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40
240화.
어제 뉴스 보도 후 징계하겠다고 위에서 난리를 부렸을 것은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자신이 만났던 이사진을 떠올린 윤은 저절로 나오려는 한숨을 눌렀다.
특종 터트려 화제성을 싹쓸이한 기자들에게 포상은 고사하고 해고를 운운하는 회사라니, 윗선이 어느 정도로 미쳐 돌아가는 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한동이 코웃음을 치더니 빈정거렸다.
“아이고, 아주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나려고 그러네. 누가 자르지 말아 달라고 무릎 꿇고 빌었습니까? 어제 예고까지 했는데 오늘 방송 안 내보내면 어떻게 될지 몰라서 그래요?”
명구가 답답하다는 듯 자기 가슴을 두어 번 탕탕 두드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나라고 이런 소리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 보도지침 내려왔다고, 보도지침! 서온건설 무조건 언급하지 마! 엄대진하고 서온건설 엮으려고 들면 그날로…….”
그때 누군가가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사무실을 가로질렀다. 곧 날카롭고 정확한 발성이 명구의 말을 칼같이 끊었다.
“누가 이렇게 시끄럽게 굴어!”
그 목소리에 일순간 사무실이 조용해졌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명구가 말을 멈췄다가 뒤를 휙 돌아보았다. 그 얼굴이 대번에 하얗게 질렸다. 선경이었다. 선경을 알아보자마자 명구가 급히 벌렸던 입을 다물며 두 손을 모았다.
“국장님, 여긴 어떻게…….”
“이 본부장님, 지금 어디서 목소리를 높입니까?”
선경이 내뱉은 말에 명구가 눈치를 보며 마른 입술을 축였다. 말이 본부장이지 명구는 선경보다 몇 기수가 아래인 후배였다. 명구 역시 선경이 현역이던 시절 그 아래서 구를 만큼 굴렀기에 선경의 성격을 모를 리 없었다.
직위 때문에 선경이 존대를 쓰고는 있었으나, 그게 도리어 반말보다 더 추궁처럼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명구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한 걸음 다가선 선경이 명구를 다그쳤다.
“방금 한 말 다시 해 보시죠. 보도지침? 무슨 보도지침이요?”
“이사회에서…….”
선경이 눈앞에 있으니 기가 질려 말이 안 나오는지, 명구가 말끝을 흐렸다. 당연히 선경이 그 꼴을 내버려 둘 리 없었다.
“똑바로 말 안 합니까?”
눈빛으로 사람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선경의 기세에, 명구가 어쩔 줄 몰라 하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입술을 달싹였다.
“이사회에서 어제 보도 내용 때문에, 서온건설 사명 언급하는 건 부적절하다고…….”
웅얼거리는 명구를 뚫어지게 마주 보던 선경이 물었다.
“이 본부장님, 지금이 몇 년도죠?”
질문의 의도를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한 듯,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한 명구가 머뭇거리다 되물었다.
“네?”
선경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이 몇 년도냐고 묻지 않습니까!”
명구가 쩔쩔매며 저, 하고 운을 떼자마자 선경의 일갈이 날아들었다.
“야, 이명구!”
명구가 기절할 정도로 놀라 소스라치며 몸을 바짝 굳혔다. 국장이 본부장에게 이런 식으로 말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상대는 선경이었다. 후배로 구르던 시절이 수십 년이었기에, 명구는 거의 반사적으로 선경의 눈치를 살폈다. 선경의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꽂혔다.
“너 지금 시대가 언젠데 쌍팔년도 보도지침을 운운해? 보도지침을 어디서 내려? 이사회가 뭔데? 엄대진이 벌써 대통령 됐어? 서온건설 망하면 대한민국이 무너져? 대통령도 내리면 안 되는 게 보도지침인 거 알아, 몰라? 이 새끼가 지금 어디서 창피한 줄도 모르고 그딴 소리를 지껄여!”
그렇지 않아도 창백하던 명구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빠졌다. 곁에 서 있던 양운이 주춤거리며 조심스럽게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선경이 당장 명구의 멱살이라도 잡을 듯한 얼굴로 내뱉었다.
“갑자기 주둥이 본드로 붙였어? 방금 전에 전 부장한테 하던 대로 똑같이 해, 왜 못 해?”
“국장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런 꼴을 당하는 게 창피하긴 했는지, 명구가 눈알을 굴리며 어물거렸다. 그러나 그건 불난 집에 기름 붓는 꼴이었다. 선경이 코웃음을 치더니 곧 얼굴에서 웃음기를 싹 거뒀다.
“내가 국장인 거 알고는 있었냐? 넌 아는 새끼가 여태까지 김양운이랑 그러고 작당질을 했어? 보도본부장 직함 붙고 이사회 백 업으니까 아주 선배고 뭐고 눈깔에 보이는 게 없지?”
뒤로 물러섰던 양운이 자기 이름이 언급된 통에 마른침을 삼켰다. 명구가 선경의 시선을 피해 바닥을 보았다. 그러자 선경이 명구의 어깨를 확 잡아챘다.
“이명구, 내 눈 보고 대답 안 해?”
명구가 고개를 숙인 채 겨우 시선을 들었다. 선경이 파랗게 불꽃이 튀는 눈으로 명구를 날카롭게 응시했다.
“내가 너 그렇게 가르쳤어?”
“……죄송합니다.”
선경의 기에 눌린 명구가 다 죽어 가는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선경이 명구의 어깨를 퍽 소리가 나도록 쳤다. 무방비 상태에서 명구가 휘청하며 뒤로 밀려났다.
선경이 다시 명구를 밀치자 옆에서 양운이 이러지 마십시오, 하며 선경을 말리려 했으나 선경은 그 손을 있는 힘껏 뿌리쳤다.
“죄송? 뭐가 죄송해? 너 나한테 죄송한 게 뭐야? 사과할 거면 시청자들한테 해! 개판 만들어서 죄송하다, 내가 부역자라 죄송하다 무릎 꿇고 사과하라고, 이 새끼야!”
선경이 나타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탓인지, 명구는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듯한 사무실 안에서 선경의 또렷한 목소리가 울렸다.
“김양운 내려가고 오늘 진행은 정수창이 해.”
“아니, 국장님, 그게 무슨…….”
양운이 날벼락을 맞은 얼굴로 눈을 크게 떴지만, 선경의 얼굴은 냉정했다.
“억울하면 이사회 달려가서 고발해. 사장님 지시야. 본부장이 내 위라도 사장님 아래 아닌가? 아직 이사회에서 나하고 사장님 권한 뺏을 법적 근거 없어. 내가 피고인 확정되고 국장 자리 잘리기 전까지 내 권한 살아 있으니까 토 달지 마. 전 부장은 후속 보도 예정된 대로 내보내고. 이게 너희들 그렇게 좋아하는 지침이니까 개소리하지 말고 입 다물어.”
허리에 손을 짚은 선경은 사무실 안을 둘러보며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을 맞췄다. 형형하다는 수식어가 가장 적확할 듯한 눈빛이었다. 스치기만 해도 베일 듯 칼날처럼 날카로운 시선이 사무실에 깔린 침묵 위를 지났다.
선경이 그 고요 속에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여기 있는 사람들 다 똑바로 들어. 자기 목숨 아끼는 거 본인 선택이야. 내가 그거 가지고 뭐라고 안 해. 위에 동조하든 침묵하든 반항하든 자기 자유야. 그런데 옳고 그른 것 정도는 제대로 판단해. 목숨 바쳐서 정의 지키라는 소리 아냐. 내가 하는 짓이 뭔지 알고 하란 말이야. 최소한 자기 자신한테 변명은 되게, 납득은 가게 행동하라고! 내가 먹고살아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그랬다, 내가 책임질 가족들이 있어서 그랬다, 내가 두려워서 그랬다!”
여기저기서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시선을 떨구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거대한 철벽처럼 굳건하던 선경의 목소리가 그 순간 얼핏 흔들렸다.
“개 같은 짓 하면서 이게 정의다, 세상이 달라졌다 우기지 마. 동조하고 침묵하는 거 안 말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게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일인지 나도 잘 알아. 그런데 최소한 너희도 양심이 있으면 그 두려움 뚫고 가려는 애들 죽이려고 들지는 말아야 할 거 아냐! 걔들도 그거 바보 같은 짓인 거 잘 알고, 계란으로 바위 치는 짓인 거 알면서 하는 애들이야. 너희가 멍청하다고 손가락질하고 어떻게든 눈 뽑고 혀 잘라 병신 만들려고 안 해도 벌써 그럴 놈들 차고 넘치는 애들이라고. 알아들어?”
아무도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잠시 숨을 고른 선경이 나지막하게 내뱉었다.
“다들 자리 돌아가. 이 본부장은 나 따라 나오고.”
선경이 먼저 몸을 돌리며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사무실을 나갔다. 바다가 갈라지듯 사람들이 서둘러 양쪽으로 비켜났다. 명구가 죄인처럼 선경의 뒤를 따랐다. 선경이 복도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사무실 안에 술렁거림이 일었다.
재희가 한동에게 달려갔다.
“부장님, 괜찮으세요?”
빨개진 코끝을 슥슥 문지른 한동이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적거렸다.
“뭐가 괜찮고 말고야, 인마. 야, 무슨 구경났다고 다 몰려왔어? 빨리 안 가?”
재희가 팀원들에게 입모양으로 먼저 가, 하고 말했다. 찬수가 후다닥 팀원들을 양 떼 몰듯 몰아 사무실을 나왔다.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석현이 참고 있던 숨을 크게 내쉬며 부르르 떨었다.
“국장님 장난 아니다, 진짜. 현역이실 때는 더했다는데 상상도 안 돼.”
선경의 현역 시절은 윤으로서는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다. 하기야, 몇십 년 전의 시보국은 금녀의 구역이었다. 거기서 국장 자리까지 올라갔을 정도라면 선경이 얼마나 자신을 채찍질했을지는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위에서 그렇게 프레셔 넣는데도 다들 이만큼이라도 버티는 거 아니에요. 사장님하고 국장님 없었으면 벌써 작살났지.”
자리에 앉지 못하고 서성거리던 예준이 대꾸하며 입가를 만지작거렸다.
“그런데 나 왜 이렇게 불안하지? 이사회에서 직접 지침 내렸다는 거 보니까 가만히 안 있을 것 같은데.”
석현이 그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러니까. 아이고, 몰라. 뭐 어떻게든 안 되겠어? 엄대진 망하려고 이렇게 돌아가는 거 아니겠냐?”
“어우, 이게 웬 난리야. 일단 저녁이나 먹죠.”
그럽시다, 하며 기지개를 켠 석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려던 팀원들이 앉아 있는 윤을 보더니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김 피디는?”
윤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생각 없어서요. 다녀오세요.”
“그래, 그럼. 밤 그렇게 새고 무슨 입맛이 있어. 좀 쉬고 있으라고.”
딱하다는 표정으로 혀를 찬 석현이 팀원들과 사무실을 나갔다. 긴 숨을 뱉으며 의자에 등을 묻은 윤은 잠시 눈을 감았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밖에 놓아 둔 아이스크림처럼 몸이 그대로 녹아드는 것 같았다.
잠깐만 그러고 있겠다는 게 무의식중에 잠든 모양이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는지, 윤은 문득 곁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퍼뜩 눈을 떴다. 머리가 한쪽 어깨에 거의 닿을 정도로 떨어져 있었다.
깜짝 놀라 자세를 고쳐 앉은 윤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정언과 눈이 마주쳐 멈칫했다. 정언이 얼굴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