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44
244화.
윤이 묻자 종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백업 안 한 자료는 없을 겁니다. 선배가 그런 게 진짜 철저하거든요. 녹취 따면 클라우드 바로 올려 저장하고, 기자수첩에 뭐 메모하면 바로 찍어서 메일로 전송해 놓고 그래요.”
“혹시 사찰당하고 계셨거나, 그런 건 없었고요?”
“그거야 저희는 일상이죠. 비자금 조성 추적하면서 그게 완전 뭐 생활이었어요. 그런데 오늘 같은 경우는 저희가, 다들 동요가 크죠. 그냥 협박하고, 감시하고 이러는 건 많았는데 사람을 이렇게…… 그런 적은 없었어서.”
종연의 말끝이 약간 흐려졌다. 동료가 이런 일을 당하는 걸 눈앞에서 봤다면 겁이 나지 않을 리 없었다. 팀원들에게 벌어졌던 일을 생각하던 윤은 나오려는 한숨을 눌렀다.
“기자님 상태 많이 심각한가요?”
“최소한 삼십 분에서 한 시간 정도는 방치됐었던 것 같아요. 가족분들 오셔서 수술 동의서 쓰고 바로 수술실 옮겼다는데, 아마 지금 중환자실 들어갔을 겁니다.”
얼굴을 찌푸린 종연이 말을 막 마쳤을 즈음, 로비 입구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윤을 불렀다.
“김 피디!”
정언이었다. 윤은 거의 반사적으로 그쪽을 돌아보았다. 정언 역시 자다 말고 뛰쳐나온 듯했다. 머리를 뒤로 당겨 묶은 채 세수만 겨우 한 게 분명한 얼굴에는 여전히 핏기가 없었다. 정언이 곁에 서 있는 종연을 보더니 얼른 자기 명함을 꺼내 건넸다.
“안녕하세요, 서정언입니다.”
“ 사회부 한종연입니다.”
종연이 꾸벅 인사하자, 정언도 마주 고개를 까딱이고는 바로 윤을 다그쳤다.
“어떻게 된 거야?”
“새벽에 쓰러져 계신 걸 근처 사는 사람들이 보고 신고했대요. 둔기로 머리를 맞아서 의식이 없으시다고…… 귀중품은 그냥 있는데 기자수첩하고 핸드폰, 보이스리코더만 가져갔다고 그러는데요.”
“미치겠네, 정말.”
정언이 한쪽 눈가를 손으로 덮어 두어 번 문지르며 내뱉었다.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던 종연이 위층을 가리키는 손짓을 했다.
“그, 일단 중환자실 올라가 보시겠어요?”
“아, 네. 감사합니다.”
대답한 정언은 윤을 끌고 종연과 함께 중환자실로 향했다. 중환자실 보호자 대기실에 몇몇 사람만이 남아 꾸벅꾸벅 졸거나 벽에 기대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종연은 구석에 모여 앉은 세 사람 쪽을 기웃거리더니 곧 가까이 다가갔다. 인기척에 중년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사모님, 저 한종연입니다.”
형원의 부인인 듯했다. 계속 울고 있었는지 눈이며 코가 온통 새빨갰다. 곁에는 젊은 여자와 교복 차림의 소년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젊은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겨우 스물, 스물하나나 되었을까 싶은 앳된 얼굴이었다. 아마 형원이 말하던 큰딸인 듯했다.
“안녕하세요.”
여자가 인사를 건네자 종연이 어어, 하며 그 어깨를 두어 번 가볍게 두드렸다.
“어, 시현아. 정민이도 왔네. 많이 놀랐지?”
“조금요.”
딸 이름이 시현, 아들 이름이 정민인 모양이었다. 시현이 짧게 대답하고는 자기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 제 엄마에게 건넸다. 무슨 말부터 해야 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서 있던 종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배 좀 어떻습니까?”
“모르겠어요, 모르겠고…… 수술은 잘됐다고 하는데, 마취가 깨 봐야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 안다고…….”
부인이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시현이 곁에서 제 엄마를 달래더니 정민에게 말했다.
“야, 엄마랑 내려가서 밥 먹고 와. 여긴 내가 있을 테니까.”
“누나는?”
정민이 눈치를 보며 묻자 시현은 턱짓을 했다.
“엄마랑 갔다 오라고.”
정민이 더 말 않고 엄마를 부축해 대기실에서 나섰다. 시현은 팔짱을 끼며 의자에 앉아 어깨를 움츠렸다. 그 모양을 가만히 보고 있던 정언이 윤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김 피디, 가서 따님 뭐 마실 거 하나 사다 드려.”
“아, 네.”
바로 아래층으로 내려가 편의점에서 음료수 몇 캔을 사들고 돌아온 윤은 시현에게 음료수를 건넸다. 웅크리고 앉아 있던 시현이 퍼뜩 놀라 고개를 들었다. 윤은 곁에 선 정언을 가리키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피디 김윤입니다. 이쪽은 서정언 피디님이고요.”
그러나 정언이 일부러 자신에게 음료수를 사다 주라고 한 보람도 없이, 시현은 윤에게는 전혀 관심조차 주지 않고 정언을 보더니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저 피디님 알아요. 저 엄청 팬이에요!”
정언도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는 못한 듯 당황한 기색으로 감사합니다, 하고 대답했다. 시현이 다급히 가방을 뒤지더니 사인 받을 게 없네, 하며 투덜거렸다. 정언이 두어 번 헛기침을 하더니 시현의 곁에 앉았다.
“저희가 취재하면서 아버님께 도움을 정말 많이 받아서요.”
“진짜요?”
웬일, 하며 시현이 웃었다. 아버지가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사람치고는 씩씩한 태도였다. 시현은 윤이 준 이온음료 캔을 따 두어 모금 마셨다. 정언은 몸을 조금 기울여 시현을 마주 보았다.
“아버님 상태에 대해서 뭐 얘기 들으신 거 있나요?”
“아직 잘 모른대요. 마취 깨려면 몇 시간 더 있어야 된다고 그래서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정언이 위로의 말을 건네자 시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걱정 안 해요. 우리가 맨날 그러다 아빠 죽으면 어떡하냐고 그랬는데 아빠가 절대 안 죽는다고, 그런 걱정하지 말라고 약속했어요. 이런 거 한두 번도 아닌데요, 뭐.”
그 말에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모두가 그런 두려움을 지니고 사는 걸까. 배시시 웃은 시현이 입가에 손을 대며 바닥 어딘가를 응시했다.
순간 윤은 쾌활해 보이는 그 얼굴에 얼핏 스치는 그림자를 알아보았다. 같은 두려움을 가진 사람들은 눈치챌 수 있는 찰나였다. 정언이 잠시 침묵하다 화제를 돌렸다.
“따님이 학교 신문사 기자라고 하시던데요. 기자 지망생이세요?”
시현이 하하, 하고 웃는 소리를 냈다.
“아빠가 그런 얘기도 해요? 뭐라고는 안 하고요?”
대답을 기다린 물음은 아닌 듯, 시현은 곧 말을 이었다.
“학교 신문사 다녔다고 그냥 이력서에 한 줄 쓰려고, 그런 건 싫어요. 아빠 같은 기자가 되고 싶거든요. 아빠도 있다 옮겼잖아요. 선배들은 저 피곤한 애라고 그러는데, 아빠는 피곤한 스타일이라야 기자질 잘한다고 그러더라고요. 아 참, 저 진짜 한 주도 안 빼놓고 매주 봐요. 아빠가 어제 나오는 거 보고 이번 주는 기대하라고, 완전 재밌을 거라고 그랬는데…….”
밝았던 목소리 끝이 떨렸다. 시현이 아이고, 하며 벌떡 일어나더니 공연히 옷자락을 툭툭 털었다.
“저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올게요.”
시현이 부리나케 자리를 떴다. 남들 앞에서 우는 걸 보이기 싫은 듯했다. 정언의 곁에 앉은 윤은 잠시 침묵하다 말했다.
“씩씩하네요.”
“그래도 애는 애지.”
짧은 한숨을 섞어 대꾸한 정언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시현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시현이 나간 쪽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정언이 몸을 일으켰다.
“잠깐 전화 좀 하고 올게.”
정언이 비상구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정민과 형원의 부인이 돌아온 건 삼십 분쯤 뒤였다. 날이 밝자 연락을 받았는지 대기실로 속속 형원의 동료들이 하나둘씩 달려왔다. 기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임 기자 아직 중환자실 있습니까? 면회 안 돼요?”
“마취 깨어나고 의식 돌아오는지 봐야 된다는데.”
“아이고, 이것 참…….”
윤은 사람들 사이를 떠도는 불안한 공기를 쉽게 느꼈다. 초조한 얼굴로 의자에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하는 사람들 중 먼저 말을 꺼내는 사람은 없었으나 다들 같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 자신들 중 누구라도 이런 일을 당할 수 있다고. 두려움은 쉽게 전염되는 감정이었다.
어쩌면 이런 상황을 노린 것일 수도 있었다. 언제나 본보기는 하나면 충분했다. 한 명을 본보기로 내걸면, 백 명이 침묵한다. 누가 그 두려움을 넘는 백한 번째, 백두 번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불현듯 머릿속을 잠식하는 생각들은 차갑고 날카로웠다.
얼마나 지났을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중년의 남자였다. 아무렇게나 자른 듯한 덥수룩한 머리에, 80년대 스타일의 촌스러운 뿔테 안경이 얼굴을 절반은 가린 채였다.
문이 열리기 무섭게 훅 끼쳐 오는 짙은 담배 냄새에 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남자가 어색한 표정으로 대기실 안을 훑었다. 그때 종연이 놀란 표정으로 그에게 달려갔다.
“최 주필님!”
그 말에 윤은 멈칫했다. 기자들이 최 주필님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윤이 아는 한 한 사람뿐이었다. 윤은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았다.
최창묵.
사진 속의 얼굴과는 많이 달랐으나, 유심히 본다면 알아보지 못할 정도도 아닌 것 같았다. 종연이 서둘러 그의 팔을 끌었다.
“여긴 어떻게 오셨습니까? 이쪽으로 오세요.”
창묵이 자신에게 쏠린 시선을 의식한 듯 황급히 종연의 손을 떼어 내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냐. 아냐. 그냥 연락받고, 어떻게 된 건가 하고…….”
“마취 풀리고 완전히 의식 돌아와야 면회할 수 있답니다. 여기 앉으세요.”
종연이 자리를 권했으나 창묵은 연신 사양했다.
“아니, 아냐. 나 담배 좀 피우고 올게.”
창묵은 서둘러 비상구로 빠져나갔다. 주위를 살핀 윤은 후다닥 그의 뒤를 쫓았다. 비상구 계단을 내려가던 창묵의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윤은 두세 계단 위에서 창묵의 등에 대고 물었다.
“최창묵 주필님 되십니까?”