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4
24화.
“심증이 너무 확실한데 그럼 어떡해요?”
재희가 다시 안경을 쓰며 정언을 응시했다. 재희를 처음 보았을 때 악명에 비해 의외로 단정한 인상의 얼굴이라 놀랐었는데, 그 단정함이 실은 스치기만 해도 베일 듯한 예리함이었다는 것을 깨닫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재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심증, 정황, 추측, 이딴 거 내 앞에 들이밀지 마. 상상력으로 공백 채우지 말라고. 그런 거 하고 싶으면 드라마국 가. 99퍼센트의 심증 같은 건 없어. 1퍼센트의 팩트가 99퍼센트의 심증보다 확실하다고 했지? 지금 서 피디가 나한테 보여 준 것 중에 그 주장에 대한 팩트가 대체 뭐야?”
“와이프 얘기도 그렇고, 블로그도 봤을 거 아니에요. 스케치 따온 것도 다 보냈잖아요!”
“그래서 그게 서 피디 주장에서 뭘 증명하는데? 타살이라는 것도 증명 안 되고 회사 비리도 증명 안 돼. 전부 넘겨짚고 있잖아. 아마추어야?”
“선배!”
정언이 정말 화가 난 얼굴로 재희의 말을 잘랐다. 아무래도 이대로 내버려 뒀다가는 세계 제3차 대전이라도 일어날 기세였다. 윤과 함께 눈치만 보고 있던 민혜가 서둘러 끼어들었다.
“에이, 강 피디 왜 그래. 애초에 지금 팩트가 있으면 경찰 수사로 넘어갔지. 심증이 확실하니까 우리가 증거 찾아보자 이거잖아. 뭐 그렇게까지 말을 하고 그래. 이 정도면 그림은 나오지 않아? 만약에 진짜 자살이면 과로사 문제로 엮어서 내보낼 수도 있고. 어차피 전에 과로자살 아이템 얘기도 나왔었잖아.”
재희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정언을 물끄러미 보았다. 윤은 재희의 시선을 따라 정언에게 눈길을 주었다. 정언은 고집스럽게 재희를 노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이 이런 식으로 부딪친 건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게 분명했다.
정언이 먼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선배가 컨펌하면 내 주장 증명할 증거 찾아오겠다고요.”
정언은 한발도 물러설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 얼굴을 본 재희는 짧은 한숨을 쉬었다.
“이거 꼭 해야겠어?”
“네.”
“내가 승인 못 하겠다면 어떻게 할 건데?”
재희의 말에 기가 찬다는 얼굴을 한 정언이 따져 물었다.
“오늘따라 진짜 왜 이래요? 이것보다 더한 거 가져와도 하라고 했잖아요! 무슨 증거를 더 원하는데요? 내가 지금 죽은 사람 살려 내서 자살한 거냐 아니냐 물어보고 와요?”
“팩트 가져오면 되는 겁니까?”
그때까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윤이 불쑥 물었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실이 툭 끊어지듯, 정언과 재희가 거의 동시에 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윤은 이 끝으로 깨물고 있던 입술 안쪽을 조금 더 힘주어 눌렀다. 긴장한 탓에 몸이 떨렸다.
“팩트 가져오겠습니다. 승인해 주십시오.”
재희의 눈을 똑바로 보는 데는 약간의 용기가 필요했다. 안경 너머에서 서늘한 눈동자가 이쪽을 뚫어지게 마주 보았다. 민혜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어머머, 하고 정언의 등을 콩콩 때렸다.
윤이 이럴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보기 드물게 당황한 얼굴을 한 정언이 윤과 재희를 번갈아 보았다. 윤은 테이블 아래서 주먹을 두어 번 쥐었다 펴며 애써 떨리는 손을 진정시켰다. 입 안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재희의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속을 읽기 힘든 눈이었다. 윤은 문득 그 눈이 정언과 닮았다고 느꼈다.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윤을 마주 보던 재희가 불현듯 푹 웃었다.
“서 피디가 며칠 사이에 교육 잘 시켰네.”
칭찬인지 아닌지 종잡을 수가 없는 말투였다. 이런 것도 비슷하네, 하고 속으로 생각한 윤은 대답 대신 재희의 표정을 살폈다. 재희가 얼굴에서 곧 웃음기를 거두고는 턱을 괴며 윤에게 물었다.
“김 피디, 내가 팩트 가져오라고 하는 거 무슨 말인지 알아?”
“네?”
“우리를 진짜 죽이고 싶을 만큼 싫어하는 사람들이 봤을 때도 트집 잡힐 게 없어야 된다는 거야. 고의든 실수든 빈틈은 용납 안 돼. 이만하면 됐겠지, 이런 건 절대 안 통해. 정확하고 객관적인 팩트라서 누가 봐도 절대 반박할 수 없어야 한다고. 지금 김 피디가 한 말 이렇게 하겠다는 뜻이야.”
얼굴은 평온했으나 그 내용은 무시무시했다. 오 마이 갓,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걸까…… 속으로 생각한 윤은 손끝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손을 말아 쥐며 숨을 들이쉬었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딱딱하게 굳은 윤의 얼굴을 마주 보던 재희가 몸을 일으켰다.
“서 피디, 나가서 얘기 좀 하자.”
“여기서 해요.”
정언이 딱딱하게 대꾸하자 재희가 조금 더 낮아진 목소리로 다시 한 번 말했다.
“둘이 얘기 좀 하자고.”
잠시 재희를 쳐다보던 정언이 썩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재희를 따라 일어났다. 두 사람이 회의실을 나가자 문이 닫혔다.
일순간 긴장이 풀린 윤은 저도 모르게 의자 등받이에 등을 파묻었다. 없던 심장병이 생기는 기분에 가슴께를 움켜쥐고 헉헉대며 숨을 고르자 민혜가 웬일이니, 하며 윤의 팔뚝을 찰싹 쳤다.
“김 피디, 깡 좀 있네?”
윤은 속으로 이건 깡이 아니라 주둥이를 조절하는 신경계 이상이 분명하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정언의 얼굴을 본 순간 거의 반사적으로 그런 말이 튀어 나갔던 것이다. 정언이 이 일을 꼭 방송하기 원한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왜 그렇게 느꼈는지는 설명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맞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막연한 느낌이 문제였다. 그게 진짜라면 어떻게든 정언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물론 이제 와서는 뱉은 말을 돌이킬 수도 없었다.
신이 있다면 시간을 5분만 돌려 줬으면, 하고 생각하던 윤은 요즘 들어 하루에 세 번쯤은 시간을 되돌리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의 속을 알 리 없는 민혜가 윤의 등을 두드리고는 파이팅, 하며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맥없이 웃어 보인 윤은 민혜가 나간 회의실에서 혼자 테이블에 이마를 두어 번 박고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었다.
* * *
“더블 초콜릿 프라페에 에스프레소 더블 샷하고 초코 드리즐 추가해 주시고. 아, 위에 휘핑크림도 많이 올려 주세요.”
부러 방송국 로비의 카페를 피해 근처의 단골 카페에 온 건 남들 눈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도 카페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오는 내내 뭘 주문할까 그 생각만 했는지, 카운터 앞에 서자마자 숨도 쉬지 않고 주문을 하는 정언을 내려다본 재희는 코끝으로 웃었다. 정말 화가 나긴 난 모양이었다.
“방금 그거하고, 아이스 아메리카노 톨 사이즈로 하나 주세요. 계산은 이걸로 할게요.”
재희가 내민 카드를 받아 계산한 점원이 카드와 영수증을 함께 돌려주었다. 정언이 먼저 창가의 자리로 향했다. 재희는 주문한 음료가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받아 들고는 맞은편에 앉으며 혀를 찼다.
“선배가 후배님 드시는 것까지 가져다드려야 돼?”
“사 달라고 한 적도 없거든요.”
정언이 창가로 아예 고개를 돌린 채 대답했다. 어지간히 기분이 상한 듯했다. 하기야, 평소에는 단것을 잘 먹지 않는 정언이 이런 걸 시켰을 때는 그럴 만한 상태임을 재희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정언이 전투적으로 휘핑크림을 퍼먹기 시작했다. 커피를 마시며 그런 정언을 흘끔거리던 재희는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서 피디.”
재희가 정언을 부르자 정언은 손을 멈추고 컵에 빨대를 푹 꽂으며 내뱉었다.
“까놓고 말해 봐요. 왜 그랬어요?”
이렇게 선수를 치면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정언이 진심으로 화가 난 표정을 하며 재희를 빤히 보았다.
“내가 납득할 수 있게 설명을 해 보라고요. 이거 컨펌 못 해 준다는 이유 있잖아요. 백 번 양보해서 내가 심증만 있다는 거 인정하는데, 여태 이것보다 더 별거 아닌 것도 다 컨펌해 줬으면서 이게 안 된다고 하면 내가 납득을 해요? 사람을 그렇게 남 앞에서 개망신을 주고?”
재희는 들고 있던 컵을 내려놓으며 되물었다.
“개망신?”
“새파란 후배 앞에서 선배가 나 이렇게 물 먹이는 게 개망신 아니면 뭔데? 그리고 김 피디가 이것 때문에 새벽같이 기제국 가서 자료 다 받아 왔는데, 뭣도 모르는 애한테 무안을 줘도 정도가 있죠. 나보고 뭐라 하지 말고 선배도 애 잡지 마요. 김윤이 서정언 때문에 도망가나, 강재희 때문에 도망가나 내기 한번 해봐?”
정언이 씩씩거리며 삿대질을 했다. 눈앞까지 들이밀어진 손가락을 뒤로 민 재희는 의자에 몸을 기대며 바람 빠지는 소리로 웃었다.
“그래도 용감하던데, 내 앞에서 눈 똑바로 뜨고 팩트 가져오겠다는 거 보니까.”
많은 피디들이 거쳐 간 자리였으나, 조금 전의 윤 같은 케이스는 재희의 기억에도 매우 드물기는 했다. 얘기하는 내내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더니, 갑자기 팩트 가져올 테니 승인해 달라고 당돌하게 마주 보는 얼굴에 내심 놀란 건 사실이었다.
곧이어 인트라넷에 그런 글 올리는 깡이 그냥 있는 건 아니었나 보다 생각하자 좀 안심이 되었다. 정언의 부사수 자리는 결코 쉽지 않았다. 때문에 윤 같은 타입이라면 차라리 정언과 잘 맞을 수도 있겠다 싶었던 것이다.
“말 돌리지 말고 이유 말하라니까요.”
“눈치는 왜 이렇게 빨라?”
진심 섞인 농담이 튀어 나갔다. 정언이 얼굴을 찌푸리며 재희를 빤히 보았다. 재희는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정언의 그 시선을 어슷하게 비껴 피했다. 정언은 자신과 가장 닮았고, 가장 오래 함께 일했고,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낸 후배였다.
말 한마디 하지 않아도 마치 마음을 읽는 듯 구는 정언이 편한 건 당연했지만, 동시에 간혹 그것이 불편해지곤 했다. 재희는 정언 역시 자신에게 비슷한 감정을 느끼지 않을까 짐작할 때도 있었다.
“위에서 하지 말래요? 아니면 하지 말라고 할까 봐 미리 발 빼는 거예요?”
정언이 날카롭게 묻자, 재희는 테이크아웃 컵에 맺힌 물기를 손끝으로 열없이 문질렀다. 찬감각이 지문 위로 습하게 번졌다. 카페 창을 통해 들어온 오후의 햇살이 투명한 잔을 지나 테이블 위에서 산란했다. 재희는 그 빛무리에 잠깐 눈을 주다 정언을 마주 보았다.
“이거 꼭 하고 싶은 이유가 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