이나 백선경 국장 같은 인재들이 더 자유로운 보도를 위해 지금의 체계를 만들어 둔 뒤였다.
그걸 그렇게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기에 어용 경영진이며 이사진들이 끊임없이 압박을 넣었고, 마침내는 이 모든 일의 시발점인 엄대진이 직접 나서야만 했다는 것을 떠올린 정언은 마음을 다잡았다.
독재자들이 지배하던 시절에도 모든 사람의 입을 막는 건 불가능했다. 처음부터 그렇게 압박을 넣었는데도 어떻게든 방송 직전까지 올 수 있었다는 건, 며칠만 더 버티며 싸운다면 그토록 긴 레이스의 끝을 볼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골인 지점을 목전에 두고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무조건 사장님하고 국장님부터 잡겠다는 거예요?”
윤의 물음에 정언은 다시 편집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두 분이 자리 지키는 거 한선당에 지금 엄청 거슬릴 거야. 손발 다 잘라 놨다고 해도 머리가 살아 있는 거니까. 머리 자르고 아예 관짝 넣어 버리겠다 그거지.”
“만약에 구속영장 청구되거나 하면…….”
아무래도 불안한지 말끝을 흐리는 윤에게 정언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지금 상황으로는 구속 불가능해. 일단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가자. 내일 오후에 더빙까지 끝내고 종편실 들어가야 돼.”
잠깐 머뭇거리다 곧 고개를 끄덕인 윤이 그제야 하려던 일이 퍼뜩 떠올랐는지 잠깐만요, 하고 후다닥 편집실을 나갔다.
문 밖에서 지혁과 짧은 통화를 나누는 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언이 문 너머로 둔탁하게 들리는 그 목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영상을 계속 앞뒤로 돌려 보는 사이, 통화를 마친 윤이 들어와 문을 닫았다.
그때 윤의 핸드폰에 포털 사이트 앱의 뉴스 속보 알림이 떴다. 프리뷰 파일을 뒤적이며 무심결에 핸드폰 화면을 확인해 본 윤이 멈칫하더니 정언에게 말했다.
“이규완 검찰 소환됐다는데요.”
선전포고. 정언은 머릿속으로 빠르게 일정을 가늠했다. 지금 검찰에 소환됐다면 조사가 짧으면 몇 시간, 길면 스무 시간 가까이 갈 수도 있었다. 조사에 순순히 협조한다면 영장 청구를 하지 않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엄대진이 이규완을 잡겠다고 작정했으니, 무슨 핑계를 붙여서든 영장 청구를 할 가능성도 충분했다. 이규완이 언론에 그 영상의 존재를 폭로하기 전 무조건 입을 막으려 들 것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오늘 조사, 이르면 모레 영장 청구, 영장 심사에서 구속 판정이 난다면 이규완은 반드시 구속적부심
신청을 할 게 틀림없었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이번 주는 버틸 수 있다는 계산이 섰다. 유동욱 사장과 선경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건 엄대진의 판단 미스일 수도 있었다. 최대한 이쪽의 분위기를 살피려 하다 가장 적당한 타이밍을 놓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만약 검찰 고발이 한 주만 더 빨랐다면 유동욱 사장과 선경은 이미 기소된 상태일 수도 있었다. 언론 탄압에 대한 국민 여론은 좋지 않았다. 대선 레이스에 들어간다면 민권당에서 엄대진과 한선당의 공영방송 장악을 문제 삼을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엄대진의 입장에서는 처럼 화제성 높은 프로그램을 상대로 이름이 오르내리는 건 최대한 피하고 싶을 게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