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39
239화.
사흘 밤샘은 차라리 고문당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절로 들게 했다. 그 좁은 편집실에서 번갈아 가며 한두 시간씩 눈을 붙이고, 내내 죽어라 수백 개의 영상을 돌리고 또 돌려 보는 건 사실상 정신 고문이나 다름없는 일이기는 했다.
간신히 가편집과 더빙까지 마치고 백업을 하자마자 정언은 잠깐 자고 오겠다며 숙직실로 직행한 뒤였다. 그나마 정언보다 깨어 있는 시간이 조금 적었던 윤은 찬물로 세수를 하고는 사무실로 돌아왔다.
벌써 늦은 오후였다. 사무실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윤에게 쏠렸다. 재희가 윤을 보더니 어, 하며 손을 흔들었다.
“김 피디, 가편 끝났어?”
“네.”
“고생했네. 서 피디는?”
“잠깐 눈 붙인다고 내려갔습니다.”
윤이 대답하자 재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쉽다는 표정으로 눈썹 부근을 긁적였다.
“스케줄 너무 빡빡해서 미안하네. 종편실 언제 갈 거야?”
“내일 오후에요. 오늘 밤에 스튜디오 따고 편집한 뒤에 바로 종편 넘기려고요.”
재희는 그 말에 잠시 책상 위의 탁상 달력을 집어 들어 자기 스케줄을 확인했다.
“오케이. 거긴 내가 같이 들어갈게. 안 피곤해?”
“괜찮습니다.”
물론 그다지 괜찮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그런 티를 낼 수는 없었다. 맞은편에서 기지개를 쭉 켠 예준이 불현듯 감탄하는 얼굴로 윤을 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김 피디는 며칠 밤을 새워도 왜 그렇게 산뜻하지?”
곁에 앉아 있던 현진이 고개도 들지 않고 대꾸했다.
“그걸 원판 불변의 법칙이라고 할걸?”
“저도 알거든요?”
예준이 발끈했으나 현진은 침착했다.
“모르는 거 같아서.”
괜히 말했어, 하고 예준이 투덜거렸다. 본의 아니게 민망해진 윤은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아, 어제 반응 어때요?”
편집 때문에 정신이 없어 뉴스를 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핸드폰 뉴스 앱으로 들어오는 알림의 제목만 보고 엄청나게 화제가 되기는 했나 보다 하며 간신히 짐작한 게 다였다. 곧 방금 전의 굴욕을 잊은 예준이 의자에 등을 기대며 대답했다.
“난리야. 어제 방송하고 나서부터 서온건설 실시간 검색어에서 떨어지질 않아. 포털에서 자체적으로 검색어 내렸는지 밤에 잠깐
없어졌었는데 사람들이 알아서 검색하니까 안 되는 것 같더라고.”
“제보도 많이 들어왔다면서요.”
고개를 주억거린 예준이 자기 핸드폰으로 뭔가를 검색하더니 윤에게 보여 주었다. 몸을 숙여 예준의 핸드폰을 보자, 아파트 주차장 기둥과 천장에 육안으로도 확실히 보일 만큼 균열이 크게 간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어제 이도하가 내보낸 게 여기야. 근데 이게 하필이면 또 올해 입주 시작한 서온 신축 아파트라는 거 아냐. 제대로 터졌지. 어제
이 기자 보도 보니까 인근 다른 시공사 아파트에 비해서 눈에 보이는 증상이 너무 심각해.”
“입주민들은 대피했고요?”
“응. 그래도 인명 피해 없어서 천만다행이지. 정부에서 오락가락하는데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대피소 빨리 마련해 달라고 요청해서
일단 근처 체육관 하나 빌려 들어갔어. 여진 올 때마다 균열이 더 커지고 있는데다, 115동 건물은 눈으로 보일 정도로 건물이 기울어졌다고. 주민 입장에서는 절대 거기 못 있지. 서온건설 아주 뒤집어졌더라고. 기자들이 서온건설로 죄다 몰려가서 전화가 아예 안 된대.”
윤은 눈썹을 조금 찡그리며 말했다.
“그 지역에 서온건설이 시공한 건물 많은데 그것도 문제 되겠네요.”
“남정건설 시절부터 지었던 건물이 한두 개가 아니라서 지금 TK 여론이 장난 아냐. 한선당에서 비상대책위원회 구성하고 난리 났다는데, 엄대진 속으로 지금 쫄려 죽을 지경일걸. 민권당에서 민주영 의원이랑 한 열 명 내려가서 현장 보고 대책 논의하고 했다는데, 정작 지들 지역구 있는 한선당은 비대위 한답시고 오늘 아침에 갔대서 더 난리야. 이쪽 신도시 지역은 당연하고 남정건설 시절부터 지었던 건물 전수조사 싹 해야지, 뭐.”
“다른 지역에서도 여론 안 좋대요?”
예준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제 이 기자가 서온건설에서 내진시공 철근 사용 안 했다, 시방서에 쓰인 자재랑 다르다 이 부분 걸면서 임대주택에 저가 자재 쓴 거 언급했거든. 그것 때문에 여론 더 최악이더라고. 임대주택 사는 사람들 무시하는 거냐고. 지금 경기도하고 서울에서도 사람들이 지진 느낄 정도인데, 내 집이 그렇다고 생각하면 가만히 있을 사람 없지. 후속 보도에서 더 자세한 내용 공개하겠다고 했는데 기자들이 지금 서온건설 시공한 임대주택마다 들쑤시고 다니고 난리도 아닌가 봐. 민권당 사반위 쪽으로도 연락 엄청나게 들어오고.”
아무리 입을 막으려 해도 천재지변 앞에서 피해를 입은 평범한 사람들까지 모조리 묻어 버릴 수는 없을 터였다.
지진이 거의 없던 이전이라면 별문제가 되지 않고 넘어갔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드문 강진이었고, 평소 지진 대비가 거의 안 돼 있는 사람들이 겪었을 공포가 가벼울 리 만무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이 지진으로 한순간 무너질 수 있다는 두려움은 그냥 넘길 만한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하청에서 서온건설에 대한 제보가 시작된 것도 작년 지진 이후였다. 이 일의 파장이 작을 수는 없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석현이 책상에 놓여 있던 아몬드를 오독오독 씹어 먹으며 끼어들었다.
“전수조사 갈 수밖에 없겠네. 그런데 그것도 어차피 받아먹은 놈들이 하는 거 아닌가?”
예준이 그 말을 받았다.
“그러니까 후속 보도가 중요한 거지.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감리 조작 관련해서 들어갈 거라는데. 그거 터지면 정부에서 자기들이 특위 구성한다고 나설 수 있겠어?”
“그렇긴 하지. 김양운 위에서 죽도록 깨졌겠구만.”
흥미진진하다는 투로 아몬드를 오독거리는 석현에게 예준이 방금 소주 한 잔 마신 사람처럼 차지게 캬, 하는 감탄사를 뱉고는 낄낄거렸다.
“어제 실시간으로 방송하는데 김양운 표정 장난 아니더라고. 전 부장님이 시스템에도 그냥 내진설계 미비 취재 건이라고만 올렸었다며. 뭔지도 모르고 내보냈더니 통수 제대로 맞은 거 아냐.”
“박쥐 같은 새끼, 깨져도 싸다. 하여튼 머리가 나쁘면 스파이도 못한다니까. 평소에 전 부장님 좀 살살 구슬려 놨으면 뭐 터트리려는 건지 미리 알았을 거 아냐. 그 머리도 없으니까 남들 다 보는 앞에서 부장님한테 시대가 달라졌다 어쩌고 지랄을 했지.”
“근데 이거 방송 계속 내보낼 수 있을까?”
예준이 갑자기 불안하다는 듯 몸을 바로 세워 앉았다. 윤은 그 말에 애써 웃었다.
“후속 보도 예고했다면서요. 그러면 막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요?”
“이상해 보여도 일단 입 막는 거랑 자연스럽게 내버려 두고 망하는 것 중에 뭐가 낫겠어? 서온건설 하면 아직도 사람들이 엄대진 이름 바로 연결해서 떠올리는데, 이러면 실시간으로 지지율에 타격 장난 아니라고. 특히 TK에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도 막아야지.”
심각하게 대답한 예준이 잠깐 생각에 잠긴 듯 턱 부근을 만지작거렸다. 그때 사무실 문이 열렸다. 성옥이었다. 커피라도 사러 갔었던 건지, 한 손에 아직 한 모금도 안 마신 듯한 커피가 들려 있었다. 그러나 성옥은 커피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발을 동동 구르며 문 밖을 가리켰다.
“지금 사무실 엄청 시끄러워요. 무슨 일 났나 봐요.”
그 말에 재희가 퍼뜩 고개를 들며 물었다.
“무슨 일?”
“모르겠어요. 안에서 막 소리 지르고…….”
그렇지 않아도 후속 보도 이야기를 하던 참에 사무실에 무슨 일이 났다니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예준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예준이 사람들에게 손짓을 했다.
“빨리 가 보자.”
대답도 듣기 전 예준이 먼저 사무실을 튀어나갔다. 윤도 즉시 그 뒤를 따랐다. 사무실 앞은 이미 다른 팀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문이 열린 사무실 안에서 잔뜩 쉰 듯한 고함 소리가 날카롭게 넘어왔다.
“전 부장, 계속 일 이딴 식으로 할 거야? 동료 뒤통수치고 이딴 보도 내보내서 화제성 몰이하니까 아주 뭐라도 된 것 같아?”
보도본부장 이명구였다. 사람들은 멀찍이 선 채 명구와 대치하고 있는 한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명구의 말을 들어 보니 어제 보도를 문제 삼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명구의 곁에 선 양운 역시 굳은 표정으로 한동을 노려보고 있었다.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이마에 핏대를 세운 명구와는 달리, 한동은 팔짱을 낀 채 유들유들하게 대꾸했다.
“본부장님, 말은 똑바로 합시다. 뒤통수는 지금 누가 치고 있습니까? 허구한 날 뉴스 시청률 타령하던 게 누굽니까? 그래서 어제 시청률 몇 퍼센트 나왔냐고요. 원하는 대로 해 드려도 왜 지랄입니까, 지랄이?”
윤은 저도 모르게 입을 막았다. 전한동 부장의 전설에 대해서는 어깨너머로 주워들은 이야기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렇다 해도 보도본부장 앞에서 대놓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걸 보니 자기 일도 아닌데 심장이 빨라졌다.
명구가 귀를 의심하는 표정으로 눈을 치켜떴다.
“전 부장, 지금 뭐라고 했어?”
한동이 귀를 후비적거리며 대꾸했다.
“아, 거 심석건 국장도 그러더니 희한하게 윗자리만 올라가면 귓구멍에 기름때가 끼는지 사람 말을 한 번에 못 알아들어. 원하는 대로 해 줬더니 왜 지랄이냐고 했습니다. 됐습니까?”
“야, 전한동!”
명구가 고함을 지르자 한동이 짐짓 깜짝이야, 하고 놀란 척을 했다.
“저 귀 안 먹었습니다. 소리 안 질러도 다 들려요.”
“어쨌든 오늘 보도 못 나가는 걸로 알아!”
새파래졌던 명구의 얼굴이 도로 새빨개졌다. 목에 핏대를 세우는 명구에게 한동이 정색을 하며 되물었다.
“누구 맘대로요? 오늘 후속 보도 내보내겠다고 시청자들하고 약속한 겁니다. 그걸 왜 본부장님이 깹니까?”
“위에서 절대 방송 못 내보낸다니까 그렇게 알라고! 전 부장하고 이도하, 원진솔 자르겠다는 거 간신히 말려 놨더니 고마운 줄은 모르고 어디서 큰소리야, 큰소리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